작자: 목목(木木)
【정견망 2007년 11월 26일】
불가(佛家)수행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은 가부좌, 독경, 염불 등만 알뿐 역사적으로 불가수련 역시 공능이 존재했다는 것을 모른다. 또 많은 고승들 역시 큰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수련과정 중에 천목이 열려 투시, 요시, 숙명통과 다른 신통이 존재했다.
투시공능과 요시공능은 장애물을 통과해 내부의 물건이나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으며, 숙명통이란 작게는 한 개인의 과거나 장래에 발생할 일을 미리 알 수 있고 크게는 사회의 성쇠를 미리 알 수 있다. 감응(感應)공능은 다른 사람의 심리활동과 생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전해진 고승들의 전기로부터 우리는 앞서 언급한 공능이 많은 고승들의 몸에서 체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신통은 심지어 완전히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일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1. 투시공능과 요시공능
서진(西晉)과 후조(後趙)시대의 승려인 불도징(佛圖澄)은 주문(神呪)을 잘 외웠고 귀신도 쫓을 수 있었다. 그는 참기름을 연지에 바르고 손바닥에 칠하면 천 리밖의 일도 손바닥에 나타나 직접 대면하듯이 했다.
불도징은 늘 제자를 서역에 파견해 향을 구입하곤 했다. 한번은 불도징의 손바닥에 향을 사려는 제자가 장차 모처에서 잡혀 죽는 모습이 나타났자. 그는 즉시 향을 살라 주문을 외워 제자를 보호했다. 제자가 돌아와 “모월 모일 모처에서 도적의 위협이 있었는데 제가 막 해를 당하려 할 때 갑자기 향기가 일어나 도적들이 도망갔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불도징이 석호(石虎)와 실내에서 불법(佛法)에 담론하고 있었다. 불도징이 갑자기 “유주(幽州)에 화재가 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술을 입에 모금고 유주방향을 향해 뿜었다. 한참 지난 후 불도징은 미소를 지으며 “지금 유주의 불이 꺼졌습니다.”라고 했다. 석호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져 유주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과연 유주에 화재가 발생했으며 나중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는데 빗속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고 한다.
2. 숙명통 공능
1) 불도징
불도징은 요시 공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숙명통 공능도 지니고 있었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 그는 불법(佛法)으로 살인을 좋아하는 흉노족 석륵(石勒)을 교화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에 들어가 평소 부처를 믿던 대장군 곽흑략(郭黑略)의 집에 거주하며 그를 도와 계략을 짜고 전쟁의 승부를 예지했다. 나중에 석륵이 불도징의 신통을 듣고는 그를 불러 불법이 얼마나 영험한지 물었다. 불도징은 밥그릇에 물을 채워놓고 향을 사르며 기도를 올렸다. 잠시 후 물속에서 청색 연꽃이 피었는데 광채가 눈부셨다. 석륵은 당장 신복하며 살인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고 다투어 불법을 신봉했다.
석륵이 갈피(葛陂)로부터 하북(河北)에 돌아와 방두(坊頭)를 지날 때 한 방두 사람이 야간에 숙소에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불도징이 이를 미리 알고는 사람을 보내 석륵에게 알렸다. 밤이 되자 과연 한 도적이 군중(軍中)에 들어왔다. 석륵은 미리 준비를 했기 때문에 침입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심 많은 석륵은 계속 불도징이 얼마나 신통한지 시험하려 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몸에 갑옷을 걸치고 칼을 찬 채 장막 안에 앉아 있었다. 동시에 사람을 시켜 불도징에게 “밤에 대장군께서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다”고 전하게 했다. 그런데 사자가 불도징이 있는 곳에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불도징이 큰 소리로 물었다. “평소 도적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밤에 그렇게 삼엄한가?” 그래서 석륵은 더욱 그를 더욱 존경하고 신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석륵은 신통을 갖춘 불도징을 매우 염려하여 그를 해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불도징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예지 공능이 있었던 불도징이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불도징은 숙명통 공능을 통해 그가 후회할 것임을 알았고 나중에 다시 와서 석륵을 만났다.
석륵은 330년에 후조(後趙)를 세웠고 그는 더욱 불도징을 존경했다. 이 해에 석총(石蔥)이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 불도징은 은어로 석륵에게 말했다. “올해 파(蔥) 속에 벌레가 있어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파를 먹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석륵은 영을 내려 백성들에게 파를 먹지 말라고 했다. 8월 석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륵은 그제서 크게 깨달았고 매사에 반드시 불도징의 자문을 구한 다음 실행했다. 아울러 그를 “큰 스님”으로 불렀다.
2) 안세고(安世高)
서한(西漢) 때 서역 승려 안세고(安世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생에 안식국(페르시아)의 태자로 있었는데 이미 출가했다고 말했다. 그 생에 안세고가 광주(廣州)로 가는 도중 한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은 그를 보자 칼을 뽑아 그를 죽이려 했다. 안세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생에 내가 너에게 생명을 빚져 일부러 먼 곳에서 와서 빚을 갚으려 한다. 지금 너의 분노는 모두 내 전생에 조성한 것이다.” 말을 마친 후 안세고는 목을 길게 빼어 칼을 받았는데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소년은 바로 그를 죽였다. 사망한 후 안세고는 다시 안식국의 태자로 태어났고 다시 출가했다. 그는 전생에 자기를 죽인 그 소년을 찾아가 그에게 인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3)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천축의 승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는 효무제(孝武帝)가 정권을 세운 초기에 초왕(譙王)이 반란할 것을 예견하여 그더러 반역을 꾀하지 말 것을 권했다. 하지만 초왕은 그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나중에 과연 양산(梁山)에서 크게 패했다. 초왕의 군중에서 핍박을 받던 구나발타라는 신명에 의해 구조되었다.
4) 기역(耆域)
진(晋)나라 때 천축의 승려 기역(耆域)이 낙양에서 스님들에게 설법할 때 때로는 그들의 전생과 금생의 상황을 말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법연(支法淵)은 양(羊)이 변한 것이며 축법흥(竺法興)은 전생에 사람이었다는 등이다. 낙양 궁성을 보고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마치 도리천궁(忉利天宮)과 같다. 하지만 하나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만들었을 뿐이다. 이 궁성을 지은 사람은 도리천에서 왔으며 건설 후 천상으로 돌아갔다. 처마와 기와 아래에 응당 천오백개의 도구가 있을 것이다.” 당시 확실히 이 궁전을 건조한 장인은 처마 기와 아래에 도구를 놓아두었는데 공사가 끝난 후 피해를 입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5) 축법혜(竺法慧)
동진(東晋)때 승려 축법혜(竺法慧)는 일찍이 제자인 법소(法昭)에게 말했다. “너는 과거에 닭 다리를 부러트린 적이 있는데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과연 얼마 안가 법소는 어떤 사람에 의해 던져져 다리가 부러지는 불구가 되었다.
나중에 정서(征西)장군 유치공(庾稚恭)이 양양을 지키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평소 불법을 신봉하지 않아 축법혜가 신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질투했다. 축법혜는 이를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평소 나의 원수가 왔으니 너희는 부지런히 수련하거라.” 이틀 후 축법혜는 과연 살해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 삼일 째 폭우가 쏟아질 것이다.” 삼일 후 과연 폭우가 왔고 성문에 물이 깊이가 한 장이나 되어 많은 사람이 빠져 죽었다.
6) 아족사(阿足師)
아족사(阿足師)는 당나라 때 승려로 숙명통 공능이 있었다. 섬주(陝州)에 장진(張臻)이라는 한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이 바보여서 늘 수족을 떨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밥양은 매우 많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장진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돈을 썼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고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다.
나중에 그가 아족사를 찾아와 울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족사가 장진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의 원한은 아직 십년이 더 있어야 끝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간절한 정성을 보아 내 지금 없애주리다.” 그래서 장진에게 날을 잡게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어떻게 전생의 원한을 제도하는가 보게 하였다. 동시에 그의 아들을 사찰에 오게 했다. 도량에서 아족사는 서너 명의 힘센 사람을 시켜 장진의 아들을 강물에 빠뜨렸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아족사가 장진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난을 없애 주는 것이오.” 한참이 지난 후 그 아들은 강 아래 십여 보 떨어진 곳에 물 위에 올라왔는데 그의 부모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전생에 원한이 있었는데 오늘 다행히 성자를 만나게 되어 이같이 해탈을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보응이 끝날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말했는데 조금도 바보가 아니었다. 잠시 후 그는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7) 혜달(慧達)
혜달은 남북조 시대의 승려이다. 위(魏) 나라 태무제 태연(太延) 원년에 혜달이 일이 있어 서쪽으로 돌아가는데 양주(凉州) 번화군(番禾郡) 동북방에 있는 어곡산(御谷山)을 지날 때 멀리 절을 하며 예를 올렸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 연유를 묻자 혜달이 대답했다. “이 절벽에는 어떤 상(像)이 나오게 되어 있소. 만약 형상이 완전무결하면 백성이 안락할 것이고 좀 결점이 있으면 사회가 혼란할 것이며 백성들이 빈곤할 것이오.” 태연 87년에서 정광(正光) 초년의 어느 날 갑자기 큰 바람이 불더니 천둥소리가 울렸고 산 바위가 갈라지며 높이가 8장이나 되는 석상이 나타났다. 형상은 단정했으나 머리가 없었다. 석공이 다른 머리를 조각하여 올렸으나 떨어져 내렸다. 혜달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8) 승안(僧安)
석승안(釋僧安)은 어디 출신인지 모른다. 제(齊)나라 문선왕(文宣王) 때 왕옥산(王屋山)에서 수련했는데 제자가 2천여 명 있었다. 열반경을 강의하기 시작할 때 까투리 한 마리가 옆에 앉아 주의 깊게 설법을 듣고 있었다. 스님이 밥을 먹을 때면 그것은 밖에 나가 먹이를 쪼아 먹었고 다른 시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법을 들으러 왔다. 기이한 것은 3권을 아직 다 듣기도 전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기괴하게 생각했다. 승안이 말했다. “그 꿩은 이미 사람으로 전생했으니 기이할 것이 없다.”
무평 4년 승안은 도제(徒弟)들을 데리고 월주(越州)로 갔는데 홀연히 말했다. “그 꿩이 마땅히 이곳에 전생 했어야 한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 자치(雌雉 까투리라는 의미)라고 부르니 한 여자가 나왔는데 마치 그를 알아보는 듯이 예를 올리고 매우 기뻐했다. 아이의 부모는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승안을 집안에 들어오게 했다. 승안이 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을 무슨 까닭에 자치라고 지었습니까?” “처음 태어났을 때 꿩 털 같은 것이 나 있었고 여자라서 자치라고 불렀습니다.” 승안은 대소하며 그들에게 전생의 인연을 말해주었다. 여자가 이것을 안 후 눈물을 흘리며 출가를 청했다. 부모는 흔쾌히 동의했고 승안은 다시 열반경을 해석해 주었다. 여자는 깨달음이 매우 빨랐으나 후 3권에 대해서는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했다.
3. 감응 공능
1) 안세고(安世高)
서한 시대 서역의 승려 안세고는 위로는 천문지리, 아래로는 의방과 기이한 술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했는데 심지어 짐승의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한번은 안세고가 길을 가는데 제비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동반자에게 말했다. “제비가 그러는데 앞에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러온다고 합니다.” 잠시 후 과연 어떤 사람이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
2) 대병(代病)
석대병(釋代病)은 천태(天台) 사람이며 본래 성은 진(陳)씨이다. 그는 근면히 수행하여 큰 원을 세웠는데 자신의 한 몸으로 천하 중생에게 보답하며 일체 중생의 병을 대신하겠노다고 했다. 그에게는 신기한 일이 많이 있었다. 한번은 어느 나쁜 사람이 대병을 해치려고 돈을 써서 어느 가난한 집 여자를 고용했다. 여자가 그에게 독주를 보내며 말했다. “이것은 첩이 집에서 빚은 미주이온데 스님께 따라드려 복을 받고자 하니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중생의 원을 거역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병은 이미 여자가 온 뜻을 알고 말했다. “당신도 부처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여자는 놀랍고 두려워 후회하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대병은 의연하게 손에 술잔을 들고 천천히 독주를 마셨다. 잠시 후 독주의 기운이 그의 양다리를 따라 뿜어져 나오는데 발아래의 피부가 모두 갈라져 옆에서 보는 사람이 놀라서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4. 다른 신통
1) 분신에 능통했던 기역(耆域)과 보지(寶志)
낙양에 병란(兵亂)이 발생하자 기역은 벼슬을 사직하고 천축으로 돌아갔다. 낙양의 수백 집에서 각자 기역을 정오 식사에 청했는데 기역은 모두 가겠다고 답을 했다. 다음날 5백 집에서 모두 기역이 있었으며 모든들 기역이 자기 집에 왔다고 여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역이 분신하여 강림한 것이다.
보지(寶志)는 남북조 시대의 승려이다. 제나라 건원(建元) 때 사람들은 보지의 이상한 행적을 알았다. 그는 늘 며칠 동안 먹지 않아도 주린 표가 나지 않았으며 때로는 부시(賦詩)를 이용해 예언을 했다. 예언은 처음에는 해석하기 매우 힘들었으나 나중에는 영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강동의 사대부나 서민들이 모두 그를 추앙했다. 제무제(齊武帝)가 그가 요언으로 민중을 속인다고 여겨 감옥에 잡아넣었다. 다음날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다시 감옥을 조사해보니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蹬木杯过河的杯渡
2) 나무 잔을 타고 강을 건넌 배도(杯渡)
그의 원래 이름은 모른다. 그는 늘 목배(木杯-나무잔)를 타고 물을 건넜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했다. 기주(冀州)에 있었을 때 배도는 어느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집에 금불상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배도가 삼년 전에 그 이웃집에 맡겨놓은 것을 편취 당한 것이다. 배도가 그것을 훔쳐서 떠나갔다. 주인이 알고 말을 타고 쫒았으나 아무리 채찍을 때려도 바로 앞에 천천히 걸어가는 배도를 따라 잡지 못했다. 강변에 도착하자 배도는 등에서 갈대로 만든 그릇을 내려놓고 그 속에서 나무잔을 하나 꺼내더니 물에 띄우고 연후에 그것을 타고 표연히 강을 건넜다. 대중들은 대경실색했다.
3) 닭과 오리를 토한 향도리(香闍梨)
아무도 그의 내력을 모른다. 그는 익주(益州) 청성산(靑城山) 산사에서 수행했다. 당시 절의 승려들은 매년 3월 3일이 되면 반드시 산 위로 놀러 나갔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놀았다. 향도리는 늘 그들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고 권고했으나 승려들이 듣지 않았다. 한번은 또 3월 3일 유람하는 날이 되었다. 향도리는 사람을 시켜 큰 구덩이를 파게 하고는 말했다. “단월(檀越) 등은 아직 향기로운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오늘 한번 반드시 먹어봐야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투어 그에게 술과 안주를 바쳤다. 누구든지 술을 권하고 안주를 보내면 그는 거절하지 않아 마치 골짜기에 술과 음식을 붓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도리는 말했다. “내가 취하고 배부르니 구덩이로 좀 부축해 주시오.” 구덩이 주변에 이르자 도리가 크게 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닭고기를 토하자 즉시 날면서 울었고 양고기는 입에서 나오자 즉시 달려갔다. 술과 고기를 토해냈을 때 구덩이는 거의 가득 차 물고기, 거위, 오리 등이 뒤엉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우 놀라 이때부터는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산위의 승려들은 술과 고기를 영원히 끊었다. 이것은 향도리가 덕으로 감화한 공이다.
4) 갈대 하나로 강을 건넌 달마(達摩)
그는 신령하고 지혜가 있고 시원스러우며 오성이 매우 좋았으며 대승불교에 전념했다. 달마는 양무제(梁武帝) 보통(普通) 초년 광주(廣州)에 왔는데 무제가 사신을 파견해 그를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맞이하게 했다. 무제는 달마가 말한 불법의 현기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달마는 양나라를 떠나는데 갈대 가지를 꺾어 강을 건너 북위(北魏)의 국경에 도착했다. 그가 낙양에 도착하여 숭산 소림사에서 수행할 때 9년동안 면벽 좌선을 했다. 공을 이룬 후 선화하였으며 웅이산(熊耳山)에 장례 지냈다.
5) 죽은 후 다시 살아난 도영(道英)
그는 어렸을 때 숙부를 따라 출가해 병주(幷州)에서 의거(依炬)법사에게 도를 배웠다. 나중에 선정에 들었을 때 기적이 나타났다.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일찍이 속인과 땅을 다툰 적이 있는데 싸우다가 숨을 쉬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나는 죽습니다” 하고 넘어져 뻣뻣해졌다. 속인은 이것이 사기라고 생각하여 침으로 그를 찔렀다. 하지만 아무리 깊이 찔러도 도영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었고 기가 끊기고 얼굴색이 변했다.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시 살아나라고 하면서 다시는 그와 땅문제로 다투지 말라고 했다. 도영이 이 말을 따라 일어나 앉았으며 이전처럼 담소했다.
6) 임의로 형체를 바꿀 수 있었던 승가(僧伽)
승가는 서역인으로 속성은 하(何)씨이다. 당나라 용삭(龍朔 661년—664년) 초기에 중원에 왔다.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서 수행했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제자 혜엄(慧儼)을 데리고 사주(泗洲) 임회현에 도착했을 때 한 뙈기의 땅을 시주받아 절을 지었다. 그 아래에서 뜻밖에 “고향적사(古香積寺)” 라는 명문과 한 존의 금불상을 발굴했는데 그 위에는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그래서 다투어 재물을 희사했다.
승가는 일찍이 하척(賀跋)씨의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이다. 그가 잠을 잘 때 갑자기 몸이 커지더니 침상보다 3척이나 커져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나중에 11면의 관음 모양이 나타났다. 하척의 집에서는 온 가족이 경하했으며 불법을 더욱 더 믿어 집을 버리고 절을 지었다.
7) 마를 항복시킨 석불공(釋不空)
그는 본래 북 천축 바라문족 출신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사처를 유람했다. 불공(不空)이 15세 때 금강지삼장(金剛智三藏)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으로 범문(고대 인도어)으로 된 경론을 공부했다. 그것에 정통하자 동료인 사광(舍光), 혜변(慧辨) 등 21인과 함께 수나라 상인의 선박을 타고 남해를 지나 중국 유람을 떠났다. 배가 하릉국 경계에 도착했을 때 폭풍을 만났다. 상인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앞다퉈 본국의 주문을 외웠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하늘에 빌며 보우해주길 애원했는데 혜변 등도 통곡하여 마지않았다.
이때 불공이 말했다. “내게 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그가 뱃머리에 서서 오른 손으로 오고보리심저(五股菩提心杵)를 들고 왼손에 “반야불모경”을 들고 “대수구(大随求)”를 염송했다. 그러자 즉시 풍랑이 조용해졌다. 얼마 안 있어 또 거대한 고래가 물위에 나타나 파도를 산같이 일으켰는데 방금 전의 상황보다 더 위험했다. 상인들의 청에 따라 불공은 재차 법을 시행했다. 불공은 혜변 등에게 “사갈용왕경”을 읽게 하자 고래는 곧 사라졌다.
위에서 말한 일부 승려들의 공능 외에도 중국 역사에는 유사한 공능과 다른 신통을 가진 승려들이 아주 많다. 불가(佛家)거나 도가(道家)거나 진정한 수련인은 수련 과정 중에 모두 어느 정도 공능이 출현함을 알 수 있다.
“공능은 다만 수련과정의 부산물일 뿐, 그것은 층차를 대표하지 않고 한 사람의 층차의 높이, 공력의 크기를 대표하지 않는다”(『전법륜』)
이것은 무슨 미신이 아니며 수련자가 수련하는 과정 중에서 점차 우주의 특성에 동화되면 그를 제약하는 사람 이 층 공간의 것들이 점점 감소하기에 수련인은 자연히 속인을 초월한 일부 공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동서고금에 모든 법문이 다 이와 같았다.
발표시간 : 2007년 11월 26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1/26/440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