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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파를 창시한 장삼풍

작자: 나진(羅眞)

【정견망 2009년 2월 25일】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장삼풍(張三豊)이란 이름의 “살아 잇는 신선”이 있었는데 도호는 “현현자(玄玄子)”라 했다. 그는 위로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알았으며 사람됨이 소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말년에는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기괴한 행동을 했는데 확실히 보기 드문 기인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장삼풍은 요동(遼東) 의주(懿州)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이 있다. 그의 모친이 그를 낳던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신선이 선학(仙鶴) 한 마리를 불러 지붕에 머물며 길게 세 번 울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깨어났고 곧 장삼풍을 낳았다.

장삼풍은 5살 때 기이한 병을 얻었는데 두 눈이 점점 실명되었다. 이때 어느 도인(道人)이 그의 생김이 비범한 것을 보고는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선풍도골이며 다만 눈에 마장(魔障)을 만났을 뿐이오. 빈도에게 제자로 준다면 눈의 마장을 벗어나게 하여 시력을 되찾은 후 돌려보내겠소.” 그래서 부모는 허락했다.

이때부터 장삼풍은 어린 도사가 되어 도장을 따르며 도관에 살았다. 반년 후 그의 눈은 과연 회복되었다. 사부는 그에게 도가의 경전을 가르쳤는데 그의 타고난 자질이 높아 한번 보면 다 외울 수 있었다. 7년이 지나자 장삼풍은 부모 곁으로 돌아갔다.

성인이 된 후 그 역시 과거에 참하개 공명을 구하려 했다. 나중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을 지키느라 집에 있었다. 어느 날 구(丘)씨 성을 가진 도장이 그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현묘한 이치를 담론했는데 매우 의기투합했다. 긴 토론을 통해 장삼풍의 사상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부귀는 똥과 같고 시간은 번개처럼 빠르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도를 구하는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공명과 권세를 팽개치고 사해를 떠돌며 훌륭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도를 구한 지 수십 년이 지나 70이 다 된 장삼풍이 종남산(終南山)에 스승을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진단(陳摶)의 도를 이어받은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났다. 화룡진인은 먼저 그에게 기본적인 공을 가르친 다음 선단(仙丹)의 비결(秘訣)을 주었다. 장삼풍은 도의 묘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개국된 초기에 장삼풍은 무당산(武當山)에 와서 제자들과 초막을 짓고 수련을 시작했다. 9년 후 장삼풍은 마침내 득도했다. 이때 그는 좀 미친 듯했으며 옷은 다 헤져 사람들은 그에게 더럽다는 뜻의 “납탑(邋遢)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늘 바위 사이로 다녔는데 그곳 백성들에게 늘 “무당산은 장차 반드시 천하 명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삼품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황실에서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명 태조(太祖) 주원장은 그를 흠모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자를 보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명 성조(成祖) 주체가 즉위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장삼풍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매우 간절한 태도로 장삼풍에게 산을 내려와 한번 만나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장삼풍은 시종 나타나지 않았다.

속인은 명리를 추구하기에 황제의 부름을 받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장삼풍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전혀 황제를 만날 생각이 없었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법이 있었다. 그는 부귀를 구하거나 공명을 원치 않았으며 그저 신선처럼 자유롭게 거닐기를 원할 뿐이었다.

명 성조는 비록 장삼풍에게 체면을 잃었지만 조금도 허물하는 뜻이 없었고 오히려 “신선의 도는 오로지 성의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성의를 표시할 것인가?

영락 10년(서기 1412년)부터 명 성조는 공부(工部)시랑을 파견해 공인(工人) 십만 명을 동원해 무당산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도관(道觀)을 지었다. 12년 동안 300곳에 모두 33개의 광대한 건축물을 지었는데 8궁(宮), 2관(觀), 36암당(庵堂), 72 암묘(庵廟), 12사(祠), 12정(亭), 39교(橋) 등이었다.

호북 균현(均縣) 현성(縣城)에서부터 무당산 최고봉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지는 장장 70 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건축물들은 총 2만여 칸의 건물에 면적이 160만 평방미터가 넘었다. 당시 사람은 “(이런 거대한 건축은) 진시황과 한무제 이래 없었던 일이다!”라며 찬탄했다. 건물이 준공된 후 주체는 태화(太和)태악산(太嶽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또 21명의 6품 관원을 파견해 각 사찰의 업무를 주재하게 했다.

장삼풍이 만년에 무당산이 천하의 명물이 될 것을 예언했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장삼풍은 만년에 무당산에 들어가 수도했으며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고 다만 떠돌아다니는 도인의 신분으로 제자를 받아 도를 전했을 뿐이었다. 명 성조 주체의 선양을 거친 후 지금은 무당산의 모든 도사들이 장삼풍을 무당파의 조사로 떠받들고 있다.

장삼풍은 내단(內丹) 수련법에 근거해 무당의 내가권법(內家拳法)을 창안했는데 이는 무당파의 최대 특색이 되었다.

이때부터 무당산은 무림(武林)의 성지가 되어 불교의 숭산 소림사와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무술계에 “북종소림 남숭무당(北宗少林,南崇武當)”의 설이 있게 되었다.

(《명사(明史)》에 근거)

발표시간:2009년 2월 25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9/2/25/580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