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하늘의 뜻에 따라 ‘의(義)’를 풀어내다
1. 하늘의 뜻에 따라 헌제를 맞이해 사직을 보호하다
일찍이 초평 3년(192년) 말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있던 진류 사람 모개(毛玠)가 조조에게 한 헌제를 맞이할 것을 진언한 적이 있다. “무릇 전쟁이란 정의를 갖고 있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며 재력이 있어야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천자를 받들고 불복하는 신하들을 호령하며 농사에 힘쓰고 군수품을 비축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즉시 한 헌제를 모시는 일에 착수했다. 이에 종사 왕필을 하내태수 장양(張楊)에게 보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빌리게 했다. 장양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때 장양에게 억류되어 있던 동소(董昭)가 장양을 설득하며 말했다.
“원소와 조조가 지금은 한집처럼 보이지만 그런 형세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가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사실 천하의 영웅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그와 교분을 맺어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길을 열어주고 천자를 뵙게 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그를 추천해야 합니다. 만약 일이 잘 성사되면 조조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될 것입니다.”
조조가 천하의 영웅임을 알고 장양에게 조조와 인연을 맺도록 격려한 것이다. 장양은 이에 사자가 장안에 가도록 허락하는 한편 조조를 추천하는 표문을 올렸다. 동소는 또 조조의 이름으로 장안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등에게 편지를 보내고 예물을 보냈다.
이각과 곽사는 조조가 파견한 사신을 보고는 조조가 사신을 보낸 뜻이 진심이 아니라고 여겨 그를 억류하려 했다. 이때 황문시랑(黃門侍郎) 종요(鍾繇)가 나서 “지금 영웅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각기 천자의 명을 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직 연주의 조조만이 황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 충성심을 거스르는 것은 다가오는 희망에 부합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이각과 곽사를 설득했다. 이각과 곽사는 종요의 설득에 따라 조조가 보낸 사자를 후하게 대했다.
흥평 3년(196년) 봄 조조는 허도(許都)에서 다시 한 번 천자를 영접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산동(山東)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韓暹)과 양봉(楊奉)이 공을 내세우며 건방지게 굴지만 아직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순욱(荀彧)은 상서를 올려 천자를 영접하는 것은 인심에 순응하는 대순(大順)이며 대략(大略)이고 대덕(大德)이니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설득했다.
“천자께서 난리를 피해 몽진하신 이래 장군(조조)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산동의 전란으로 미처 마중 나갈 여가가 없었습니다. 지금 어가가 돌아오더라도 낙양은 풀이 우거져 있으니 의로운 사람은 근본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간절하고 백성들은 옛날을 그리는 슬픔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이 기회를 이용해 주상(主上)을 맞이해 사람들의 바람을 따르는 것은 대순(大順)이요, 지극한 공으로 천하를 설복하는 것은 대략(大略)이며, 대의를 널리 일으켜 천하의 영재를 부르는 것은 대덕(大德)입니다. 사방에 비록 역신들이 있다 해도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섬과 양봉이 어찌 근심거리가 되겠습니까? 만약 제때 결정하지 못하면 호걸들이 욕심을 일으킬 것이며 후에 다시 고려하고자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는 즉시 양무중랑장(揚武中郎將) 조홍(曹洪)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맞이하게 했다. 그런데 동승(董承) 등이 험한 지형에 기대 저지하려 하자 조홍도 나아가 천자를 맞이할 수 없었다.
여남(汝南), 영천(穎川)의 황건군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이 각기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원술에 호응하다 나중에 손견(孫堅)에게 귀부했다. 2월 조조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 및 나머지 무리가 모두 항복했다. 천자는 조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에 제수했다. 6월 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옮기고 비정후(費亭侯)에 봉했다. 조조는 모두 3번 사양한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다.
7월 양봉, 한섬, 동승이 헌제를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와 어가가 낙양에 이르렀다. 양봉은 거기장군(車騎將軍), 한섬은 대장군(大將軍) 사예교위(司隸校尉)가 되었다. 이때 낙양의 궁궐은 동탁에 의해 전부 파괴되어 곳곳이 황폐했다. 백관들도 거처할 곳이 없어 가시덤불을 덮고 담벼락에 기대 지내야 했다. 식량도 부족해서 각 지역에 사람을 보내 징발하게 했으나 십분의 일도 응하지 않았다. 굶주림에 시달린 관리들도 상서랑(尚書郎) 이하는 직접 야생 벼를 거두어 허기를 채워야 했고 심지어 굶어 죽거나 병사들에게 약탈당하고 피살되는 사람도 있었다.
양봉은 도성 밖에 주둔했고 한섬은 스스로 공이 높다고 여겨 멋대로 전횡을 부렸다. 동승이 이를 걱정해 몰래 조조를 불러들였다.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낙양에 들어가 수도를 포위하자 한섬이 양봉에게 달아났다. 조조가 헌제를 알현하자 천자는 조조에게 임시로 절월(節鉞)을 하사해 사예교위와 녹상서사(錄尚書事)를 겸하게 했다. 조조는 상서 풍석(馮碩) 등 세 사람의 죄를 물어 주살해 죄를 처벌하고 위장군(衛將軍) 동승 등 13인을 열후에 봉해 공적에 대한 상을 내렸다. 또 헌제를 호송하다 이각과의 전투에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성교위(射聲校) 저준(沮俊)을 홍농태수(弘農太守)에 추증했다. 이렇게 상과 벌이 분명해지자 충의(忠義)가 뚜렷이 드러났다.
낙양이 황폐해졌기 때문에 동소(董昭) 등이 허도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동소는 또 조조가 의병을 일으켜 폭도들을 주살하고 천자를 영접해 왕실을 보좌한 것은 춘추오패와 같은 공적이라며 찬양했다.
8월 조조가 어가를 환원(轘轅)을 거쳐 허도(許都, 지금의 하남성 허창)로 옮겨 천도했다. 헌제가 직접 조조 군영을 찾아와 대장군으로 삼고 무평후(武平侯, 역주: 현후(縣侯)에 해당하며 원래 작위인 비정후보다 등급이 높다)에 봉했다. 천자가 장안으로 떠난 이후 조정은 날로 혼란해졌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에 이르렀고 지방도 쓸쓸하고 황량한 상황이었다. 이곳에 이르러 상황이 변했고 종묘와 사직제도도 처음 시작되었다. 조조는 군정(軍政)의 대권을 장악해 조정을 총괄했으며 연호를 바꿔 흥평 3년을 건안(建安) 원년(196년)으로 고쳤다. 천자는 조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에 임명했고 나중에 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조조는 예주(豫州) 땅을 전부 거두어 천자를 받들고 제후들을 호령했으며(奉天子以令諸侯) 관중의 여러 장수들이 신속히 복종해왔다. 이때 순욱의 추천을 통해 조조는 새로 두 명의 책사를 얻는다. 바로 촉군태수 순유(荀攸)와 영천의 곽가(郭嘉)가 그들이다. 순유는 자가 공달(公達)이며 순욱의 조카이며 당시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있었다.
조조는 순유를 상서(尙書)로 불러 대화를 나눠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공달은 비상한 사람이다. 내가 그와 함께 일을 계획한다면 천하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군사(軍師)로 삼았다. 조조가 곽가를 만나 천하의 일을 토론해본 후 기뻐하면서 “내게 대업을 이루게 해줄 사람은 분명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곽가 역시 기뻐하면서 “진짜 나의 주인이다!”라고 했다. 조조는 곽가를 사공좨주(司空祭酒)로 천거했다.
중평(中平, 영제의 연호) 이후 천하가 혼란해지면서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여러 곳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식량이 부족해졌고 1년 이상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이에 굶주리면 강탈하고 배부르면 나머지를 버리니 지리멸렬해져서 적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우림감(羽林監) 조저(棗祗)가 둔전(屯田)을 설치해 병력을 강화하고 식량을 충분히 할 것을 제안하자 조조가 이를 따랐다.
그러면서 “무릇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강한 군사와 식량에 달려 있다. 진(秦)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중시해 천하를 통일했고 한 무제(武帝)는 둔전으로 서역을 정벌했으니 이는 선대의 좋은 모범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조저를 둔전도위(屯田都尉)로 삼고 기도위(騎都尉) 임준(任峻)을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에 임명했다. 허도에서 사람을 모집해 둔전을 하니 백만 곡(斛 10말)의 곡식을 거두어들였다. 이에 지역을 확대해 각 고을마다 담당 관원을 두고 식량을 축적하니 식량창고가 그득해졌다. 나중에 조조가 사방을 정벌할 때 식량을 운송하는 수고를 덜어 숱한 역도들을 소탕하고 평정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나라를 풍요롭게 한 둔전제도는 조저가 시작했고 임준이 완성했다.
조조는 《해로행(薤露行)》이란 시에서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묘사했다.
해로행(薤露行)》
한나라 22대에 이르러임용된 신하들 실로 어리석구나원숭이꼴에 모자 쓰고 띠를 매고는우둔한 주제에 큰일 꾀했네우물쭈물 망설이다가임금의 납치 초래했네흰 무지개 해를 꿰더니자신이 먼저 재앙을 당했구나도적이 나라의 권력을 잡더니임금을 죽이고 도성을 파괴했네제왕의 기반 뒤흔들고종묘를 불태웠네서쪽으로 도읍 옮기니백성들 울며 하염없이 걸어가누나저기 낙양성 바라보니은나라 미자처럼 슬프고 애달프구나
惟漢廿二世(유한입이세)所任誠不良(소임성불량)沐猴而冠帶(목후이관대)知小而謀强(지소이모강)猶豫不敢斷(유예불감단)因狩執君王(인수집군왕)白虹爲貫日(백홍위관일)己亦先受殃(기역선수앙)賊臣持國柄(적신지국병)殺主滅宇京(살주멸우경)蕩覆帝基業(탕복제기업)宗廟以燔喪(종묘이번상)播越西遷移(파월서천이)號泣而且行(호읍이차행)瞻彼洛城郭(첨피낙성곽)微子爲哀傷(미자위애상)
이 시는 “한나라 말기의 실제 기록으로 진실한 역사시다”(종성(鍾惺) 《고시귀(古詩歸)》)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는 하진이 환관을 죽이려던 일이 실패하고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난리를 일으킨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빈번한 전란과 전쟁이 백성들에게 가져다준 고난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조조는 헌제를 허도로 옮겨 천자를 받들고 제후를 호령하며 불충한 신하들을 토벌해 대업을 이뤘다. 조조가 연주(兗州)와 예주(豫州)를 차지하자 사방에서 군웅이 할거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북쪽에서는 원소가 기주(冀州), 청주(靑州), 병주(幷州) 3주를 차지했고 공손찬(公孫瓚)은 유주(幽州), 장양(張楊)이 하내를 차지했다. 동쪽으로는 여포가 서주(徐州), 원술이 회남(淮南)을 차지했고 남쪽으로는 유표(劉表)가 형주(荊州), 장수(張繡)가 남양(南陽),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을 차지했다. 서쪽으로는 한수(韓遂)와 마초(馬超)가 양주(涼州)를 차지하고 장로(張魯)가 한중(漢中), 유장(劉璋)이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는 전란으로 인해 인의(仁義)와 예양(禮讓)의 풍속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며 교육의 부흥에 힘썼다. “천하가 혼란에 휩싸인 15년에 어린 자제들이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나는 몹시 안타깝다. 이제부터 군국(郡國)에 명령해 문학을 닦는데 힘쓰도록 하라. 500호가 넘는 현에는 교관(校官)을 설치하고 현에서 뛰어난 인재를 뽑아 가르치게 하라. 이렇게 하면 선왕의 도가 끊어지지 않아 천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조조는 또 호족을 누르고 법도를 명확히 했으며 상벌을 분명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이 적은 것보다는 불평등한 것을 근심하며 가난보다는 불안한 것을 근심한다. 원씨(袁氏)는 호족이나 친족들이 전횡을 일삼고 토지를 독점하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두었다.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대신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호족들은 재산을 자랑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가재도구를 내다 팔아도 관아에 내는 세금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심배(審配) 일족은 죄수들을 빼돌리고 내야 할 세금을 힘없는 백성들에게 전가했다. 힘없는 백성들이 우리에게 기대고 싶어도 군사력이 강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백성들에게 1무에 4되씩 전조(田租)를 걷고, 가구당 명주 2필과 솜 2근만 징수하게 하라. 이 외에는 마음대로 더 걷을 수 없다. 각 고을 수령들은 확실히 살펴 호족들이 숨기고 조세를 내지 않거나 힘없는 백성들에게 전가하는 일이 없게 하라.”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