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5장 문학의 대가
동한 말년에는 황건적이 일어나고 동탁의 재난으로 각 지방의 주목(州牧)들이 할거해 전쟁의 피해가 빈번히 발생하는 바람에 사회는 전례 없는 동란(動亂)을 겪어야 했다. “세상에 누적된 난리로 풍속이 쇠퇴하고 원망이 생겨나” 백성들은 전란에 죽거나 혹은 고향을 떠나야했다. 문인들도 어쩔 수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다. 때문에 먹고 입는 것조차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라 시(詩)나 부(賦)를 짓는 것은 논할 나위도 없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발전은 있더라도 아주 드물었고 영향력도 아주 제한적이었다.
조조는 건안 말년의 천하난세에 정벌전쟁에서 자신이 겪은 온갖 고생과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또 염량(炎涼)한 세태를 바라보며 문장으로 영웅의 뜻을 표현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속내를 풀어냈는데 분노하고 개탄하면서도 슬프고 처량했다. “저 낙양성을 바라보니 미자처럼 슬프고 애달프구나(瞻彼洛城郭,微子爲哀傷)”[해로(薤露)], “살아남은 백성은 백에 하나니 생각하면 애간장이 끊어지누나(生民百遺一,念之斷人腸)”[호리(蒿里)], “나이 먹는 것이야 서럽지 않다만, 세상을 잘 다스리지 못함이 걱정이구나(不戚年往,憂世不治)”[추호행 2수]
조조는 이렇게 건안 풍골을 창조해 일세의 문풍을 이끌었다.
진조명(陳祚明)은 “맹덕(孟德 조조)이 남긴 여러 문장들은 비록 형식상으로는 의고(擬古 고전을 많이 인용해 예스러운 문장)에 속하지만 모두 자신의 속내를 적은 것이다.” “본래 수식하는 말이 없고 성정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힘이 넘치면서도 슬프고 처량하면서도 유독 초월에 이른다. 격조를 자세히 따져보면 맹덕은 전적으로 한나라의 풍격을 지녔고 조비나 조식은 위나라의 영향이 더 많았다.”(《채숙당시집(采菽堂詩集)》권5)라고 평가했다.
조조의 시가가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특징임은 이미 전인들의 중시를 받았다. 바로 이 때문에 조조의 시는 당시의 사실을 진실하게 기록했고 또 간결하고 명료한 표현수법을 사용하고 글을 꾸미거나 수식하는 의도가 전혀 없이 명쾌하면서도 힘찬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때의 글을 보면 언제나 강개한 것을 좋아했다. 대대로 난리를 겪으면서 풍속이 쇠퇴하고 원망이 쌓인 까닭에 뜻이 깊으면서도 뛰어나다. 그러므로 강개하면서도 굳세다.”(《문심조룡‧시서편(時序篇)》)
조조는 당시 문단의 영수로서 업성에 많은 문인들을 결집시켜 직접 새로운 건안문학의 번영을 개창하고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은 건안문학의 풍격을 다져 건안문학이 중국문학의 역사상 빛나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했으며 장기적인 전란과 사회 혼란이라는 배경 하에서 신전문화(神傳文化)가 전승되고 흥성하게 했다.
조비는 부친인 조조에 대해 “시서문적(詩書文籍)을 좋아해 비록 군영에 있을지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라고 했다. 또 조식은 “정치를 총괄하면서 유림을 두루 만났다. 몸소 아송(雅頌)을 저술하고 금슬(琴瑟)에 얹었다.”고 평가했다.
조조의 저작은 상당히 풍부해서 시부를 제외하고도 《가전(家傳)》1권, 《위주주사(魏主奏事)》10권, 《위무사시식제(魏武四時食制)》, 《위무제집(魏武帝集)》30권, 《위무황제일집(魏武皇帝逸集)》10권, 《위무제집신찬(魏武帝集新撰)》10권, 《위무제집본(魏武帝輯本)》1권, 《위무제집편집본(魏武帝集編輯本)》3권, 《위무제로포문(魏武帝露布文)》9권 등이 있다. 하지만 후대에 대부분 유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산문은 약 150편에 불과하며 대부분 명령이나 가르침이고 그 다음이 표문이다.
조조는 문장에도 뛰어나 서(書), 표(表), 교(教), 령(令) 등은 글은 짧아도 의미가 깊고 기백이 웅장하면서도 감정이 풍부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무릇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일을 이룰 수 있다(夫有其志,必成其事)”(《포여건령(褒呂虔令)》)는 두 구절은 족히 격언으로 삼을 만하며 뜻을 지닌 인재들을 격려한다. 앞서 언급한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은 독특한 특색을 지닌 산문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고 행군하면 뭇 영웅들을 편달할 만하며 문장의 조예로만 말한다 해도 천고에 우뚝 설 수 있다. 심지어 조조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가 ‘문사의 절조(文詞絕調, 보기 드물게 절묘한 문학작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조는 문학뿐만 아니라 서법(書法 서예), 병서(兵書), 경전, 제자백가, 바둑, 약리(藥理 전통의약학) 등에도 정통했고 특히 음악과 건축에 뛰어났다. 진나라의 장화(張華)는 《박물지(博物志)》에서 “한나라 때 서예가로 안평(安平)의 최원(崔瑗)과 그의 아들 식(寔)이 뛰어났고 홍농(弘農)군의 장지(張芝)와 그의 동생 창(昶)이 모두 초서를 잘 썼으며 태조(太祖, 조조)가 그 다음이다. 또 음악에서는 환담(桓譚)과 채옹(蔡邕)이 뛰어났는데 태조는 이들과 더불어 우열을 다툴 만했다.”고 평가했다.
“태조는 군대를 이끈 지 30여 년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낮에는 군사전략을 강구하고 밤에는 유교경전을 읽었으며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부를 지었고 새로 시를 짓고 음악을 입히면 모두 악장(樂章)이 되었다.”
조조는 또 음악곡률(音樂曲律)의 창작과 감상에도 뛰어났다. 조조는 음악 인재를 중시해 채옹, 완우(阮瑀), 예형(禰衡), 두기(杜夔) 등이 모두 조조의 예우를 받았다. 조조는 이들이 아악(雅樂)을 창작하고 음률을 연주하게 했다. 조조는 또 음률(音律)에도 정통해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남겨 후세 음악발전에 기여했다. 또 전란 중에 고대의 아악이 실전되지 않도록 두기를 시켜 악률을 정리해 선대의 옛 음악을 잇고 복원하게 했다.
당시 두기가 아악에 정통했다. 그는 본래 유표(劉表)의 부하로 있었는데 나중에 유표가 사망하면서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따라온 인물이다. 조조는 그를 군모좨주(軍謀祭酒)로 임명하고 동시에 태악(太樂)의 일에 참여하게 했다. 두기는 특히 종률(鍾律 종의 음률)의 식별에 뛰어났고 총명함이 다른 사람을 뛰어넘어 현악기는 물론이고 관악기까지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한편 종을 만드는 종공(鍾工)이었던 시옥(柴玉)은 재능과 지혜가 풍부해 새로운 악기를 많이 제작해 당시 귀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한번은 두기가 시옥을 시켜 동종(銅鐘)을 주조하게 했다. 하지만 완성된 종소리의 맑고 탁함이 음률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에 두기가 여러 차례 고쳐서 다시 만들게 했다. 이것이 싫었던 시옥은 소리의 맑고 탁함에는 원래 일정한 표준이 없다면서 두기의 뜻을 거부했다. 이에 두 사람이 다툼이 생겨 각자 조조에게 사정을 아뢰었다. 조조가 듣고는 완성된 종을 가져와 연주하게 했다. 종소리를 들어본 후 조조는 두기가 음률에 정통함을 알았고 시옥과 그의 아들들에게 벌을 내려 모두 말을 키우게 했다. 《삼국지‧두기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조는 건안문학의 창립과 발전뿐 아니라 서법(書法) 예술의 발전에도 탁월한 공헌을 했다. 조조는 당시 서법에 뛰어난 천하의 영재들을 허도로 불러 모았다. 예를 들면 사의관(師宜官), 양곡(梁鵠), 종요(鍾繇), 한단순(邯鄲淳), 위탄(韋誕) 등이다. 조조는 독첩(讀帖 서예에서 글씨의 모범이 되는 본)을 보고 감상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늘 당시 서법가들과 함께 교류하곤 했다. 조조는 특히 양곡의 글씨를 좋아했고 그의 글씨를 장막이나 벽에 걸어놓고 늘 감상하곤 했다. 이에 “태조가 침식을 잊고 작품을 관상하다 시력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백년 후 왕희지(王羲之)가 서도를 배울 때에도 일찍이 허도를 찾아가 양곡, 종요, 채옹 등의 작품을 얻고 이를 융회관통한 후 마침내 서도의 일대종사가 될 수 있었다.
조조는 당대의 서법가로 불릴 만하다. 역사적으로 조조의 서예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의 서법에 대해 “황금 꽃이 잘게 떨어지듯 영롱하고 좋은 옥이 빛을 발하듯 찬란하며”, “필묵이 웅혼하면서도 절륜한” 아름다움이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서법 평론가들은 한나라 말기 초서(草書)의 5대가로 조조, 최원, 최실, 장지, 장창을 꼽는다.
조조의 묵적(墨跡, 서법 작품)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곤설(袞雪)’뿐이다. 이는 서쪽으로 장로를 토벌하러 가던 도중 석문(石門, 섬서성 포성)에서 황하의 풍광을 보고 조조가 즉흥적으로 쓴 작품인데 황하 중간의 암석 위에 새겨져 있다. ‘곤설’이란 두 글자의 뜻은 황하의 세찬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물보라가 사방으로 날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물이 크고 돌이 많아서 그 모습이 마치 세차게 날리는 눈보라와 같다고 해서 곤설이라 한 것이다. 이 바위는 현재 섬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좌측 끝에 ‘위왕(魏王, 조조)’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다.
맺는 말
위무대제(魏武大帝) 조조는 황성(黃星)의 상서로운 조짐에 응해 진인(眞人)이 속세에 내려온 위인으로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을 다스림에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그가 세운 풍부한 공적과 위대한 업적은 만세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
조조는 또 중국문학의 역사상 황금시대로 불리는 건안문학을 육성해 장기간의 전란과 사회혼란 속에서도 신전문화(神傳文化)가 전승되고 흥성하게 했다. 그가 저술한 《맹덕신서(孟德新書)》, 《손자약해(孫子略解)》 등의 무학 서적과 용병 지략은 역대로 후세 병가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때문에 후인들은 “말로 하는 용병에는 손무만한 이가 없고 실제 용병에서는 한신, 조조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조조는 관민의 음사(淫祀)를 철폐해 저령(低靈)의 난잡한 귀신들을 철저히 제거해 막 생겨나고 있던 도교(道敎)의 발전을 도왔고 위나라는 위아래가 모두 도를 닦는 풍속이 생겨 온 나라가 청렴해졌다. 난세에 도교의 흥성과 발전을 추진해 세인의 도덕과 풍속을 끌어올렸으니 그 공이 막대하다!
위무대제는 공이 높고 덕이 넓었으며 흥성하고 쇠퇴하는 천상(天象)의 뜻에 밝았으니 국정을 총괄해 큰 위업을 이룩했고 한실(漢室) 천하가 수십 년 연장되게 했다. “만약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했을지 모른다.”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처럼 “주상을 받들고 지극한 공(公)을 잡고 홍의(弘義)를 지탱했으며(奉主上、秉至公、扶弘義)”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의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는 의를 힘껏 풀어냈다. 또 제갈량, 주유, 유비 및 손권과 함께 창세주가 부여한 인류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품덕인 ‘의(義)’를 풀어내 후세에 명기누골(銘肌鏤骨, 살갗에 새기고 뼈에 새긴다는 의미로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다는 뜻)할 천고의 전기(傳奇)가 되었다.
주요참고문헌
司馬穰苴,《司馬法》,春秋戰國李昉等編,《太平禦覽》,宋作者不詳,《春秋讖》,漢曹植,《曹子建集》,魏陳壽,《三國志》,晉裴松之注,《三國志》,晉司馬光等編,《資治通鑒》,宋酈道元,《水經注》,北魏劉熙載,《詩概》,清杜佑,《通典》,唐陸機,《吊魏武帝文》,晉作者不詳,《禮記‧樂記》,先秦曹操,《孫子略解》,漢曹操,《讓縣自明本志令》,漢陳壽,《三國志‧魏志》,晉範曄,《後漢書》,南朝潘嶽,《西征賦》,晉房玄齡,《晉書》,唐鍾惺,《古詩歸》,明何去非,《何博士備論》,北宋張說,《鄴都引》,唐陳祚明,《采菽堂詩集》,清劉勰,《文心雕龍》,南北朝方東樹,《昭昧詹言》,清劉熙載,《詩概》,清沈德潛,《古詩源》,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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