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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기억

작가 : 장춘 대법제자

[정견망 2007년 5월 2일]

1. 사부님의 장춘 7기 설법반에 참가하다

1994년 4월 29일, 사부님의 장춘 7기 설법반에 참가하였다. 나는 첫날 이 학습반의 강당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종 사부님이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것을 느꼈다. “우리 수련생들이 이 마당에 앉기만 하면 모두 감수가 있고 사상 속에는 나쁜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많은 수련생은 여기에 앉아서 담배 피울 생각마저도 나지 않으며 아주 상화(祥和)로운 분위기를 느끼는데, 참으로 편안하다. 이것이 바로 정법수련자가 휴대(携帶)한 에너지가 이 마당범위 내에서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전법륜>)

장춘 제 7기 반에서는, 주간반이건 야간반이건 사부님은 모두 수련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사부님은 바쁘고 피곤해도 수련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며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와 남편, 모친, 동생, 두 아들과 또 우리 마을에서 저녁반에 참가한 수련생들이 모두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애석하게도 이렇게 진귀한 사진을 보존하지 못해(악경에 의해 세 번 수색 당함) 매우 가슴 아프다. 사진을 찍을 때 사부님이 나의 신변 가까이 오셨는데 당시 나는 사부님이 휴대한 장을 느껴 매우 편안했고 정신이 났다. 나의 큰 아들, 둘째 아들도 7기반에 참가하였는데 그들 둘은 사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나중에 수련생이 많아 두 반에 수천 명이 되어 사진을 찍기 어렵게 되었다. 주최측에서는 사람이 적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반을 조직하여 모든 수련생들이 빠지지 않도록 하여 모두 사부님과 사진을 찍을 기회를 갖도록 했다.

우리는 늦게 참가할까 염려되어 항상 일찍 도착하여 강당 바깥에서 기다렸다. 한번은 찬합을 들고 따님과 함께 남쪽에서 걸어오시는 사부님을 만났다. 바깥에서 강의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수련생들은 아무도 사부님을 둘러싸지 않았고 사부님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나 존경하는 심정으로 사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부님이 강당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눈빛으로 전송했다. 나는 그 순간 사부님의 나에 대한 일종의 자비롭고 상화로운 감각을 느꼈으며 매우 흥분되었는데 지금도 언어로 그런 심정을 나타낼 방법이 없다.

2. 하얼삔 체육관에서 열린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함

1994년 8월 5일 오전, 우리 일행 열 명은 기차를 타고 하얼삔에 도착했다. 친척이 역으로 우리를 마중 나와 오찬을 준비했는데, 나는 입장권이 없어서 빨리 체육관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오찬을 사절했다. 우리 일부는 버스를 타고 체육관에 가서 파룬궁 전수반 표를 파는 곳으로 가서 표를 사려고 했으나 판매원은 표가 없다고 했다. 나는 매표원에게, 나는 외지에서 왔으며 한 장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고 그녀는 주최측 지도자가 없으니 책임자가 오기를 기다려 상의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당시 매우 급해 표를 못사면 어떻게 들어가나 걱정하면서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곳에서 책임자와 연락되기를 기다리면서 표 한 장만 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어떤 사람이 표를 물렸다. 그녀는 두 장이 있어 내가 한 장을 사게 되어 순조롭게 8월 5일, 두 번째로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산 표는 주빈석이었는데 사존의 강연대와 매우 가까웠다. 사부님은 매일 강의 하실 때 매우 일찍 와서 주빈석에 잠시 앉았다가 비로소 강의를 시작했다. 사부님의 자리는 바로 내 자리의 두 줄 앞이었으며 당시 나는 원래 표를 사지 못했는데 이런 좋은 표를 사게 되어 사부님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부님을 뵙게 되어 매우 기뻤다. 한번은 강의가 끝나고, 나는 매우 빨리 나갔는데 내가 복도에서 앞으로 걷고 있을 때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머리를 돌려보니 사부님이 4~5 미터 떨어져 걷고 계셨다. 당시 나는 사부님이 피곤하시다고 생각되어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

그때 나는 비록 강습반에 두 번이나 참가했지만 무엇이 수련인지 알지 못했으며 그저 파룬궁은 좋으니 연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거리에서 사부를 뵙고도 인사를 하거나 무슨 말을 할 줄 몰랐는데 당시는 머리는 텅 비고 마비되어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3. 장춘보도원 법회상에서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은 국내 장춘에서 대법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셨는데 당시 장소는 상그릴라 호텔이었다. 이번에 사부님은 다섯 시간 동안 설법하셨는데, 사부님이 강의하실 때 수련생들이 보지 못할까봐 일꾼들에게 작은 의자를 높은 의자로 바꾸게 하여 사부님은 의자에 반쯤 서고 반쯤 앉은 자세로 강의를 하시어 수련생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이번에 사부님을 뵐 것이라고 누구도 먼저 알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앉은 이후 회의장의 배치가 매우 아름답고 서있는 일꾼들의 입은 것도 특별히 가지런함을 느꼈는데 기다린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수련생이 사부님이 오셨다고 하였다. 그 후 사부님은 중앙역에서 역장과 동반하여 서쪽문에서 회의장으로 걸어 들어오셨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앉은 옆을 지나가셨다. 당시 울음이 나왔는데 많은 수련생이 울고 있었으며 나도 오랫동안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내가 울 때 내 마음은 수련을 잘하지 못하여 사부님께 죄송했다.

설법 중간에 휴식할 때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같이 간 몇 분의 동수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너무 피곤하시니 사부님이 쉬실 수 있도록 강단 위에 올라가지 말자. 이 다섯 시간의 강의 동안 나는 강단 아래 앉아 정말 정신을 집중하여 눈을 사부님께 고정하고 강의를 들었다. 법회가 끝날 때 전체 수련생은 일어나 장시간 열렬한 박수를 쳤으며, 사부님을 환송한 후 비로소 수련생들은 나갔다.

7월 27일 오전에 중앙역 회의에서 사부님이 법을 전하러 출국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이기 때문에 사부님은 고향 수련생의 제고와 여러분들을 만나보고 설법하시고 또한 인사를 하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역의 직원은 사부님이 미국으로 가셔서 영주민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날 오전에 참가한 수련생들의 심정은 무거웠으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 사부님이 가신지 십 년이 되어 회억하니 우리 고향의 수련생은 다시는 사부님을 볼 수 없고, 늘 나의 수련도 좋지 않다고 느껴 자비롭게 구도하시는 사부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고 문화 수준도 낮아 세 번의 서면 교류회에 투고를 하지 않았다. 제 1차 교류회에서는 수련이 부족하여 쓸 수 없었고 제 2차에서는 문화수준이 낮아 잘 쓰지 못해 투고하지 못했다. 제 3차로 글을 모집한다는 것을 보고 두 차례에 사람 마음의 장애를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이번에는 응당 참여해야겠다고 여겨 몇 년의 수련심득 체험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 산후조리를 도와주게 되어 또 외지로 가게 되었고, 집에 돌아온 후 5일 밖에 투고할 시간이 없었다. 이 5일 간에 어떻게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아 투고할 기회를 놓쳐버려 또 후회만 했다. 나중에 마음을 돌려 생각하니 평상시에도 투고할 수 있었다. 왜 투고하려고 하는가? 중공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한지 8년인데, 대법제자는 단체학습, 연공, 정기적 교류 환경을 잃었는데, 몇 년 이래 사부님이 명혜망의 창구를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명혜가 나의 수련 계발에 매우 큰 영향을 줌을 느꼈다. 수련생들이 무사무아(無私無我)하게 문장을 써 내어 동수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여기에서 명혜편집부 동수들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마지막으로 사부님께 청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제자는 수련을 몇 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성숙하였으니 두 배로 과실을 보충하고 사존의 가르침을 세겨 세 가지 일을 잘 하고 조사정법, 중생구도의 서약을 실행하고 부단히 정진하고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발표시간 : 2007년 5월 2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5/2/436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