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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깨달음: 관념을 전변해 병업 가상의 교란과 박해를 철저히 제거하자

수련깨달음: 관념을 전변해 병업 가상의 교란과 박해를 철저히 제거하자

작자: 무사(無思)

[정견망] 근래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병업(病業) 가상(假相)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특히 전면에 나선 수련생과 협조인 중에서 그렇다. 심지어 일부는 구세력(舊勢力)에 끌려가 신체마저 빼앗겼는데 이것은 중생구도에 엄중한 부면 작용을 일으켰다. 진상을 잘 아는 일부 사람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정법노정의 추진을 교란하며 파괴하고 있다. 근래 이런 상황이 우리 지역에서도 연속 몇 차례 나타나 우리 지역에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어느 정도 손실을 가져 왔다. 이런 현상을 마주할 때 수련생들은 흔히 어쩔 수 없어하는데, 정념도 발해보고 선해(善解)도 해보고 또 안으로 찾아도 보지만 작용을 일으키기 못해 마치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한 명 또 한 명의 수련생이 구세력에게 끌려가 사람 몸을 잃는 것을 보면서, 특히 정진하던 그런 수련생이 인신(人身)을 잃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뼈저린 반성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교류를 했다.

정법노정이 오늘에 이르러, 사악한 생명과 요소가 이미 매우 적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아직도 빈번하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우선 이 역시 구세력이 안배한 일종의 박해 형식이며, 더욱이 정법노정이 후기에 이르러 사악의 힘이 이미 보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박해는 사악이 악당(惡黨)을 이용해 직접 박해하는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 은폐되어 있고 미혹성이 강하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청성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내심으로부터 철저하게 이런 형식을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이 문제를 인식함에, 분명 보편적인 부족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아주 적은 사악이 틈을 탄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몇가지 인식을 여러분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이 모두 법에서 인식하고 법에서 제고하며 철저하게 병업 가상의 교란과 박해를 제거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병업관인가 아니면 심성관인가?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 병업” 경문 중에서 명확하게 이야기 하셨다.
“出世間法(추쓰젠파)수련은 바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나한체 수련이므로 병 업이 없다. 그러나 世間法(쓰젠파) 외의 수련에서 원만하지 못하여 아직도 고층차에로 수련해야 한다면 그는 또 고생이 있고 난이 있으며, 층차를 제고하기 위하여 고비를 넘기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에서의 씬씽(心性)적인 모순과 집착심을 더 제거하는 것이지 신체의 병업은 없다.”

여기에서 사부님께서는 出世間法(추쓰젠파) 수련은 병업이 없다고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셨다. 병업이 없는 이상 어디에 병업관이 있을 수 있는가? 박해 이후 사부님께서는 모든 대법제자들을 모두 제 위치로 밀어 올려주셨다. 대법제자들은 모두 매우 높은 층차에서 온 것으로 사명을 지니고 온 왕(王), 주(主)들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도달한 대법제자들이 아직도 世間法(쓰젠파)를 떠나지 못했을 수 있는가? 나중에 법을 얻은 수련생이라고 할지라도 정법 수련 중 정진하기만 한다면 당연히 모두 아주 쉽게 出世間法(추쓰젠파) 수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정한 대법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 12년 동안 우리는 진정하게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았는가, 청성하게 우리들에게는 근본 적으로 병업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였는가, “제 위치에 도달하였다”의 내포를 사고해 보았는가, 정말 탐구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우리 절대 대다수 수련생들은 부동한 층차, 부동한 과위 중에서 수련하므로 기본적으로 世間法(쓰젠파)를 벗어나지 못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매우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병업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병업관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병업 가상이 올 때, 그 표현이 얼마나 흉맹하든지 그것은 사실 병업관이 아니라 우리더러 진일보로 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정법수련의 대법제자로 간주하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며, 구세력이 만들어 낸 가상을 간파할 수 있는가 보는 것이다. 사람과 신(神)은 일념의 차이이며, 좋고 나쁨도 일념에 달렸다. 당신이 이것은 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신사신법(信師信法)하며, 정념정행(正念正行) 한다면 매우 빨리 지나갈 수 있는 것으로 심지어 한순간에 지나갈 수 있다. 이 방면의 예는 매우 많은데, 많은 수련생들이 자신의 확고한 정념으로 이 점을 실증하였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사납게 닥친 병업 가상의 앞에서 어떤 수련생은 마음이 움직인다. “나의 심장병이 또 발작한 것이 아닌가? 나의 당뇨병이 또 엄중해 진 것이 아닌가?” 이것이 아닌가? 저것이 아닌가 하면서 그 병을 떠나지 못한다! 감당하는 것도 좋고, 선해(善解)해도 좋고, 발정념 하여 제거하는 것도 좋으나 오직 당신이 그것을 병업으로 간주한다면 곧 구세력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수련생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그 수련생이 병업관을 뛰어넘게 가지(加持)해야 하며, 릴레이 발정념으로 병마의 교란 박해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결국 가고 말았다. 그는 정말 병마(病魔)에게 끌려간 것인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노병사(老病死)는 삼계 내의 산물인데, 얼마나 큰 마의 힘이 있겠는가? 대법제자를 끌어갈 수 있단 말인가? 대법제자를 끌고 간 것은 구세력이지만 관건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에서 말씀하셨다.

“발정념은 물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저애하는 사악을 청리하는 것인데, 사실 사악은 이미 그리 많지 않으며, 사악을 청리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이 발정념 하는데 작용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 어떤 사람들이 발정념을 함에 내보내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 앉아서 손은 입장하고 있지만 사상은 오히려 정념이 아니다: 금년은 왜 이렇게 하는가? 나는 작년에 표를 아주 잘 팔았는데, 아, 왜 나에게 여기에서 발정념 하라고 하고 표를 팔라고 하지 않는가? 왜 기어코 주류사회를 해야 하는가? 이 표가 이렇게 비싼데, 사람들이 살 수 있겠는가?! (뭇사람 웃음) 당신들은 지금 들을 때 아주 가소롭다고 느끼는데,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한 가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당신들은 아는가? 발산한 이러한 것들은 전 세계에서 끈적끈적한 것으로 형성되어, 아주 적은 사악이라도 당신들을 교란할 수 있는데, 그러나 당신들은 오히려 청리하지 못하며, 직접 대법제자의 매표와 진정하게 발정념 하는 대법제자를 가로막고, 청리할 수가 없다. 사악이 와서 교란할 때, 당신들이 발정념하면 즉시 청리하고 소멸해 버리기에, 그것들은 무서워서 곧 바로 도망을 친다; 그러나 대법제자라서, 또 소멸할 수가 없다. 그는 일념지차(一念之差)라, 그는 이 문제에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러므로 당신 이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이 없으며, 사부마저도 방법이 없는데,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 수련이 잘된 수련생이 이 한 차례 기회를 통해 더욱 잘 수련하고 이 단락의 길을 끝까지 걷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식이 부족할 때 마다, 우리들이 발하는 것이 정념이 아닐 때, 우리들이 병업관을 넘어야 하고 수련생들이 병업관을 넘어야 할 때, 우리들이 발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마 곧 그런 “찐득찐득한 물건이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련생이 병업관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씬씽관을 넘고 있는데, 발한 정념이 바르지 못하니 “끈적근적한 물건”이 아닐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 글자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근본적인 전변(轉變)과 관계 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 위치에 밀어 놓으신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믿었는가? 우리는 개인 수련이 아니라 정법 수련이기에 오늘까지 걸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늘 저층차에서 배회하면서 문제를 인식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감각을 믿는가 아니면 신사신법 하는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좀 황당한 것 같다. 오늘까지 걸어 왔는데 당신이 누가 신사신법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당신과 어떻게 해보려 할 것이다. 신사신법 하지 않았다면 대법 속으로 걸어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말한다면 100%로 신사신법 하지 못했다고 하면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100% 신사신법 하는데 도달하지 못했다면 도달하지 못한 부분은 곧 신사신법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많은 경우 우리는 일념에서 여전히 자신의 감각을 믿는데 여전히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몸이 아픈데 가짜일 수 있는가? 불편하고 참기 어려운데 가상일 수 있는가? 당신이 병이 아니라고 해도 명명백백하게 고통스럽고 확실히 병의 상태인데 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병이 있다고 여길 때면 아마 병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것을 병으로 여기기만 하면 당신의心性 (씬싱)은 속인과 같은 높이로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병이 있다고 여길 때면 당신 자신이 병을 불러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의 씬싱이 이미 속인 그 기초로 떨어져 내려갔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속인은 당연히 병을 얻게 마련이다.”

“연공인으로서 당신이 늘 그것을 병이라고 여긴다면 실제로 당신은 구한 것이다. 당신이 구하여 병을 얻었다면 그 병은 눌려 들어갈 수 있다. 한 연공인으로서 心性(씬씽)이 마땅히 높아야 한다. 당신은 늘 병이라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병이라고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심이기에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번거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수련 중에서 소업해야 하는데, 소업은 곧 고통이다. 어디 편안하게 공이 자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집착심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전법륜)

이것이 바로 사람과 신의 일념이다! 사람에 입각해 인식한다면 당신은 곧 사람이고 법에 입각해 인식한다면 당신은 곧 신이다. 자신의 감각을 믿으면 곧 사람이며 이것을 가상이라고 인식한다면 곧 신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병업이 없다고 알려 주셨다. 그렇다면 나타난 병업 상태는 우리들이 사부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법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내심으로부터 진정으로 부정하는가를 보기 위한 것으로 믿는다면 당신은 지나갈 수 있고, 믿지 않는다면 곧 대치하거나 혹은 포기하고 병원으로 간다. 엄중한 경우에는 마치 뚝뚝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를 듣고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되는데 결국 구세력이 사람 몸을 끌어가 버린다.

사람 여기는 미혹의 공간으로 눈을 만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진상을 요해(了解)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 진상을 차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종의 가상을 조성한 것이다. “눈으로 본 것이 확실(實)하고, 귀로 들은 것은 거짓(虛)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육안으로 본 것은 모두 거짓이고 모두 세간의 이런 미혹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타 매우 많은 이른바 감각 역시 마찬가지로 보기에는 확실히 진실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가상이다.

병업 상태가 나타날 때도 그것은 확실히 진실해 보이며 절대 당신으로 하여금 장난처럼 하하 웃고 지나갈 일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진정으로 신사신법 한다면 신념(神念)으로, 정념으로 해야 하며 병업의 가상이 아무리 사납다 하더라도 금강부동(金剛不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가상의 본질이 곧 드러나게 되며, 허망하던 느낌이 즉시 맞아서 원형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것은 물러서고 멸하게 된다. 100여 년에 불과한 인생과 100여 근(약 50여 킬로그램) 되는 신체를 모두 사부님께 맡겼으니 어떻게 되려면 되라고 하라. 방금 전 까지도 태산(泰山)이 머리를 눌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은 엷고 바람도 가벼워진다. 마치 어쨌든 모두 막다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고 가다 보면 갑자기 하늘을 향한 큰 길이 나타난다. “산과 물이 겹쳐 길이 없는 것 같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 진정으로 수련하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정념정행 한다면, 수련의 현묘함과 법의 위덕이 곧 펼쳐나올 것이다.

사부님께서 “전법륜 – 心性(씬씽)제고”에서 노부부가 학습반에 참가한 예를 드신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으며, 많은 수련생들은 그 내용을 암송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명백히 알고 있는가?

“50여세 되는 사람이 승용차에 그렇게 멀리 끌려가서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어디를 다쳤는가? 어디나 다 다쳤다,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도 않는다. 병원으로 가자면 가자. 입원해 있으면서 퇴원하지도 않는다. 속인이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연공인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말한다면,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또한 부동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많은 나이에 속인이라면 다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살갗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오는데 만약 그녀가 거기에 누워서 말했다고 하자. “아이고, 난 안 되겠다. 여기도 다쳤고, 저기도 다쳤다””

여기 노 부부는 우리들을 위해 매우 좋은 참조를 제공한다.

“그 수련생은 땅에서 천천히 일어난 후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들은 가보세요. 먼지를 툭툭 털며 남편을 이끌고 갔다.”

대단하다, 그 수련생은 그처럼 위험한 일에 부딪쳤는데도 생각마저 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감각을 느끼지 않았으며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는 것조차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예 괜찮다고 말하고는 일어나서 가버렸다. 이것이야 말로 정념이며 신념인 것이다. 만약 사람 마음이 중(重)하였다면 자신을 속인으로 간주했을 것이고 일어나지 않고 우선 넘어져 잘못 되었는가를 감각해 보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위험하여 배상을 요구하고 돈을 뜯어내는 사념(邪念 수련인을 놓고 말하면 곧 사념이다)이 있었을 것인데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 이다. 속인은 아마도 정말 “근육이 끊어지고 골절하여”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또 우리들이 가서 검진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씬싱은 속인의 층차까지 떨어졌기에 곧 위험한 것이다. 우리들이 정말 신사신법하면서 사부님의 보호가 있기에 괜찮다는 것을 알고 시종 이 일념을 견지한다면 그 위험도 없어질 것이며 병업 가상도 한 차례 허경(虛驚)에 지나지 않는다. 일념지차는 하늘과 땅 차이고 사람과 신의 구별이다.

안을 향해 찾는가 아니면 밖을 향해 구하는가?

대법제자들은 안을 향해 찾고 밖을 향해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구체적일 일에 부딪치기만 하면 흔히 잊어버리곤 한다. 밖을 향해 구하는 것은 아주 완고한 습관이며 아울러 보편적이고, 습관적인데 마치 사람의 하나의 껍질과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여러 해 수련하였으나 아직도 밖을 향해 구하는 이 층의 껍질을 파괴해 버리지 못하였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을 배우지 못하여 일이 있기만 하면 무의식적으로 밖을 향해 찾고 밖을 향해 구한다. 찾고 찾아도 원인을 찾지 못 한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에 당신이 밖에 나가서 찾으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병업 가상이 올 때 밖을 향해 구하면서 법에 있지 않는 상태 역시 괴상하고도 다양하다.

어떤 수련생들은 조금만 불편하면 병원에 가서 검사하여 병이 없다고 해도 깨닫지 못한다. 불편하니 병이라고 생각하면서 편안하려고만 한다. 정말 오성이 차하기를 “전법륜”에서 사부님이 제기하신 주사 바늘을 몇 개나 망가뜨린 후 깨달은 수련생 보다 오성이 더 차하다. 어떤 수련생들은 불편하기만 하면 혹은 약간의 상황이 있기만 하면 자신의 이전의 병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전의 병 상태를 생각해, 마음이 불안해진다. 사부님께서 나를 관계하시는가, 나는 세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했는데 사부님께서 나를 관계하시겠는가? 정말 나를 관계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 어떤 수련생들은 생각한다. 세 가지 일도 모두 했고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정성껏 했는데 왜 이런 상태가 나타나는가? 이러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도대체 왜 인가? 흔히 병업 가상이 올 때 우리들은 첫 일념 혹은 초기 계단의 생각이 아주 중요하다. 만약 우리들이 처음 시작에 이것이 가상이며 자신의 씬씽을 제고하기 위해 온 것이므로 무조건 안을 향해 찾으면서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가상도 더는 제 기능을 펼칠 수 없고 아마 순식간에 매우 빨리 없어져 버릴 것 이다.

도와주는 수련생은 또 다른 상태이다. “당신은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당신에게 나타난 상태는 반드시 어디에 누락이 있어 사악이 틈을 타고 기어 들어온 것으로 당신의 이 집착 그 사람마음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구세력의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렇게 되면 그 영향이 얼마나 좋지 않는가, 당신은 정념을 이용해야 한다.” 당신은 이렇고 당신은 저렇다고 하는데 한 말은 틀리지 않지만 자신을 그 속에 놓지 않았다. 진정으로 대법제자를 하나의 정체로 간주하지 못하고 밖에 서서 마치 의사 혹은 평론가와 같다. 발정념을 하는 것도 동수가 병업관을 넘도록 돕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치 한 사람의 발이 아픈데 손이 말하기를 당신이 발이 아프니 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며, 머리도 다리도 모두 발이 아프니 발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완정(完整)한 하나인 자신을 인위적으로 분할한 것이다. 어디가 아프든 모두 이 사람이 아픈 것이 아닌가? 모두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닌가? 모두 자신의 피와 살이 연계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이런 감각이 부족하다.

난(難)에 처한 동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무격려와 가지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들더러 먼저 가지 못하게 하셨고 이렇게 배치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무조건적으로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해야 한다. 철저하게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수련자들의 육체를 박해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사악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동수를 박해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박해하는 것이다. 물론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함과 동시에 청성하게 자신의 부족점을 찾으면서 자신이 어느 면에서 잘하지 못해 수련생의 마난을 증가시켰는지 생각하면서 제때에 자신의 바르지 못한 관념과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모두 동수를 정체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면서 공동으로 원용하고 가지할 수 있을 때, 모두 안을 향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하나의 누락도 없는 정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사악도 틈을 탈 수 없다.

이 문장은 큰 단체 법 공부 모임에서 교류한 내용을 정리한 것에 필자가 일부 보충을 가했다.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 2011년 9월 7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9/7/771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