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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각성 : 신앙자유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중국 인민과의 관계를 개선하라

신앙자유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중국 인민과의 관계를 개선하라

가오즈성(高智晟)이 후진타오, 원자바오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글 : 가오즈성
[정견망 2005년 10월 20일] 신앙자유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중국 인민과의 관계를 개선하라 – 가오즈성이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께 드립니다.

중국 국민 가오즈성이 두 분께 문안을 드립니다!

여기서 두 분께 문안 인사를 드리기에 앞서, 저는 다른 일단의 우리 동포들인 파룬궁 자유 신앙자들이 최근 겪은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이며, 조직적인 불법 박해 진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베이징 이외의 일부 지역에 가서 며칠간 “도둑 같은 날”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외부에서 제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원인입니다.

새롭고 지속적으로 대규모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와 폭행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각 지역에서 보내 온 서신에 반영된 진실성뿐만 아니라 저희가 이번 외출을 통해 직접 겪은 사실입니다.

두 분의 기본적인 인성의 선량함을 믿으며, 저는 제가 본 진실을 공개 서신 형식으로 두 분께 통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시금 두 분께 희망을 걸며 하루빨리 각지 지방 당국이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불법적이며 야만적인 박해행위를 제지할 수 있는 조치를 신속히 강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이미 불법 박해를 당하고 있는 인민들을 구하기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중국의 헌법가치, 법치가치, 도덕 및 도의적 측면에서 인류의 보편적 문명 공감대의 가치에 관련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오늘날의 중국에서, 당신들의 눈에는 무가치한 것들로 되었습니다!

산둥성 옌타이(烟台)시의 쉬청번(徐承本)은 10월 15일 저를 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 아내 허슈링(賀秀玲)의 시신은 거의 2년 동안 냉동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그녀를 괴롭혀서 결국 사망하게 했던 자들은 오히려 그녀가 죽은 후 거의 2년 동안이나 이 사건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가 고통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딱 한번 면회를 허용했습니다. 당시 제가 본 사람은 이미 정신이 맑지 않았으나 여전히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반신은 옷조차 걸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이런 참혹한 광경을 보고 제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그들은 인정이라곤 조금도 없었으며, 단지 몇 분 만에 저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당시 그녀는 겨우 40여 세에 불과했으며, 이것은 제 아내가 죽던 날 저녁 공안이 제게 통지하여 목격한 광경입니다.”

“아내는 생전에 5차례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에서 3개월간 수감되었습니다. 베이징에서 청원을 하다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을 잡아 가두는 즈푸(芝罘) 구역에 갇혀 있다가 베이징에서 장기간 빌린 한 여관 화장실 안, 3평방미터로 채 되지 않은 곳에 16명이 함께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했습니다. 저희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아내가 죽고 난 후 그들은 사체를 검시했으나 아직까지 검시보고서를 제게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여러 차례 계속되는 요구에 단지 구두로 “파룬궁을 수련하다 죽었다.”라고만 알려주었습니다.”

“원덩시(文登市) 쑹춘진(宋村鎭) 스후이야오촌(石灰窯村)의 수련생 두커쑹(杜克松)은 올해 5월 붙잡힌 후,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후 간수소에서 박해를 받다가 고혈압이 발견되었습니다. 노동교양소에 보내졌으나 입소가 거절되어 50여 일 간 간수소에 갇힌 후 생명이 위독하여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9월 27일 다시 공안에 체포되어 지금까지 행방불명입니다.

원덩시(文登市) 수련자 위정훙(于正紅)은 40여 세로 쑹춘진 스첸촌(寺前村) 사람입니다. 9월 27일 집에서 체포되었으며, 체포된 후 15일간 단식하여 병원에 보내진 후 “생명 위독” 통지를 받았고, 나중에 공안이 (감히 자신이 경찰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위장하여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파룬궁 수련자 린지샤오(林基嘯)는 원덩시 쑹춘진 다칭춘(大床村)에 거주하는 40세 가량의 여성입니다. 9월 28일 체포되어, 간수소에 갇힌 후 줄곧 단식을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면회신청을 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왕춘(王村) 노동교양소에 보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여전히 거기 있었으며 이미 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왕춘(王村) 세뇌 기지에 가서 알아낸 소식에 따르면 그 사람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다시 “610”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또 그녀를 칭다오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현재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옌타이(烟台) 푸산(福山)구의 사오융(肖勇)은 줄곧 규율을 잘 지키고, 칭찬을 받았으나 단지 며칠간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 때문에 올해 7월 3년 6개월의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저는 2001년 6월 처음으로 체포되었고, 1년간 학대를 받았으며 몸이 아주 망가지게 되자 풀려났습니다.”

은퇴 교사인 류리(劉莉 본인이 익명을 요구했기 때문에 가명을 사용)는 조용히 앉아서 저와 2시간 30분 가량 이야기를 했습니다.

“2003년 제가 석방된 후 2000년부터 저의 모든 월급이 “610”에 의해 수령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610”과 학교 교장을 찾아갔으나 누구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도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 때문에, 수감기간 동안 시달림을 당해 기억을 상실했으며 집안에서 원래 그가 보관하고 있었던 약간의 저축증명서도 재산이 몰수된 후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3년 설날(春節)에, 저는 겨우 남아있던 100위안을 수감 중이던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저희 모녀 둘은 설을 쇨 한 푼의 돈도 없었습니다. 2001년 6월, 푸산구 공안국에서 4, 5명의 경찰들이 저의 집 재산을 차압했으며 2권의 파룬궁 서적을 찾아내고는, 저를 강제로 파출소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저를 구타할 때 저는 “어떻게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저를 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때리면 어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중 장(張)씨 성을 가진 한 경찰은 “다시는 재수 없는 말을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기록에서 “기록”을 베끼고 난 후에 제게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거절하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제 이름으로 서명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천(陳)씨 성을 가진 경찰이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그녀가 서명하지 않았는데 왜 당신이 서명을 하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재수 없게 만들어 주려고”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제 앞에서 위조한 가짜 자료를 가지고 저를 15일간 가두었습니다. 후에 바로 푸산(福山) 세뇌기지로 이송되었습니다. 전향반에서 그들은 저를 잠도 자지 못하게 했으며 강제로 전향시키려 했습니다. 2002년 1월까지 저는 여전히 전향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곧 가짜 기록을 가지고 1년간의 노동교양 판결을 내렸습니다. “610” 주임 왕웨펑(王岳峰)은 저를 노동교양소로 보냈고, 노동교양소에서는 저의 신체검사를 한 후, 이미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에 수용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제로 노동교양소에 저를 수감하고자 귓속말로 잠시 소곤거린 후 한 자 길이에 두께가 한 치 가량 되는 주사를 놓으려 했습니다. 저는 이에 반항했으나 4, 5명의 사람들이 저를 침대 위에 눕히고 강제로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래도 제 몸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자 왕웨펑은 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002년 11월 20일, 저는 계속해서 푸산진(福山鎭) 당위원회에 가서 진장(鎭長)에게 불법으로 제 임금을 압류한 것에 대해 따졌습니다. 제가 진장 사무실에 가서 제 소개를 하고 난 후, 그는 몸을 일으켜 나갔고 저는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제게 “자오(趙) 비서와 이야기하도록 했으니 그의 사무실에 가보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오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사무실에 막 들어서려는 순간 문밖에 있던 4, 5명의 경찰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저를 차로 끌고 간 후 강제로 푸산(福山) 세뇌기지로 끌고 갔습니다.

이번에는 2003년 11월 17일 석방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저에게 인정사정없는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연속 43일간 수갑을 차고 있었고, 저는 철문에 매달려 거꾸로 묶인 채 구타를 당해야 했습니다. 수감된 지 거의 1년 후에 전향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저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4년 11월 28일, 저는 다시 붙잡혔습니다. 현지 파출소에서는 저를 치샤(栖霞) 간수소로 보냈고, 7일간 수감 된 후 다시 치샤(栖霞) 세뇌기지로 이송되었습니다. 저는 2005년 3월 18일 석방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잠을 못 자게 하는 방법으로 저를 박해하였고 연속 26일간 잠을 못 자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때려서 깨웠고, 저는 여러 차례 기절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저를 쉬지 못하게 하였고 구타했습니다. 매번 그들조차 힘들어서 숨을 가쁘게 내쉬기도 했습니다.”

2005년 10월 15일 오전, 우리는 다리를 저는 왕더장(王德江)과 만났습니다. 왕더장의 다리는 그때까지 부어올라 신발조차 신을 수 없었습니다.

“2005년 8월 15일 저녁, 저는 모우핑구(牟平區) 가오링진(高陵鎭) 샤위촌(下雨村)의 친구 집에 있었는데, 마을 치안(治安)과 가오링(高陵) 파출소에서 온 세 사람이 집으로 뛰어 들어와 저와 친구는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큰 소리로 “도둑 잡아라.”라고 소리치면서 마을 사람들을 속였고 우리는 끝내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고 치안주임은 의자를 들어 갑자기 제 몸을 내리쳤습니다. 의자는 부서졌고, 저는 이미 바닥에 누워서 꼼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 발로 걷어찼고, 그 중 한 사람이 저의 간(肝) 부위를 발로 차서 저는 바로 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를 차로 옮겨 가오링(高陵) 병원에 보내 응급조치를 하였고, 제가 깨어났을 때 저는 병상에 묶여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치안요원은 저를 붙잡을 때 저때문에 넘어진 것에 앙심을 품고, 제가 깨어난 것을 본 후 구두 밑창으로 저를 때렸습니다. 현장에 있던 공안은 “병원에서 너무 소란을 떨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두 집에서 6명의 사람이 붙잡혀왔고, 그중 쑨쉐진(孫學進)이라고 하는 노인은 이미 70여 세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를 유치장에 보내, 세뇌반 참가 신청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제가 서명하지 않자 감옥경찰은 저의 수갑을 비틀어 쥐고 “서명할래, 안 할래”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는 수갑이 저의 살에 움푹 들어갈 정도로 비틀어 쥐었으나, 제가 여전히 서명하지 않자 그는 몸을 돌려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한 범죄자를 찾아서 저를 감방에 가둔 후 때리게 했습니다.

국가보안대대가 저를 한 차례 심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제가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옌타이(烟台) 싱푸(幸福) 세뇌반으로 이송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작은 의자에 앉히고는 강제 전향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삼서(三書 수련하지 않는다는 보증서, 자아비판서, 참회서)를 쓰게 했고, 여러 사람이 번갈아 저로 하여금 파룬궁을 중상모략하는 비디오를 보게 하였습니다. 4일째 되는 날, 아무 효과가 없자 마오핑(牟平) 국가보안대대와 옌타이(烟台) 공안처 “610” 두목인 위강(于剛)은 의논 끝에 저를 자오위안(招遠) 세뇌기지로 이송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 같은 사람은 자오위안 기지에서만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 저는 이미 7, 8일간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자오위안에 도착한 후, 그들은 저를 들어올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발로 걷어차며 입으로 “전향 할꺼야 안 할꺼야.” 라고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저를 내려놓을 때, 저는 이미 힘이 없어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다만 바닥에 누워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고, 기지의 주임은 저의 하반신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도 없었으며 발로 제 얼굴을 들어올린 후 발을 빼고는 반복해서 저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쳤습니다. 또 발로 차면서 충분히 괴롭히고 난 후에 비로소 저를 수감실로 옮겼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 인간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오위안 기지에서는 한 사람당 작은 감방을 하나씩 썼는데, 이는 세뇌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일어서고 싶어도 일어설 수가 없었고 끊임없이 피거품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들조차도 견딜 수 없어서 저와 함께 구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머리를 붙잡고 음식물을 주입했고, 그곳 주임은 제게 전향할 것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제가 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그는 자오위안에서는 전향하지 않고는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곳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발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의 높이로 스팀파이프에 수갑을 채워 저를 묶어놓았습니다. 방안에는 등불 하나 없이 24시간 어두웠습니다. 저는 희미하게 불시에 어떤 사람이 뛰어 들어와 제 코에 손을 뻗어 만져 보고는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제 손목에는 커다란 상처가 생겼습니다. 당시 전선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기 때문에 저는 말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말할 때면 침이 흘러내립니다. 그들에 의해 끊임없이 학대를 당하고 나서 저는 정말이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는 혀를 깨물고 자살할 생각도 했으나 그들은 또 몇 줄의 전선을 더해 입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제가 기절하여 깨어나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제가 깨어난 후 다리는 이미 검푸른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고, 왼쪽 다리는 점점 두꺼워져 이미 오른쪽 다리의 두 배가 되었으며 오른쪽 다리는 오히려 점점 더 가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면, 그들은 저를 부축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제 스스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닥에 미끄러지면, 그들은 저를 침대위로 들어올려 저의 오른쪽 다리를 묶어 계속해서 수갑을 차게 했습니다. 당시 그곳의 의사는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저를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했고 병원 의사는 제가 생명이 위독하다고 말하면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를 위황딩(毓皇頂)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은 의료 환경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저는 며칠간 입원한 이후, 그들은 제 가족들에게 치료비를 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족들은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이미 혼자서는 생활할 수조차 없게 되었고 80여 세의 늙은 모친이 저를 시중들고 있습니다.”

왕더장(王德江)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지방당국은 그를 가족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와 가족들의 악몽 같은 경험은 지금까지도 전국 각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동포들이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22살의 양커멍(楊科萌)은 하얼빈 공과대학 웨이하이 분교 자동차과 2학년 학생입니다. 학생부터 총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인터넷에 공개 탈당을 하여 한 중앙지도자(주: 뤄간을 지칭함)의 특별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탈당할 때 자신의 학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610” 요원들이 전국 대학을 대상으로 그물망식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올해 5월, 웨이하이 “610” 요원들은 기어이 그를 찾아냈고 그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여부와 인터넷에서 탈당을 했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탈당하고 싶으면 탈당하는 거지요.”라고 말했습니다. 8월 20일 개학을 했을 때, “610” 요원들은 다시 학교에 왔고 29일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기숙사에 전향을 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9월 7일, 그의 부모인 양핑강(楊平剛), 창리쥔(常麗君))은 왕성리(王勝利) 부부와 지닝의 왕여사와 함께 동시에 체포되었으나 아직까지 행방불명입니다.”

이것은 왕씨 성을 가진 한 선생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내용입니다.

“2005년 국경절 전에, 산둥성 주요 지도자들이 라이우(萊蕪)시 공안 기관에, 국경절 전에 위안잉쥔(亓英俊), 천롄메이(陳蓮美), 왕징(王静) 등 7명을 체포하지 못하면 공안기관의 지도자는 모두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통지하였습니다. 9월 29일 한밤중 1시에, 위의 사람들이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사실상 현재 우리 많은 경찰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붙잡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와 같은 상부의 지시 때문에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외에, 현재 전국 각지에는 자오위안 세뇌기지에서 경험을 쌓은 요원들이 더욱 우리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도록 하고 있고, 아울러 후진타오 주석의 방미 기간 동안 중앙정부는 최근 그들의 공격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먼저 파룬궁 수련생들을 습격하여 박해를 정돈한 후에 대대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산둥성 자오위안 세뇌기지와 산시성(山西省)의 한 기지는 이미 중앙에서 시범기지로 지정하였습니다. 외부 사람들은 이런 기지들이 점점 더 공포스럽게 변했으며 몇몇 사람밖에는 견딜 수 없는 지옥과 같은 곳으로 변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오위안 세뇌기지는 지옥보다 훨씬 두려운 곳으로,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도 마귀로 변했습니다.”

일찍이 자오위안 기지에 수감된 적이 있었던 한 수련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위안신(亓鑫)이라고 하며 올해 19살로 산둥성 라이우시 사람입니다. 저는 위안잉쥔과 천취롄의 딸입니다. 제게는 또 위안야오(元垚)라는 10살 난 남동생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98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셨습니다. 2000년, 아버지는 공원에서 수련을 하시다가 라이우시 경찰에 체포되었고, 후에 즈보왕춘(淄博王村) 노동교양소로 이송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경찰의 추격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나중에 붙잡혀서 라이우시 샤오차오촌(小曹村)대대에 수감되셨습니다. 당시 저는 13살이었고, 남동생은 겨우 3살이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실 때까지 혼자 집에서 남동생을 보살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신 후 아버님은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즈보(淄博) 노동교양소에서 경찰은 아버지께 수련을 포기하도록 하기위해, 동시에 8개의 전기충격기로 충격을 가하면서 끊임없이 진동을 주었고 피부에서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합니다. 전기충격을 받은 후 몇 주일 동안, 이미 전기가 흐른 피부는 한 겹 한 겹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후에 부모님이 돌아오시고 난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부모님은 다시 군용품을 파는 가게를 경영하셨고 우리는 모든 재난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9월 30일 심야 1시쯤에, 라이우시 경찰이 20여 명의 무장경찰을 이끌고 원양촌(汶陽村) 대법 제자 상(尙) 이모의 집에 뛰어 들어와, 우리 부모님과 상 이모 부부를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상 이모 남편은 결코 수련을 하지 않았습니다. 8월부터, 아버지는 경찰에 의해 지명수배 당한 것을 아시고는 저를 이모에게 보내셨습니다. 부모님은 동생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우리 가족은 다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끌려가신 후 동생은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동생이 매우 걱정됩니다. 저는 매일 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10월 1일 오후 3시에, 라이청구(萊城區) 공안분국 류칭(柳青)과 장바오더(張寶德), 관사 파출소의 사오스융(邵士勇) 등 20여 명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난입하였습니다. “魯S1030″ 번호판을 단 차가 우리 집 아래층에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열쇠로 집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가산을 몰수하였고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떠났습니다. 현재 우리 4식구는 사방으로 흩어져 지내며 10살의 남동생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허난(河南) 푸거우현(扶溝縣)에 거주하는 58세의 자쥔시(賈俊喜)는 2005년 8월 18일 현지 경찰에 의해 납치되어 10여 일 간의 고문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후에 가족들이 사체 검시를 요구하자, 오히려 현지 경찰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었습니다. (경찰에서는 “베이징에 고소해도 소용없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 6월 8일, 광둥성 후이저우(惠州)의 주자원(朱家文 가명)은 작업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과정에 체포되었고, 54일 후 가족들은 그가 노동교양 3년 형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5년 9월 12일 심야, 광저우시(廣州市) 둥산구(東山区)의 스레이(石磊 가명) 집에 갑자기 몇 명의 경찰이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스레이를 끌고 갔습니다.

“당시 제 남편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자마자 그들은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매를 맞는 소리는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받고 있지 못합니다. 가오 변호사님. 아직 우리는 어떤 수속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와의 전화 통화에서 스레이의 부인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2005년 9월 6일, 스자좡의 파룬궁 수련자인 단성(段生)과 허리(何麗)는 체포된 이후 아직까지 행방불명입니다.

2005년 7월 19일, 스촨(四川)성 루저우(瀘州)의 위안위쥐(袁玉菊), 량진후이(梁勁暉) 모자와 다른 10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불법으로 체포되어 아직까지 수감 중입니다.
…….

지난 “국경절(10월 1일)” 전날 밤, 베이징, 헤이룽장 등지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가 발생했는데, 각지에서 후진타오 주석의 출국 기간 동안 체포한 것이 특히 현저했습니다. 이상의 사실과 진상은 백일하에 발생한 것으로 은폐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두 분께 건의합니다.

일부 지방 당국에서는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박해를 이미 멋대로 자행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인류적인 야만적 폭행이 21세기 인류사회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으며 정부가 있는 오늘의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두 분께서는 반드시 현실을 직면하셔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두 분께서 정치를 맡으셨을 때 국내 인민과 외부 문명 세계에서는 커다란 기대를 품었습니다. 두 분이 자주 제창하시는 “헌법에 의한 치국, 사람을 근본으로 함, 조화로운 사회 구축” 등과 같은 이념은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고 동시에 객관적 진실입니다. 박해를 당한 인민들을 직면하는 동시에, 두 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현재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직면하셔야 합니다. 강대한 대국의 지도자로서, 우리는 물론 이 분야에서 당신들의 인지능력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낮다는 것을 믿거나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현재 공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무고한 수련생들에 대한 야만적인 폭행과 박해에 대해, 두 분이 만약 모르고 계신다면 이것은 국민들에 대한 죄악입니다. 만약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지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악을 행한 사람의 죄악과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제가 두 분께 공개서신을 쓴 것은 제가 여전히 두 분의 신념을 신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조사 과정에서 만난 자신 및 친척들이 평생 잊지 못할 박해를 당한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도 두 분에 대해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박해 과정에서 불구가 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박해를 받다가 죽음을 당한 친척이 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선량함과 두 분에 대한 기대는, 조사 과정에 여러 차례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제가 두 분과 함께 부득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파룬궁 수련생들이 박해를 받는 이번 거대한 재앙 속에서 일부 죄악들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자행된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했거나 심지어 한을 품고 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위배한 패륜적인 박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계속해서 우리 정부의 이미지와 국가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법률적 측면, 도덕적 측면 및 인간성과 문명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재난적인 죄악은, 물론 당신들이 시작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재난은 당신들이 집권하고 있는 시기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고한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재난이 아직 제지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책임입니다. 만약 이번 사태가 하루빨리 제지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순히 저 개인의 인식이 아닌 역사적인 결론이 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재난을 조성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일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재난의 피해자들인 수련생과 그 친척들뿐만이 아니라, 파룬궁 동포들에 대한 인간성을 상실한 잔혹한 박해과정에서 무고한 동포들을 해치는데 참여한 사람들 자체도 이미 철저하게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자오위안 세뇌기지의 관례에 따라 공무를 처리하고 얼굴 표정 하나 없이 그들의 동포를 짓밟으며 왕더장의 하반신을 짓밟았던 그 주임, 4년 동안 무수하게 불법으로 임금을 압류당하고 생사의 위험에 처했던 류 선생의 그 “610 사무실” 주임 및 학교 교장도 역시 이 광란의 폭행의 피해자 입니다. 구체적인 세뇌와 전향을 진행한 관리와 실무자들은, 오로지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전향”의 결과로 평가 받고 장려 받기 때문에, 실무에서 이러한 관료들과 실무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상을 얻고자 이미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같은 동포들의 생명에 대해, 인간에 대한 경외심과 동정심이라곤 조금도 없어졌으며 마땅히 있어야 할 죄책감, 수치심, 비도덕감마저도 사라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류 인간성과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가치들이 더 이상 중시되지 않고, 직업과 양심의 공감대에서 이미 형성된 기본 가치는 이미 부정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파룬궁 수련자 허슈링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겪은 비인간적인 고통 과정을 기록하여,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 후손들에 의해 비난받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숨이 거의 끊어질 무렵 영안실로 이송되었고, 그녀가 죽은 후에야 가족들은 그녀를 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때 가족들은 갑자기 “죽은 자”의 양쪽 눈언저리에 천천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는 급히 의사를 찾아 응급조치를 요구하였습니다. 의사들의 냉담함에 조급한 가족들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같은 마을 사람들도 허슈링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의사는 구급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가서, 큰소리로 의사를 찾으며 비난하자, 비로소 의사들은 의료기기를 가져와 테스트하였습니다. 테스트 결과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때, 우리 의사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어떻게 사람을 구할 것인가가 아니라,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심전도를 찢어버리면서 입으로는, “사람이 이미 죽었습니다. 살아있기는 뭐가 살아있어요.” 라고 말하며 도망쳤습니다. 허슈링은 눈물을 흘린 채 친지들이 절망으로 통곡하고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정말로 두 분께서 상술한 현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국가, 우리 인민, 우리 민족의 영구한 가치 및 이러한 재난 앞에 영광스럽지 못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전 세계 각국 정부의 도덕적 이미지는 이미 현실적으로 이번 거대한 재난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것은, 중국의 집정자들이 이끄는 경제 개혁의 커다란 성과는 필연적으로 정신 영역의 변화를 유발하였고, 전에 없는 예측과 충분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이미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평화의 시대에, 경제를 지상(至上)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인류는 단순히 물질 소비에만 오랫동안 탐닉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생활에 대한 인간들의 갈망과 기대의 지속적인 추동 속에서, 종교와 신앙생활이 크게 부흥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입니다. 그것과 과학, 문화 등 주류 언어는 서로 위배되지 않고 병존하며, 현대 문명은 일찍이 과학과 신앙 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각 영역을 나누었습니다. 개인 신앙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집단 이데올로기의 소멸을 초래할 것입니다. 개인 권리의 신장은 필연적으로 정부의 무한 권력의 축소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집권자들이 반드시 정시해야 하는 것으로 또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사실로서, 이것은 인류 역사의 흐름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저와 제 주변 많은 사람들의 의혹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하고도 논쟁할 필요가 없는 신앙의 자유가 왜 이렇게 지속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더욱이 불법적인 탄압을 초래한 것일까요? 이곳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병적이거나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탄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선택은 탄압자들 자신의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처지 및 지속적인 열악함 속에서 탄압자 스스로를 이미 악화시켜 정상인들로 하여금 치를 떨게 하는 인간성 이외에는 원래 어떠한 긍정적인 가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는 6년 전에 시작된 재난이 계속되고 있는 진실 이외에, 다른 하나의 진실을 알았습니다. 바로 확실하고 확실하게 이번 탄압 자체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근 다녀본 지방에서 갈수록 탄압이 잔혹하고 갈수록 더 지속되는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실패 정도와 그 표지는 날로 뚜렷해져서 산둥성의 지난(濟南), 칭다오, 옌타이 등지에서는 수련생들과 그들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부착한 스티커 및 항의하거나 죄상을 폭로하는 표어 등이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많은 공안 파출소의 문 앞에 보이는 것은 강인하게 이어지는 투쟁이 탄압이 지속됨에 따라 더욱 커지고, 확장되어, 인간의 본성을 말살시키려는 탄압 조치가 얼마나 인심을 얻지 못하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일부 탄압 수단이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서는 상술한 지역과는 다른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산시(陝西) 일부 지역에서 이 부분의 국면은 비교적 평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폭력을 맹신하고 있는 자들이 설 곳이 없음을 분명히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복잡해진 사회에서 수많은 재력과 경찰 자원을 사용할 곳이 많음에도, 평화적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탄압에 이런 자원들을 소모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인권을 침범하는 죄악입니다. 감히 직언을 용서하신다면 두 분에게는 이러한 현상을 신속하게 변화시키지 않을 권리가 없으며 도리도 없고 또 구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중국은 《세계인권선언》을 비준한 나라입니다.

여기에는 “사람마다 생명, 자유, 인신의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어떠한 사람도 이유 없이 체포를 당하거나, 구금, 추방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헌법 혹은 법률이 부여한 기본 권리가 침해당할 때, 국가 관할 법정에서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가 있다.” 라고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행 헌법 제33조에도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제법이든 중국 자체의 헌법이든 모두 절대로 어떤 사람도 어떤 이유로든 인권을 침해당하거나, 비인도적으로 자국 동포에게 박해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신봉하고 법치를 존중하기에, 본인은 정중하게 두 분께 조속한 시일 내에 결단을 내려 “자유로운 신앙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중국 인민과의 관계를 개선” 할 것을 건의 드리며, “법률에 근거한 치국”과 “헌법에 근거한 치국”의 방침을 철저히 이행하고, 민주, 법치와 헌정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중국을 창립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실천하시다면 중국 인민 및 세계 인민들의 끊임없는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특별히 일깨워드리고 싶은 것은, 이 서신에서 언급한 고난을 겪은 모든 동포들이 이 공개 서신으로 인해 더 이상 야만적인 박해를 받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두 분께서 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자좡 파룬궁 수련생 하오추옌(郝秋燕)은 이미 저의 공개 서신으로 인해 불법으로 거의 8개월간이나 야만적인 박해를 받으며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런 일깨움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안전한 생활 속에 있으며, 계속해서 그들의 안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문명한 인류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또 중국인이자 중국 국민인 동시에 변호사인 저로서는 이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중국에서는 이것이 매우 위험할지라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두 분의 모든 일이 평안하고 순탄하시길 기원합니다!

당신들의 동포: 가오즈성

2005년 10월 18일 베이징에서.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5/10/20/342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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