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즈성이 파룬궁을 위해 중국 당국에 보내는 세 번째 공개 서신
글:가오즈성(高智晟)
【정견망 2005년 12월 13일】 2004년 12월 전국인민대회에 공개 서신을 보낸 이후, 중국의 저명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高智晟)이 10월 18일 다시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공개 서신을 보냈다. 편지에서는 그가 조사한 파룬궁 수련생들이 당국으로부터 야만적인 박해를 받은 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열거하며, 이들에 대한 박해 중단과 인민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호소하였다. 공개서신의 발표는 국내외 및 중국 고위층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후 가오즈성 본인은 협박 전화를 받았고, 빈번하게 베이징(北京)사법당국 등 부문에서 찾아와 그와 담화를 했다. 당국에서는 가오즈성이 이미 한계선을 넘어섰으며 아울러 그의 공개서신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가오즈성이 이를 거절하자 11월 4일 오후 가오즈성 변호사 사무소 영업정지 1년을 선고하였다.
여러 방면의 압력과 위협에도 가오즈성을 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의 요구에 따라 11월 29일 그는 20명에 달하는 사복 경찰의 미행과 포위를 성공적으로 벗어나 산둥성 지난(濟南), 랴오닝성 다롄(大連), 푸신시(阜新市), 지린성 창춘(長春) 등지에서 십여 일간 새로운 진상 조사 활동을 벌였다. 2005년 12월 12일, 가오 변호사는 “우리 민족의 양심과 도덕을 말살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공개서신을 중국 당국에 보내 박해를 당한 사람들의 6년여 간의 비참한 상황을 기술하였다. 다음은 가오즈성이 중국 당국에 보낸 세 번째 공개 서신의 전문이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및 아직 양심이 있는 사랑하는 중국 동포들에게
창춘시에서 가오즈성이 문안을 드립니다!
이곳에서, 저는 먼저 광둥성 위원회, 성정부(省政府)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총살을 당한 무고한 동포들(산웨이에서 있었던 시위군중에 대한 총격사건을 가리킨다)에 대하여 비통한 애도를 보냅니다! 죽음을 당한 동포들의 친지들에게 한 시민으로서 위로와 성원을 보냅니다! 이와 동시에, 광둥성 위원회, 성정부가 동포들을 흉악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보냅니다! 최고 당국에 문명사회가 공인하는 기본 준칙을 준수하여 살인자와 책임자를 처벌하고 사망자 가족들을 보살펴주시기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창춘의 겨울은 유달리 춥습니다. 단수된 방 한 칸에서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숨어 지내고” 있는 저는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후진타오, 원자바오 두 분께 다시 공개 서신을 쓰고 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가장 위대한 민족 중의 하나인 중국민족의 내일을 위해 급히 내닫고 있는 모습이 한 보통 시민의 뜨거운 피를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10월 18일, 마찬가지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던 상황에서, 저는 후진타오, 원자바오 두 분과 우리 동포들에게 공개서신을 보내며, “자유신앙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중국인민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절박하게 호소했습니다. 공개서신을 발표한 다음날, 저희 집은 노골적인 전화 위협을 받았습니다. 셋 째날부터 매일 평균 10여대 이상의 자가용과 20명 이상의 사복 경찰들이 저희 집을 24시간 포위하고 주시하며 미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변호사 사무소는 베이징시 사법당국에 의해 불법적인 영업정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내 조국이 한 시민의 공개 건의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는 방식은 저를 탄식하게 합니다!
공개 서신이 일으킨 또 다른 강렬한 반응은 전국 각지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잇달아 제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와서 진상을 알아볼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이러한 요청 서신은 특히 창춘시, 다롄시가 가장 많았습니다. 11월 29일부터 저는 거의 24시간 계속해서 산둥성 지난시, 랴오닝성 다롄시, 푸신시, 지린성 창춘시 등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진상 조사를 벌였습니다. 단독으로 조사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전체 노정에 자오궈바오(焦國標) 교수가 동행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 때에, 무리를 이룬 사복 경찰들은 여전히 제 집 앞에서 철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온 가족들이 야만적인 압박을 받은 가장 혹독한 시기였습니다. 11월 29일, 저는 20명 이상의 사복 경찰의 미행과 포위를 벗어나, 다시 제 방식대로 15일간의 진상조사를 벌였습니다. 제가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진상을 특히 이런 시기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전체민족에게 우리 민족이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과 시급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 모든 개개인이 반드시 정색을 하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마주할 때입니다! 어떠한 이유, 어떠한 전통 방법 및 어떠한 지연도 모두 우리 전체 민족 가치에 대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저는 제가 본 진실하게 존재하는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이 편지의 공개날짜가 제가 수감되는 날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십여 일간의 조사에서, 저는 다시 저의 양심을 찌르는 진실을 목격하였습니다. “610” 사무실(파룬궁 탄압을 위해 건립된 중국 공산당 내부의 게슈타포 식 비밀 조직으로 배후에서 탄압을 획책하고 조종해왔다.), 적어도 이렇게 그것을 호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 정권 내에서 정권의 힘보다 큰 마피아 조직, 정권의 모든 자원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마피아 조직입니다. 한 국가의 헌법 및 국가 권력구조의 규범에도 없던 조직이 오히려 국가기관에 의해서만 행사할 수 있는 권력 및 국가 기관조차 아예 행사할 수 없는 수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610”은 이 지구상에서 인류가 국가 문명을 가진 이래, 국가로써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던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610”이라는 암호화된 권력에 의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속적으로 살육하고, 족쇄와 수갑, 쇠사슬, 전기 고문, 고문 의자(호랑이 의자) 등의 방식으로 우리 동포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미 마피아화 된 권력은 현재 지속적으로 우리들의 어머니, 자매, 아이들 및 전체 민족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두 분께서는 이 시대, 이 시각 특수한 신분을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서, 특히 국내 대다수의 민중들의 마음속에 아직 양심을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 여겨지는 분들로서, 함께 이 모든 것을 직면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시각,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6년 이상 박해들 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믿기 힘든 야만적인 박해 진상들 가운데, 정부가 자신의 인민들에 대해 인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저의 영혼을 뒤흔들었던 부도덕한 행위 기록은 바로 “610” 요원 및 경찰, 완전 규격화 된 사람들이 예외 없이 우리 여성 동포들의 생식기관을 공격하는 비열한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거의 100% 여성 동포들의 생식기관, 유방 및 남성들의 생식기가 박해를 받는 과정 중에서 극도의 비열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박해를 당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막론하고, 형벌을 받기 전 첫 번째 과정은 바로 모든 옷을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말과 글로도 과연 우리 정부가 이러한 비열하고 부도덕한 일을 자행했는지 분명하게 설명하거나 재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 조금의 체온이라도 남아있는 민족 구성원들 가운데 이러한 진실 앞에서 누가 침묵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 2005년 10월 28일 오후 4시 20분, 창춘시의 왕서우후이(王守慧)와 류보양(劉博揚) 모자가 “610” 경찰의 미행으로 불법 체포되었습니다. 모자는 그 후 경찰의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그날 저녁 8시 28살의 류보양이 먼저 사망했습니다. 10여일 후 그의 어머니도 고통을 받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생전에 온갖 고난을 당하던 불행한 모자의 시체는 아직 “610” 경찰의 수중에 갇혀있습니다. 경찰은 류보양 사망 후 3일 만에 그 아버지에게 통지를 했고, 그의 어머니 왕서우후이의 사망 시각은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현지 변호사를 찾았으나, 아무도 그의 의뢰를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고, 사는 게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아내와 아들의 후사를 처리하고 나면 나도 그들을 뒤따라가겠다.”
“왕서우후이 일가족 세 명은 1995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탄압이 시작된 이후, 지속적으로 뤼위안구(綠園區) 정양(正陽) 파출소와 정양 가도(街道) 사무실 간부의 박해를 당했습니다. 왕서우후이는 1999년 10월과 2000년 2월 불법으로 구류와 노동교양을 당했습니다. 헤이쭈이쯔즈(黑嘴子) 노교소에서 전기 고문을 8차례 받았고 매일 낮에는 강제노역을 했으며, 야간에는 서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하여 5일 밤낮을 지냈습니다. “사인상(死人床 죽은 사람의 침대)”이라는 고문 틀에 수차례 묶여있기도 했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사인상”에 묶여 두 줄의 전깃줄로 한꺼번에 1시간여 동안 전기 충격을 가할 때 였으며 당시 그녀의 전신과 온 얼굴은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박해를 받아 생명이 위급해졌을 때야 비로소 석방되었습니다.
2002년 4월 11일, 왕서우후이가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또다시 정양 파출소에 납치되었고, 창춘시 공안국에서는 얼굴을 가리운 채 창춘 징웨탄(淨月潭)의 징웨산(淨月山)에 설치된 형벌 방에서 고문을 받았고, 고문 의자에 1박 2일간 앉혀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혹독한 형벌을 당했습니다. 두 개의 전기 방망이로 한꺼번에 그녀의 유방 등의 부위에 전기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세 남자들이 동시에 그녀의 얼굴과 상반신 가슴과 등 부위를 가격하여 왕서우후이의 좌측 얼굴부위 협골(頰骨)이 분쇄성 골절을 입었고, 많은 피를 토했습니다. 나중에 폐 부위가 감염되어, 공안병원에 며칠간 입원하였고, 왕서우후이는 규칙적으로 사지에 강제 정맥주사를 맞았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했으며, 강제로 카테타를 삽입한 후 간호조차 하지 않아, 5박 5일간 움직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소변실금을 초래하였습니다.
2002년 6월 27일, 왕서우후이 일가족 세 명은 또 다시 뤼위안구 지국 정보과(政保科)에 납치되어 정양 파출소로 보내졌습니다. 왕서우후이는 전신이 묶인 채 하룻밤을 보냈고 나중에 불법으로 창춘시 제3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수갑과 족쇄를 차고 18일간을 지냈고, 1개월간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주입하였습니다. 그 후 성(省) 공안병원에 이송되어 팔다리가 묶인 채로 30여 일 동안 강제로 음식물을 먹였으며, 왕서우후이가 거의 숨이 끊어질 때야 비로소 석방했습니다. 같은 시기 정양 파출소에서 몇몇의 경찰은 류보양을 잔혹하게 학대하며, 손과 발로 차고, 가죽혁대로 입을 때리고, 밧줄로 묶어 머리에 비닐 보자기를 씌우고, 리우보양의 양 어깨와 등을 뒤로하게 한 후 수갑으로 두 손을 거꾸로 수갑을 채워, 몸을 공중에 띄워 흔들거나 혹은 위아래로 두 발을 세게 잡아 당겼습니다. 당시 형을 집행하던 경찰 위안다촨(苑大川)은 “나도 파룬궁 몇 명을 죽여 본적이 있어. 너희들을 때려 죽여도 나는 책임이 없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매번 형을 집행할 때, 모자의 참혹한 비명소리는 천지를 놀라게 했으며 천지신명 및 귀신마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2002년 10월 29일, 류보양은 창춘시 자오양거우(朝陽溝) 노교소로 이송되어 불법으로 2년간 노동교양을 받았습니다. 12월 경찰은 강제로 하루 종일 추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있게 하고, 저녁에는 잠도 자지 못하게 했으며 낮에는 또 강제 세뇌에 참가시켰습니다. 2004년 6월 노동교육 기한이 다 되었을 때, 노교소에서는 사람을 풀어주지 않고, 핑계를 대며 47일이나 형을 늘렸습니다. 류보양은 의과대학 졸업생으로 사람들에 대한 인의가 두터웠고,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하였으며 병원 업무도 해마다 최고였습니다.”
왕(王)여사는 거의 단숨에 류보양 모자의 처지를 설명했습니다.
◆ 48세의 창춘 시민 쑨수샹(孫淑香)은 6년 동안 모두 9번 불법으로 구금당했습니다. 다음은 그녀가 그 중 몇 차례의 불법 노동 교육 기간에 겪은 일부 경험을 자술한 내용입니다.
“2001년 하반기 어느 날, 싱예제(興業街) 파출소 바웨이(八委) 지역 경찰인 리전핑(李振平)과 한 남자가 우리 집에 와서는 남편과 제게 이혼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제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는 계속해서 저의 얼굴을 때려 안면이 부어올랐고, 눈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잠시 눈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혼할거냐, 안 할거냐 물으면서 만약 이혼하지 않으면 다시 노교소에 집어넣겠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그들의 계속적인 협박에 할 수 없이 저와 이혼했습니다. 이렇게 단란했던 한 가정이 정부에 의해 깨졌고, 지금까지 저는 밖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2002년 7월 초 아버지 댁에 갔을 때,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갑자기 뛰어 들어와 제게 쑨수샹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납치해 갔습니다. 이튿날, 창춘시 공안국 공안일처에서 저를 차로 약 2시간 동안 흔들리는 길을 태우고는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명의 경찰이 음산한 공포 분위기의 지하실로 저를 끌고 간 후, 머리에 씌웠던 것을 없앴고 동시에 8, 9명의 경찰이 들어왔습니다. 탁자 위에는 세 가지 사이즈의 전기 방망이가 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밧줄로 묶은 후, 다른 한쪽에서는 호랑이 의자라는 고문 도구를 내놓았습니다. 두 명의 경찰이 저를 호랑이 의자에 앉혔고 팔걸이에 수갑을 채우고, 손을 팔걸이 위에 놓게 하여 한꺼번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호랑이 의자의 팔걸이에는 서로 다른 사이즈의 구멍이 배열되어 있어 각기 다른 체형의 사람에게 적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노련하게 엄지손가락 두께의 철봉으로, 고문 의자 두 개의 팔걸이를 거쳐, 흉부, 복부 등을 지나 저를 고문 의자에 바짝 고정시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한 경찰은 형벌 도구를 가리키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봤지? 만약 네가 사실대로 불면 1시간 만에 내려올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형벌을 맛보게 될 거야. 류저덩(劉哲等 박해 피해자)는 어떻고? 여기서 살아서 걸어 나간 사람이 거의 없어.”
겉보기에는 점잖아 보이는 한 경찰이 저의 두 뺨을 때리면서 어떤 수련생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제가 알지 못한다고 하자, 그들은 철봉을 꺼내 두 손과 제 늑골 사이에 끼우고는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후 수련생들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제가 대답하지 않자 철봉을 꺼내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전기 충격을 가하면서 어떤 수련생들을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철봉을 저의 팔뚝 바깥쪽에서 머리를 지나 몸의 다른 한쪽까지 온 몸에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천천히 몸 전체에 전기 충격을 가한 후 또 다시 고압 철봉으로 바꿔 전기를 충전했습니다.
제가 여전히 말하지 않자, 그들은 철봉으로 저의 눈에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눈이 막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제가 여전히 말하지 않자, 그들은 저의 늑골 쪽에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또 다시 저의 앞 흉부에 전기 충격을 주었고, 전기 충격을 주면서 어떤 수련 수련생들과 연락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아파서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잘 아는 모든 수련생들의 얼굴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지만, 어떻게 해서든 단 한 사람의 수련생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의 수련생이라도 말한다면, 즉각 그를 붙잡아와 고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다시 철봉을 저의 입안에 넣고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입이 전기로 타 들어 갔습니다. 온 몸에는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전기 충격을 하면서 말하지 않으면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철봉을 다시 입안에 넣고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꼬박 하루밤낮의 고문으로 저는 이미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습니다!”
“2003년 초 저는 싱구이링(刑桂玲)의 집에서 잠시 거주했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무시무시하게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 문이 순식간에 부셔지고, 놀라움과 공포 속에 망치와 총을 든 한 떼의 경찰들이 집으로 뛰어 들어오며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움직이지마. 움직이면 죽어.”
그 후 우리는 뤼위안구 공안지국으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작은 감옥 안에 가두고, 저를 호랑이 의자에 묶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을 향해 때리기 시작했고 싱구이링도 때렸습니다. 가죽혁대로 그녀의 목을 묶자 그녀는 폐부를 찌르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저는 그들이 싱구이링을 때려눕히고, 넘어지면 다시 발길질로 일어나게 한 후 다시 때려눕히고, 발로 차면서 그녀에게 다른 수련생들과의 연락을 물으며 반복해서 고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혁대를 풀어 그녀가 숨이 쉴 수 없을 때까지 목을 졸랐습니다. 경찰은 으르렁거리며 “말하지 않게 해주지(죽인다는 의미).” 라고 했으며 싱구링은 고문을 받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단 한 명의 수련생도 말하지 않자 그들은 저를 고문하기 시작했습니다. 3일간의 고문 끝에 그들은 저를 제3간수소로 보냈습니다.”
“2003년 8월 4일, 저는 다시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저는 난관구(南關區) 공안지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얼굴이 온통 곰보 자국인 경찰이 저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다 들이박았습니다. 벽에 들이박아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는 다시 저를 호랑이 의자에 앉혔습니다. 두 손을 바짝 묶어두고 나서 한 경찰이 저의 팔을 으스러뜨렸습니다. 손은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들은 굴렁쇠로 저의 두 발목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굴렁쇠의 철봉을 밟아 굴렁쇠가 더 바짝 죄어지도록 하여 발목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우고 목 위로 바짝 잡아당겨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어 거의 질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못 견뎌 하는 것을 보면 다시 풀어주고, 다시 늦췄다가 다시 하며 이렇게 세 차례를 반복했습니다. 발목 위의 굴렁쇠에 철봉을 밟아, 굴렁쇠가 점점 조여져 고통이 극심했고 발목에는 이미 상처가 나서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제가 아파서 기절하면 그들은 냉수를 뿌려 저를 깨웠습니다. 그 후 저를 제3간수소로 보냈습니다. 저는 줄곧 단식하며 물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혼미해졌고, 27일째 이미 숨이 거의 끊어져 갈 때에야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지했습니다.”
◆ 창춘시에 사는 60세의 류수친(劉淑琴) 노인은 6년 동안 5차례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노교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노인은 아주 조용하게 우리에게 자신이 겪은 야만적인 고문 행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 체포된 것은 2000년 2월이었고, 경찰은 미친 듯이 때리고 발로 차며 경찰차에 오르게 한 후 바리바오(八里堡)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비합법적으로 15일간 감금당했습니다. 어떠한 법률 절차도 없이, 10여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후 가도(街道) 사무실과 파출소에서는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두 번째는 2000년 12월 31일에 베이징에 청원을 하러 갔을 때입니다. 저는 천안문 광장에서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파룬궁이 좋다는 의미)”라는 현수막을 들었는데, 천안문 경찰들이 철봉을 들고 허리부위를 가격하였고 강제로 경찰차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쉬안우구(宣武區) 간수소의 한 운동장으로 보내졌습니다. 엄동설한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바깥 바닥에 한나절을 앉아 있었고, 나중에 저는 1인실 지하 감옥과 같은 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벽은 온통 얼음장이었고, 경찰은 저를 발가벗게 한 후 사람을 시켜 호스로 몸에 물을 뿌리게 했습니다. 저는 벌거벗은 채 바닥에서 잠을 자야했고 덮을 것도 전혀 없었으며, 감옥 안의 변기통은 악취가 심했습니다. 매일 몇 명의 경찰들이 교대로 심문하였고 저녁에는 잠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38일간을 고문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2001년 12월 31일, 정부의 파룬궁에 대한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저와 몇몇 수련생들은 현수막을 들고 나갔다가 신고로 붙잡혔습니다. “610” 경찰은 계속해서 저를 때렸고 저녁 12시에 저를 제3간수소로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 경찰들은 주먹으로 저의 눈을 때렸는데 두 눈에 불똥이 튀었고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다시 저의 머리를 때리고 연달아 주먹을 몇 차례 날렸습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에 직면하여, 저는 그들에게 선악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경찰은 다시 죄수들에게 28kg의 무거운 족쇄를 가져오게 하여 저에게 씌우고 22일을 수감했고,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한 고문을 겪었습니다. 후에 경찰은 적지 않은 가산을 강탈한 후에야 저를 석방시켰습니다.
2003년 2월 28일, 제가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뤼위안 지국에서 한 무리의 경찰들이 또다시 저의 집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위안다촨(苑大川)이라는 경찰은 집 서랍을 전문적으로 뒤졌고, 4000여 위안의 현금 전부와 모든 수표를 남김없이 다 가져갔습니다. 그 중 한 경찰은 아들이 해외에서 가져온 향수를 자기 주머니에 넣어갔습니다. 위안다촨이 돈을 뒤지고 있을 때, 저는 그들의 야만적 강도 행위를 비난하였습니다. 위안다촨은 주먹으로 저를 때리고 나서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들은 멋대로 집을 뒤졌습니다. 어지럽게 집을 뒤지고 난 후, 저를 납치하여 뤼위안 지국 고문실로 데려갔습니다. 저에게 고문을 집행하기 위해 호랑이 의자에 앉히고 2시간 동안 고문한 후, 다시 가는 끈으로 묶은 후 경찰은 제 손을 등 뒤로 세게 묶었습니다. 앞가슴에서 등 뒤까지 여러 번 묶은 후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다른 한 무리가 저를 차에 태웠고, 경찰은 저의 털옷을 이용해 제 머리 위를 단단히 씌워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습니다.
약 20분을 달린 후, 어느 곳(나중에야 자오양 지국이라는 것을 알았다)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온통 각종 형벌 도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곳에 들어서자마자 저를 호랑이 의자 앞으로 데려가 왼손에 수갑을 채우고 십여 차례 때렸습니다. 제 손은 퉁퉁 부어올라 검은 보라빛으로 변했습니다. 끊임없이 수갑, 족쇄, 강철 파이프를 잡아 당겨 힘줄이 곧 끊어질 것 같았고 뼈가 부러질 것 같았으며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몇 차례 계속되었고 경찰은 제가 기절한 것은 본 후에 몸에 냉수를 뿌렸습니다. 제가 깨어나면 계속해서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죽었다 깨어났다 하기를 반복하며 1박 1일을 고문당했습니다. 경찰이 힘을 다해 수갑과 족쇄를 끌어 당겨 족쇄가 계속해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갈 때, 저의 손목과 발목은 피와 살로 범벅이 되었고, 바닥에는 온통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경찰은 저와 같은 노년 부녀자에 대해 비인도적인 고문을 가했고, 저의 팔, 손발, 다리의 모든 신경과 뼈는 벌어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며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3월 1일 그들은 저를 제3간수소로 보내, 저의 심장, 혈압이 모두 나빠서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검사하고 나서는 또 다시 노동 교양 2년을 선고했습니다. 혼미 상태에서 저는 헤이쭈이쯔 노교소로 이송되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옆에서 부축해 주어야 했습니다.
2대대 경찰 류롄잉(劉連英)은 제가 걸을 수 없는 척 꾀병을 부린다며 위에서 야만적으로 철봉으로 저의 다리, 가슴, 심장, 전신에 전기 충격을 가하며 저를 전향시키려 했습니다. 당시 이리원(伊麗文)이라는 죄수(그녀는 류롄잉과 관계가 좋았다)가 이를 보다 못해, 철봉을 뺏으며 “그만하세요. 이미 저 꼴인데.”라고 말했습니다. 류롄잉은 그제서야 전기 충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항상 저를 욕했고 전향공작에 능한 자들을 이용하여 저를 전향시키려 했고, 경찰들도 교대로 저를 전향시키려했습니다. 매일 업무가 끝난 후에도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강제 세뇌를 하였습니다. 제게 무슨 보증서를 했지만 제가 절대로 쓰지 않으면 매춘범을 이용해 저를 박해하였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24시간 동안 저를 떠나지 않고 엄격한 관리를 하였고, 저를 전향시키려 하였습니다. 거의 매일 매 순간 저를 때리고 욕했으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했고 말을 할 때면 트집을 잡아 저를 박해했습니다.
저는 매일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견뎌냈으며 거의 1년에 달하는 박해 기간 동안 저는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습니다. 몸은 마비되고, 팔은 잘 사용할 수 없었으며 진단 결과 저는 뇌경색에 뇌위축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일년 동안의 고문으로 이 꼴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단지 파룬궁 수련을 통해 좋은 사람이 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비인간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 말이 느리고 목소리가 가느다란 장즈쿠이(張致奎)는 조용히 자신이 창춘시에서 고문을 당한 경험을 서술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제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베이징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 때문에, 경찰에 붙잡힌 후 베이징 주재 창춘 판사처 공안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저의 두 손과 발을 묶은 후, 나무 몽둥이로 손과 발을 함께 꿰어 두 탁자 사이에 걸어두고 오가게 하였습니다. 몽둥이가 끊어져 제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함께 잡혀 있던 다른 사람들도 혁대로 구타당하거나 다시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몽둥이로 제 허벅지를 때리고 난 후, 우리를 창춘의 얼다오허쯔구(二道河子區) 공안지국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우리 십여 명이 들어가자 정보(政保) 과장이 저를 불러 바지를 벗게 했습니다. 당시 남녀가 모두 함께 있었는데 정보과장은 혁대로 제 머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당시 저는 머리가 뻣뻣했고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가 언제 베이징에 갔으며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저는 맞아서 기절했으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저를 때리고 난 후, 구두로 발을 밟고는 다시 구두로 저의 앞 발가락 끝을 뭉갰습니다. 그는 뭉개면서 한편으로는 저의 얼굴 표정을 살폈습니다. 저는 고통으로 땀이 흠뻑 젖었습니다.
저를 다 때리고 난 후 그는 다른 수련생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테베이(鐵北) 간수소로 보낸 후, 간수들은 범인들에게 지시하여 제 옷을 벗긴 후 때리도록 했습니다. 저를 발로 차서 화장실 벽에 부딪히게 했으며 제가 일어나지 못하자, 두 대야의 냉수를 몸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저를 발로 차서 팔과 다리에서 피가 났으며 다리에는 커다란 상처가 생겼습니다. 1개월 후 저를 풀어주었지만 아무런 수속도 없었습니다.”
99년 11월 말, 저는 베이징 최고인민법원에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최고법원 실무자는 경찰을 불러 저를 체포하여 산둥성 자오위안(招遠)의 베이징 판사처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저의 혁대를 풀어 제가 바지를 잡고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걸으면서 저를 때리며 베이징 주재 자오위안 판사처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계속해서 가죽 혁대를 빼서 하룻밤을 때렸습니다. 도착한 다음날, 저를 자오위안으로 돌려보내, 자오위안시 유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수들을 시켜 저를 때리게 했지만 나중에 제가 부지런히 일을 하자 죄수들도 감명을 받았는지 저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 특별히 벙어리 죄수를 보내 저를 때리게 했습니다.
어느 날, 경찰은 저에게 철문의 작은 구멍으로 머리를 빼도록 하였습니다. 경찰은 발로 제 머리를 밟았고 저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다른 감방에 있던 수련생들이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자, 후에 저와 여동생을 신좡진(辛庄鎭) 공안지국으로 보냈습니다. (99년 7월 20일 파룬궁 탄압 이후 우리 가족은 온 식구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저와 제 여동생을 각각 계단 아래 어두운 작은 방안에 가두었습니다. 작은 방안은 너무 좁아 몸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고, 단지 매일 저녁에서야 한번 화장실에 갈 수 있었습니다. 매번 10일간 갇혀 있다가 다시 자오위안 유치장에 보내져 1개월 수감되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기를 6차례 반복하여 우리 형제자매들은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2000년 국경절(10월 1일), 저는 창춘 문화광장에서 현수막을 들었습니다. 당시 국가신문매체들은 전부 거짓말을 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梁) 처장이라느 경찰과 일부 경찰들이 저의 윗옷을 벗겨 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수갑으로 손을 뒤로하여 채우고는 위층에서 저를 아래로 끌어내려 차로 옮겼습니다. 대략 2시간 동안, 저는 차가 시 외곽으로 멀리 나갔다고 느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들은 저를 한 방으로 부축해 들어갔습니다. 머리 위에 씌웠던 옷을 벗기자, 음산한 기운을 느꼈고 방안에는 고문 의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산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양 처장과 그들은 저를 발가벗기고 고문 의자 위에 앉히고는 제 손을 나무 몽둥이 양 끝 쪽 등 뒤로 묶고, 허벅지와 종아리 앞쪽에 가로로 철봉을 끼우고, 철봉의 양끝은 고문 의자에 고정시켰습니다. 이렇게 저의 온 몸을 고문 의자에 꽁꽁 묶고 움직일 수 없게 하였고, 두발은 굴렁쇠에 고정시켰습니다. 이때 양 처장은 1척 길이의 날카로운 칼을 꺼내어, 자신의 바짓가랑이에 앞뒤로 두 번씩 비벼댄 후 탁자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는 표독스럽게 저를 향해 말했습니다. “장즈쿠이,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오늘 여기서 너를 죽인 후, 구덩이를 파서 묻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양 처장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적어도 3명의 공안이 전기충격기를 충전하기 시작했고, 다른 두 명의 경찰은 등 뒤에 고정해두었던 저의 두 손을 잡고 뒤에서부터 머리 정수리를 거쳐 앞쪽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뼈가 덜덜거리며 끊임없이 울리는 소리만이 들렸고, 제 뼈는 이미 부러졌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자 저는 질식할 것 같은 고통에 더는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후 또 다시 철 물통에 저의 머리를 묶고, 나뭇결 철봉으로 물통을 내리쳤습니다. 맹렬한 진동과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제 머리는 터질 듯 했습니다.
기나긴 고통 이후, 경찰은 우리 수련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백주(白酒)를 병 채로 뱃속에 쏟아 넣었으며 또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담배꽁초로 저의 등 뒤를 온통 지졌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저는 기절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차가운 물로 저를 깨우고 난 후, 마지막으로 촛불을 붙여 촛불로 살이 탈 정도로 등을 지진 후에야 촛불을 껐습니다. 고통으로 저의 몸은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렸고, 고문 의자가 우지직 우지직 하며 저를 흔드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제 몸은 어느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생식기에 충격을 가했고 이어 쇠몽둥이로 그곳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저는 쓰러졌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다가 흐릿하게 깨어났습니다.
하룻밤의 혹독한 고문을 겪은 후, 저의 얼굴은 원래보다 몇 배나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온 몸은 피와 살로 얼룩져 있었고, 완전히 사람 꼴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고통으로 굴렁쇠를 움직이면 발목 부위의 피부와 살이 닳고 헤어져 뼈와 힘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깨어난 것을 보고 다시 저를 밖으로 끌고 나가 밖의 영하 십여 도의 날씨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차가운 물을 뿌리고 저를 밖에 버려두었습니다. 그들은 30분이 지난 후 다시 나와 제가 살아있는지 살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날이 밝고 저의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하자, 경찰은 저를 시국(市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시국 안에는 작은 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각 방 안에는 고문 의자가 있었고 여자 수련생들이 앉아 있었으며 거의 의식을 잃은 채 하반신을 벌거벗기거나 단지 속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시국에서는 자오위안에 전화를 걸어 “우리가 당신들이 요구하는 대어를 낚았습니다. 축하합니다.”라고 말했고, 끝으로 저를 테베이 유치장으로 보냈습니다. 테베이 유치장에서도 계속해서 고문을 받다가, 저는 5일간 단식을 했고 그제서야 그들은 고문을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유치장에서 40일 동안 가둔 후에, 다시 저를 자오양구 노교소 5대대로 보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십여 명의 수련생들과 함께 단식을 했습니다. 이 5대대 안에는 500명의 수련생들이 있었습니다. 대대장은 우리가 금식하는 것을 보고 노교범들을 이끌고 와서 손을 보게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정말로 공포스러웠습니다.
마지막에 단식하는 우리 수련생들은 1대대로 끌려갔습니다. 1대대는 노교소에서 수련생들을 가장 흉악하게 박해하는 곳으로, 죄수 쉬후이(許輝)가 종종 수련생들을 학대했습니다. 한 육십여 세의 수련생은 원래 처장급 고급간부였는데, 죄수복도 입지 못한 채 맞아서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해서야 비로소 폭행을 멈췄습니다. 저는 부상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당시 그들은 저를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제 몸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는 다시 저를 고문했습니다. 매일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조용히 옷을 입고 복도로 가서 서 있어야 했습니다. 모든 수련생들에게는 담당 죄수가 있어, 수련생들 사이에 이야기를 할 수 없게 했으며 만약 이야기를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에 때려눕히거나 판자에 앉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전 내내 고개를 들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쉬후이와 수하의 몇몇 죄수들은 매일 아침을 먹은 후, 딱딱한 밑창 신발로 갈아 신고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생이 움직이면 바로 그들은 내려와 죽도록 때렸습니다.
제게는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오후에도 저녁에도 이렇게 지내야하고 한 밤중에도 이렇게 지내야 하다니! 수련생들이 잠이 들고 나서도 약간의 소리만 나면, 바로 심한 매질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수련생들은 감히 잘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저녁에 기침이 그치지 않자, 그들은 저녁 내내 저를 때렸습니다. 기침조차 아예 못하게 했으며 저녁에는 감히 물조차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예 수련생들이 저녁에 화장실을 못 가게 하려고 말입니다.
쑤이푸타오(隋福濤)라고 하는 20여 세의 한 수련생은 옷에 사부님의 경문을 끼워놓았었는데, 죄수들이 스패너로 몸에 50여 번을 찍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 죽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정말로 참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갔는데, 돌아온 후 쉬후이는 저를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렸습니다. 발로 저의 신장을 걷어차고, 발끝으로 신장을 비벼대, 저의 온몸은 며칠 동안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저의 첫째 여동생 장수친(張淑琴)은 10년 형을 선고 받았고, 매부는 3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9살의 어린 아이는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했기 때문에 “610”에 의해 학교에서 제적당했습니다.
저와 왕래하던 수련생들 중 8, 9명은 무참하게 맞아 죽었습니다. 예를 들면 왕서우후이(王守慧), 류보양(劉博揚), 류하이보(劉海波), 류청쥔(劉承軍), 쉬수샹(徐樹香), 왕커페이(王克飛), 위리신(于麗新), 덩스잉(鄧世英) 등입니다. 고문으로 죽은 어떤 수련생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35살 난 둘째 여동생 장수춘(張淑春)은 공안이 그녀를 붙잡아갈 때 위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부러진 늑골이 내장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다리와 팔 모두가 부러져, 현장에서 기절하였습니다. 당시 둘러싸고 있던 군중들이 많았고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610” 경찰은 그들 부부가 싸움을 하다가 이혼을 하겠다고 소동을 피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른바 “요주의 대상” 이었기 때문에 공안에 의해 공안 병원 응급실로 끌려갔습니다. 결국 병원에서는 굳이 구급조치를 할 필요가 없으며 파룬궁 수련생들은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여겨 경찰들은 정말로 그녀를 밖에 버려두었습니다. 나중에 마음씨 좋은 사람이 살려주고 난 후, 공안은 또 다시 도처에 그녀를 지명수배 했습니다.”
◆ 왕위환(王玉環)은 6년 동안 창춘 경찰에 의해 9차례나 불법 구금과 노동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제가 말씀드려도 믿기 힘드실 겁니다. 노교소에서 간수들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리들이 잠자는 자리를 개당 2000위안에 팔았습니다. 일단 잠자리를 산 죄수는 “서있는 갈치”처럼 고생할 필요 없이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었습니다. 잠자리 하나의 사용기한은 1개월로, 잠자리를 산 죄수들이 많을수록 수련생들이 잠자리 자리는 점점 좁아져 고통을 받았습니다. 2000년 8월 저는 헤이쭈이쯔 노교소에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저를 강제로 전향시키기 위해 택한 방법은 매일 18시간씩 해외로 수출하는 노동을 시켰고, 노동 시간 이외에는 이른바 사상 보고서를 쓰게 하였습니다. 만약 쓰지 않으면 죄수들에게 맞거나 욕을 먹었습니다.
6대대의 간수 쑨밍옌(孫明燕)은, 저를 전향시키기 위해 머리맡에 앉아 전기 방망이로 저의 머리, 얼굴에 1시간 여 동안 전기 충격을 가해 머리카락이 타고 얼굴과 목이 끈적거렸습니다. 또 구타당한 제 얼굴과 몸은 모두 부어올랐습니다. 새해가 가까워질 무렵, 저는 다시 2대대로 이송되었습니다. 심한 노역에 전기충격을 당한 저는 온 몸의 근육이 늘어졌습니다. 2001년 11월 석방되었을 때, 손으로 밥그릇도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610”이 저를 풀어줄 때 도리어 2000위안을 요구했습니다.
2002년 3월 5일, 수련생들이 텔레비전에 방송을 삽입하여 파룬궁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중앙 “610”은 저희 창춘 지역에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경찰의 체포 대상이었습니다. 당시에 모두 5000여 명의 수련생들이 붙잡혔고 유치장의 모든 호실에는 적어도 50여 명씩 잡혀 있었습니다. 각 호실 내 화장실에 감금된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었습니다. 3월 11일, 저는 창춘 공안 일처(一處)에 붙잡혔습니다. 저는 난관구(南關區) 차이선먀오(財神廟) 부근에 있던 한 파출소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감옥의 높이가 1.3m에 불과하여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었습니다.
3월 12일 저녁, 형경 대대 일처의 가오펑(高鹏)과 장헝(張恒) 등의 사람이 저를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손을 등 뒤로 묶고, 군용 비옷 주머니를 제 머리와 목에 씌우고는 주머니 끈을 꽉 조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저는 호흡마저도 매우 곤란했습니다. 그들은 밧줄로 제 온몸을 꽁꽁 묶고 차 트렁크 안에 넣은 후에, 산 속에서 저를 풀어주었습니다. 여기는 전문적으로 수련생들을 고문하기 위한 장소로, 이곳에서 많은 수련생들이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고, 류하이보(劉海波)도 이 곳에서 옷을 발가벗기 채 꿇어앉은 자세에서 경찰이 기다란 전기 방망이로 항문에서부터 그의 오장을 끼워 전기고문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류하이보는 당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뤼위안구 병원의 의사인 류이(劉義)는 30여 세로, 이곳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이곳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23명의 수련생들이(적지 않은 수련생들의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죽었고, 죽임을 당한 수련생들은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혔습니다. 비교적 예쁘게 생긴 여대생 수련생 샹민(項敏)은 붙잡혀 온 후 여기 경찰들이 한편으론 전기 충격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 그녀를 성폭행했다고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번 창춘의 대대적인 체포로 인해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사람이 거의 3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제가 경찰에 의해 2시간 걸려 이 산속의 소굴로 보내졌을 때,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몇 명의 경찰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연달아 때려 제 몸은 비틀거렸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나무에 부딪혔고, 경찰은 마구 욕을 해대며 오늘 저를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대략 10여 분을 걸어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위아래로 어느 정도 걸어 한 방안에 도착했습니다. 머리를 가렸던 군용 비옷 주머니를 거두고, 경찰은 “오늘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마. 여기서 걸어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략 6평방미터 가량의 작은 방안에 작은 탁자가 놓여있고 전기 방망이 세 개와 밧줄, 침대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침대는 경찰들이 우리를 고문하다가 피곤할 때 휴식하면서 저희들을 욕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문 의자(호랑이 의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경찰들이 방안에서 고문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바람 소리만 쓸쓸히 처량하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이어서 몇 명의 경찰이 저를 고문 의자로 끌고 가 잔인하게 고문 의자에 앉혔습니다. 손에 수갑을 채우고 등 뒤는 묶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양 팔을 고문의자 뒤로 묶고, 앞가슴과 복부를 고문 의자 양쪽의 철봉을 가로 질러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발목에는 두 개의 큰 굴렁쇠를 씌워 고정시킨 후, 경찰은 5분마다 한번씩 참혹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때마다 매번 뒤로 묶인 팔이 앞뒤로 떨렸고, 뼈가 탈골되는 소리가 들렸으며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거의 저를 혼절시켰습니다. 일시적으로 땀과 눈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결사적으로 제 머리를 사타구니 쪽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가슴과 복부가 철봉에 의해 고문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경찰들의 힘과 저를 고정시키는 힘은 목을 부러뜨릴 정도였고, 가슴과 복부는 철봉 때문에 대단히 고통스럽고 아파서 매초마다 저는 거의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또 밧줄로 발목 위의 굴렁쇠를 고정하고 난 후 뒤쪽으로 굴렁쇠를 세게 잡아당겨 발목이 잡아당겨져 매우 아팠습니다.
동시에 다른 경찰들은 힘을 다해 저의 머리를 사타구니 쪽으로 향해 붙잡아 온몸은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5분마다 한번씩 이런 가혹한 형벌을 반복하는 가운데, 땀과 눈물 상처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저의 머리와 옷을 적셨습니다. 나중에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저는 여러 차례 기절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차가운 물과 끓는 물을 뿌려 저를 깨웠습니다. 뜨거운 물은 이미 손상된 저의 피부를 더 뜨겁게 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러한 끝없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그들이 총으로 저를 죽여주기를 희망했습니다.
4시간 동안 고문 의자에서 고문을 가한 후, 그들은 철통으로 거의 죽어가는 제 얼굴을 가리고는 7명의 경찰이 한 사람당 세대의 담배를 피우고 통 안으로 1시간 동안 뿜어댔습니다. 저는 기침을 하며 기절했고 그들은 다시 찬 물로 저를 깨웠습니다. 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았을 때 그들은 주먹으로 저의 머리, 얼굴, 코, 이를 때린 후 피가 나게 했습니다. 저의 앞니는 2개가 빠졌고 얼굴도 부어오르고 검보라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가는 대나무 방망이로 저의 두 귀를 쑤셔대 제 귀는 반 달 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가혹한 형벌을 진행하고 난 후 새벽 2시에야 그들은 피곤해서 잠들었습니다.
2002년 3월, 17일 동안 저는 3차례 소굴로 끌려가 엄중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고문은 받을수록 더 가혹해졌고 뒤에 두 번은 한밤중이었습니다. 매번 7, 8명의 경찰이 호실로 들어와 저를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매번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돌려보내졌습니다. 그 가운데 한차례는 경찰이 다른 사람들이 제가 고문을 당해 살과 피가 낭자하고, 피범벅이 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두꺼운 털옷을 입혔으나, 붉은 피가 빠르게 옷에 스며들어 경찰은 다시 한 겹의 더 두꺼운 털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붉은 피가 털옷을 다시 젖게 했습니다. 그때의 공포와 수련생들에 대한 걱정은 이곳에 수감되어 있는 수련생들로 하여금 매일 저녁 잠들지 못하게 했고, “610” 블랙리스트에 오른 모든 사람들은 매일 이른바 “심문”을 당했습니다. 매번 몸을 꽁꽁 묶고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두 손을 뒤로 묶인 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 산속의 소굴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고문을 받은 후 몸이 이미 완전히 못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원래 신체검사를 통해 간수소에 수감할 수 없는데 제3간수소는 기만당해 저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성 병원과 군대삼원(軍大三院)에 보내 검사한 결과 저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후 저와 궈솨이솨이(郭帥帥)라는 수련생은 감옥 병원으로 보내져 계속 박해를 당했습니다. 병원에 들어간 후 저와 그녀는 곧 침대에 묶였고, 그들은 제게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했습니다. 지금 저의 두 다리는 모두 마비되었습니다. 꼬집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발은 오랫동안 차갑습니다. 이곳에서 궈솨이솨이는 강제로 2달간 음식 주입을 당했고 강제로 호스를 꽂아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생 장융(姜勇)은 우리와 함께 이곳에 들어와서 6, 7개월을 이곳에서 박해 받다가 죽었습니다. 장융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은 후, 매일 커다란 호스로 피를 뽑았습니다. 결국 장융은 극도로 허약해졌고, 거의 숨이 끊어질 듯 하였습니다. 후에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으로 결국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직접 한 사람이 박해를 당하다가 죽는 과정을 목격했는데 보기에도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습니다! 궈솨이솨이는 음식물 주입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1미터 반의 고무관을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뱃속의 고통으로 침대 위에서 굴러대자 감옥 의사는 궈솨이솨이가 나가면 증거가 남을까 두려워 그녀를 더욱 잔혹하게 대했습니다.
경찰과 남자 죄수는 궈솨이솨이와 저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를 보면서 궈솨이솨이를 박해했던 방법을 제 몸에도 썼습니다. 그 중 한 감옥 의사는 손으로 궈솨이솨이의 생식기를 끄집어냈습니다. 극도의 고통스런 고문으로 그녀는 다시 작은 자루를 삼켰습니다. 그 결과 뱃속은 더욱더 아파서 고통으로 침대를 대굴대굴 굴렀습니다. 감옥 의사는 칼로 그녀의 배 안에 든 것을 꺼내,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열어서 다 연후 다시 꿰맸습니다. 그들은 결국 생명이 위독한 궈솨이솨이를 집으로 돌려 보냈지만 그녀의 심신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 감옥 병원에 들어왔던 자오샤오친(趙小琴)은 “610” 형경(刑警)이 기절하도록 때린 후 건물 위층에서 아래로 집어던졌습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말을 할 수 없으며, 사람이 멍청해졌고 머리에는 밥공기만한 혹이 생겼고 왼쪽 팔은 절단 당했습니다. 아래층으로 던져진 후, 다시 감옥 병원으로 보내져 계속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감옥 의사는 팔을 절단한 그녀에게 깁스를 했습니다. 여름 내내 깁스를 한 팔에서는 관리를 해주지 않아 구더기가 생겨났으나, 멍청해진 자오샤오친은 바보처럼 웃거나 울기만 했습니다. 저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만행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우리 여성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큰 대자로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딱딱한 나무판자 침대 위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벗은 몸으로 26일간 묶여 있어야 했으며 경찰과 감옥의사 심지어 남자 죄수들로부터도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저를 다시 제3간수소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간수소에서는 제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화가 나서 저를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저를 제3간수소 철문에 대여섯 시간이나 매달아 둔 후에야 다시 저를 감옥병원으로 보내 고문을 가했습니다. 병원에 돌아온 후 저는 계속해서 50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감옥 의사는 칼로 저의 정맥을 열고는 강제로 정맥 주사를 놓았습니다. 피가 계속해서 흐르자 바닥과 침대가 모두 피로 젖었습니다.
감옥 의사와 경찰은 이미 선혈이 낭자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다리가 부어서 너무 뚱뚱해졌고 발은 거의 못쓰게 되었습니다. 감옥 의사도 저의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10여 병의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 맞았으며, 간호도 없었고 대소변은 침대 위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몇 십일 동안 줄곧 소변에 젖어서 지내는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수액을 주사할 때는 단식으로 혈관이 이미 말라붙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과 주임은 정맥 주사를 손으로 몇 번 흔든 후 강제로 혈관에 넣었고 이 압력으로 인한 고통은 저를 여러 차례 혼절시켰습니다.”
◆ 창춘시 파룬궁 수련생 양광(楊光)의 경우는 더욱더 비참합니다! 저는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분이 제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 한 단락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당신께 진실을 반영하고 싶습니다.
양광은 지린성 창춘시 사람으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류 때문에, 2001년 1월 불법으로 체포당했습니다. 2002년 3월까지, 창춘시 공안국 일처 양(楊) 처장 및 그 수하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몇 차례 가혹한 형벌과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문 의자, 약속의(온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사지를 꺽어 온몸의 관절을 망가뜨리는 잔혹한 고문도구), 대(大)자로 매달기, 비닐봉지로 질식시키기, 강제로 술을 부어 넣는 등등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어떤 때는 30에서 40여 시간 연속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왼쪽 귀는 맞아서 멀었고, 당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서 불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불법적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양광은 당시 지린성 감옥으로 끌려갔고, 지린 감옥 특별 구역에 수감되었습니다. 양광은 현재 다리를 절고 있으며 발가락은 썩은 후 변형되었고 팔도 기능을 상실했으며 가슴에 물이 차고 신장 기능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하반신 마비까지 겹쳐 언제든지 생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양광은 지린 감옥의 이른바 “나체 구역”에 수감된 후, 일년 내내 하반신에 바지를 입지 못한 알몸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하반신 마비로 인해 대소변을 처리하기가 불편하자 죄수들은 그에게 “특별히 제작”한 간편한 손수레를 주었습니다. 손수레는 사방을 철관으로 용접한 것으로, 주위는 목판이었으며 엉덩이로 앉는 부분은 원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는 4개의 작은 바퀴가 달려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대소변을 볼 때, 죄수들은 특별 제작한 이 손수레를 끌고 와서 그에게 스스로 볼일을 보도록 했고 아무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손수레의 사방은 목판이며 양광은 손을 잘 쓸 수 없었고 아예 엉덩이를 쭈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매번 대변을 본 후에는 닦지도 못해 일년 내내 이상한 냄새와 더러운 분뇨 속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와 감옥의 정신병 죄수, 맞아서 다친 형사범, 스스로 생활 능력을 상실한 죄수들은 추운 겨울이든 더운 여름이든 상관없이 일년 내내 태양을 볼 수 없는 나체 구역에서 힘겨운 생활을 했습니다. 생활 여건은 극도로 열악했고 잠자리도 채 60cm가 안 됐으며 식사도 극히 열악하여 반찬에서는 아예 기름기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샤워를 할 때는 그를 물이 있는 방에 던져두고 물 호스를 전신에 쏟아 붓고 못이 달린 대걸레로 몸을 대충 닦는데 이름하여 “미용 샤워”라고 불렀습니다.
1년 4계절 항상 이렇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린 감옥은 여전히 양광을 “전향” 시키기 위해 핍박했습니다. 양광이 여전히 신념을 버리지 않자, “작은 우리”에 가둬 핍박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초래하였습니다. 2004년 12월이 되어서야 창춘 테베이(鐵北) 감옥 특별감시구역으로 이송되었으나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으면서 매달 가족들에게 1천여 위안의 치료비를 내도록 했습니다.
양광의 집에는 86세의 노모만이 있을 뿐인데, 지금까지 자기 아들이 고문을 받아 이 꼴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처연하게 “샤오광(아들을 가리킴)은 좋은 사람이야. 그는 도대체 어디에 있지? 나는 아들이 보고 싶어!” 라고 묻습니다. 양광의 아내는 강제로 이혼을 당해, 그의 가족 중에는 수입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양광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이중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양광의 친척들은 양광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으나, 지린 감옥과 성(省) 사법청, 감옥 관리국에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 있습니다.”
◆ 랴오닝성 다롄(大連)의 창쉐샤(常學霞)는 매우 얌전한 아가씨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우리에게 자신이 노교소에서 탄압받은 경험을 구술했습니다.
“첫 번째 잡혀간 것은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다롄 마약치료소로 보내져 39일간 수감된 후 풀려났습니다. 이때 아무런 수속도 없었습니다. 2003년 1월, 그들은 저에게 다시 강제 전향를 진행하여, 저를 작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작은 감옥에는 다양한 형벌 도구가 있었는데 약 십여 평방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안에는 창살로 된 우리가 있었습니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탄압을 주관하는 대대장 완야린(萬雅琳)은 죄수 몇 명에게 저를 철 우리에 가두게 지시한 후 손을 매달고 발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매달아 두었습니다.
완야린은 죄수들에게 “나란히 서봐. 잘 혼내줘.”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죄수들은 이리저리 제게 달려들어 손과 발로 치고 때리며 머리와 발 구분 없이 마구 때려 저는 기절했습니다. 기절한 후에 그들은 저를 놓아주고 나서 다시 발로 얼굴을 차고 손을 밟아 힘껏 으스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거짓으로 기절한 척 한 게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깨어난 이후, 왼쪽 팔은 이미 움직일 수가 없었고 팔은 이미 탈구가 되었습니다. 저를 고문하는데 돕지 않은 죄수들은 완야린이 그들을 다른 데로 전출시켰고 게다가 형기를 늘렸습니다. 나중에 저는 다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제 속옷 안에는 사부님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 얼굴에 사부님을 욕하고 대법을 욕하는 말을 쓴 후 나무판으로 저를 때렸습니다.
나온 지 1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 맞아서 생긴 멍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여전히전향하지 않자 그들은 제 몸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게 옷을 모두 벗기고 죄수 몇 명을 시켜 손으로 유두를 쥐거나 음모를 움켜잡고 입으로는 계속해서 저급한 말을 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여전히 전향하지 않는 것을 보자 수조를 닦는 더러운 솔로 저의 질을 쿡쿡 찔렀고 아래에는 물 한 대야를 떠놓고 쿡쿡 찔렀던 솔에 피가 묻어나는지를 살폈습니다. 피가 나지 않자 다시 신발을 닦는 솔로 바꿔서 저의 질을 미친 듯이 찔러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노교 기간에 더 이상 수련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양원(教養院)에서 제가 겪은 박해가 가장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왕리쥔(王麗君)이라고 하는 여성 수련생은 이미 작은 호실에서 3차례나 고문을 당했습니다.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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