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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 반박해 장거를 촬영한 통역원

【정견뉴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이다”,“파룬궁 박해를 중지하라.”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수련생들을 잔혹하게 탄압한 처음 몇 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광경을 늘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대의에 따름으로써 천안문을 찾은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감동시켰다. 이 소중한 역사 기록이 남게 된 것은 대부분 당시 갓 대학을 졸업한 여자 통역사의 현장 촬영덕분이다. 그녀는 이 자료를 해외의 많은 언론에 전송하고 전시했다. 그녀의 이름은 전수로(田秀露)다.

북경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

최근 전수로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일들을 회상했다.

전수로는 1995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1999월 7월 20일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북경에서 번역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안문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의 청원장면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2001년 중공에 의해 4년 판결을 받았고 여러 지역을 거치며 박해를 당했다.

전수로는 천안문 광장에서 파룬궁 반(反)박해를 기록한 잊을 수 없는 경험에 대해 토로했다. 당시 일부 중국 수련생들이 북경에서 외국 언론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거행해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 이후 파룬궁이 받은 잔혹한 탄압에 대해 폭로했다. 이후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안문광장을 찾아가 평화적인 청원활동을 펼쳤다.

2000년 10월 1일 연휴 기간 천안문은 만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청원하는 장소로 변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잇달아 플래카드를 펼치고 “파룬따파하오, 이홍지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 등의 전단지를 뿌리거나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이 쓰러지면 다른 쪽이 일어나는 식으로 일파만파 연결되었다. 사진은 천안문에서 경찰이 청원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 장면

그녀는 회고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수련생들은 생활 조건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북경 여관에서는 도처에서 수련생들을 찾는 검문이 있었고 또 북경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지 모르는 상태에서 수많은 수련생들이 거리나 지하도, 정원, 지하철역, 기차역 광장 등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사실 북경 곳곳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련생들이 있었는데 풍찬노숙하는 처지라 환경이 아주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심신의 승화가 아주 빠름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 염원은 대법(大法, 파룬궁)을 위해 바른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청에서는 그들의 상방을 불허했고 오직 파룬궁 수련생들이 상방하기만 하면 즉시 체포했으며 구류나 벌금을 물리거나 하여 조금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성에서 왔으면 그곳으로 보내어 처리하게 했고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천안문에서 수련생들의 반박해 과정을 기록

전수로의 소개에 따르면 2000년 무렵 중국 각지에서 계속 청원하러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1999년 7월 20일 이전에 우리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청원하기 위해 신방국, 신방사무실 또는 법원을 가기도 했는데 모두 법에 규정된 정상적인 청원통로들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북경 전역에서 청원통로가 전부 막혔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어지자 수련생들은 천안문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안문은 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곳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받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고 국제사회에 그런 인권탄압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국제사회를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2000년 연말이 되자 북경의 날씨는 매우 추웠으며 천안문에는 관광객도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천안문 광장에는 사복 경찰이 매우 많아서 광장도처를 어슬렁거리며 각지의 활동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광장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시로 대법제자가 될 수 있고 어쩌면 수시로 플래카드를 펼칠 수도 있었습니다.”

2000년 10월 1일 연휴 기간 천안문은 만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청원하는 장소로 변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잇달아 플래카드를 펼치고 “파룬따파하오, 이홍지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 등의 전단지를 뿌리거나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이 쓰러지면 다른 쪽이 일어나는 식으로 일파만파 연결되었다. 사진은 천안문에서 경찰이 청원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 장면

“사복 경찰들이 몹시 경계해서 약간의 움직임만 있어도 즉시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했습니다. 이것이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광장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고 사악이 충만했습니다. 그곳에는 살기가 숨어 있었고 바람소리만 들려도 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수로는 파룬궁 수련생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선량하며 온화했기 때문에 경찰은 단지 파룬궁 수련생임을 알면 짐을 조사하고 연행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로 사용한 것은 바늘구멍처럼 생긴 몰래 카메라였습니다. 천안문에 경찰이 관광객보다 많았기 때문에 공개촬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경찰이 수련생을 체포할 때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경찰이 직접 그들로부터 카메라 필름을 빼서 버리거나 찍은 사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몰래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고 옷에 구멍을 뚫어 비밀리에 촬영했습니다.”

2000년 10월 1일 연휴 기간 천안문은 만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청원하는 장소로 변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잇달아 플래카드를 펼치고 “파룬따파하오, 이홍지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 등의 전단지를 뿌리거나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이 쓰러지면 다른 쪽이 일어나는 식으로 일파만파 연결되었다. 사진은천안문에서 경찰이 청원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 장면

당시 그녀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었던 것은 한 팀의 수련생들이었다. “몇 명인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플래카드를 펼치자 수십 명의 사람들(사복경찰)이 달려가 그들을 구타했는데 발로 차고 밟고 곤봉으로 때렸습니다. 나중에 더 많은 사복 경찰이 와서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함소리는 매우 컸으며 ‘파룬따파하오,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 등을 외쳤습니다. 경찰은 끊임없이 그들을 때렸고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맞아 땅에 쓰러졌음에도 여전히 끊임없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들의 고함소리는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영혼에 큰 진동을 일으켰습니다.”

기록된 장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

천안문에서 사진 찍기는 매우 쉽지 않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했기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이 플래카드를 펼치려면 아주 빨리 펼쳐야 했다. 어떤 사람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만 미처 플래카드를 펼치기도 전에 경찰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제가 모든 장면을 다 찍을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구타장면이 있었지만 가장 심하게 맞을 때는 제때에 찍지 못했습니다. 광장 전체에서 어느 곳이든 수시로 단번에 파룬따파하오가 외쳐 나오고 곧이어 경찰이 이리떼처럼 사방에서 뛰쳐나와 수련생들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잡거나 그들의 입을 막고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다음 경찰차가 사방에서 휙휙 달려왔습니다. 때로는 현장에서 비교적 거리가 멀어 제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면 파룬궁 수련생은 이미 바닥에 넘어져 있거나 이미 경찰차에 잡혀가 있곤 했습니다.”

그녀가 촬영하던 기간에 경찰이 파룬궁수련생을 구타하는 이런 장면은 2000년에서 20001년 사이에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청원 후 체포되어 박해로 불구가 된 수련생들

전수로는 천안문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의 반박해 사진을 찍은 것 뿐만아니라 또한 북경에서 박해로 불구가 된 많은 파룬궁 수련생을 만났다. 그녀는 또 그들의 몸에 발생한 일들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남겼다. 이 과정 때문에 그녀는 청원하러 온 더 많은 수련생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북경 수련생들은 외지에서 청원하러 오는 수련생들을 위해 외진 곳에 방을 빌려주곤 했다. 남녀 각각 한 칸을 썼고 함께 법공부와 교류를 했다. 그곳에서 전수로는 한 청년을 만났는데 당시 발가락 열 개가 모두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된 후 박해를 당해 발에 동상을 입었고 발가락이 모두 새까맣게 변했습니다. 당시 즉시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웠고 그러자 경찰도 겁이 나서 그를 길거리에 내다 버렸습니다. 이에 다른 수련생들이 그를 구해 데려온 것이죠.”

“그의 말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심한 박해를 당했음에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대법에 대해 바른 믿음과 낙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제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전수로는 또 어느 호텔에 가서 중공의 박해에 단식으로 항의하던 한 여자 수련생을 촬영한 적이 있다. 당시 여자 수련생이 3개월 이상 단식으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고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나 볼 것 같은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직접 목격한 후 저는 마음속으로 큰 떨림을 느꼈습니다.”

전수로는 또 다른 예를 들었다. 한 청년이 경찰에 의해 버려졌는데 감금기간에 폐를 맞아 크게 다쳤다. 그는 기침을 심하게 했으며 폐를 크게 다쳐 이미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찾아갔을 때 그는 담요 위에 누워 있었는데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는 한달 후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제가 그를 봤을 때 꼭 60대노인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겨우 30대 청년임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박해가 매우 많았습니다.”

청원하는 수련생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각지에서는 파룬궁 수련생을 구류 15일 혹은 30일에 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에 들어서 청원인원이 너무 많아지자 중공은 그들을 박해하기 위해 직접 노동교양소에 보내기 시작했다. 노교소에서는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3년까지 노동교양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장쩌민을 고소

2013년 전수로는 중국을 떠나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거기서도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파룬궁이 무고하게 박해받는 진상을 알렸다.

2015년 5월부터 지금까지 이미 20여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과 가족들이 중국 최고법원(대법원)과 최고검찰청(대검찰청)에 실명으로 파룬궁 박해 원흉인 전 중공두목 장쩌민을 고소했다. 혐의는 집단학살죄, 반인류죄 등이며 중공 당국에 장쩌민 체포를 요구했다. 1995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전수로 역시 그중 하나다.

전수로는 말한다. “2001년 4월 어느 날 십여 명의 경찰이 제가 일하던 북경의 한 회사에 난입했습니다. 그들은 회사를 수색하고 저를 연행해 갔습니다. 그때부터 장장 4년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전수로는 체포된 후 북경시 조양(朝陽) 간수소에서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다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그 후 그녀는 또 북경 단하(團河) 남자 노교소로 보내져 박해를 받았다. 끝까지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중국 법제훈련센터(세뇌반)에 보내져 비밀리에 세뇌박해를 받았다. 그곳에서는 파룬궁 수련생이 빨리 전향하게 하기 위해 온갖 고문을 가했다. 4개월간 완전히 격리된 채 인신모욕, 구타와 각종 고문을 받은 후 전수로는 주로 살인수와 강력범들이 수용되는 북경 ‘7처’ 등에서 재판을 기다렸다. 마침내 4년 노교형을 언도받고 악명 높은 장춘 흑취(黑嘴子) 여자 감옥에 보내져 진일보로 박해를 당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서 4년간 버틴 것이 구사일생이라고 했다. 또 장쩌민의 죄악은 필설로는 전부 형용할 수 없으며 장쩌민을 법정에 고소해 인간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장쩌민으로 하여금 인간세상과 역사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http://news.zhengjian.org/2016/02/20/30771.拍攝法輪功反迫害壯舉-女翻譯傳真相視頻.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