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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과 후회 없게 심사숙고 하라

유감과 후회 없게 심사숙고 하라

작자: 경지(敬紙)

[정견망]

“강희정훈(康熙庭訓)”은 청나라 강희황제가 자손들을 가르친 가정교육에 관한 글이다. 그 속에는 지혜와 깊은 이치가 담긴 경구(警句)들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보자.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세히 사고해야 하며 반복적으로 분석하고 추리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유감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지 않게 된다. 고로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어찌 할거나, 어찌 할거나라고 근심걱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강희제는 황제이므로 일언일행이 전반 나라를 대표하고 있으며 일에 봉착하여 반드시 신중해야 했고 세 번 거듭 생각하고 행해야 했다. 아울러 강희제는 어려서 황제에 등극하여 일생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곤란을 겪었다. 봉착한 어려움은 모두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고 봉착한 위험은 모두 자신의 생명과 직접 관계됐다. 그러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희제는 바로 이런 일생의 경험을 후대에 전하여 후세의 군주를 가르쳤다.

“황제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깊게 모략하고 멀리 고려해야 한다. 책략에 흠이 없어야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게 된다.”

현대 중국사회에 있어서 이 가르침은 정말로 지당한 명언이다. 나라와 정부에서 매번 정책과 법령을 선포하면 국민으로부터 욕이 나왔다. 관리가 그것을 해석할 경우 국민은 또 한바탕 욕을 퍼붓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아마 정책을 제정하는 관리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여러 번 “어찌할 것인가”를 묻지 않아 사유가 실제상황을 벗어나 국민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없어서 일 게다. 이로 인해 필연코 편파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더 심하면 관청과 백성 사이의 모순을 야기할 수 있으며 더 많은 민심의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줄곧 소위 “조화로운 사회”를 강조하고 있으나 국민의 소원과는 상반되게 일을 하고 있다. 국민의 뜻과 상반되는 정책이 어찌 사회의 조화로움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쁜 것은 제때에 예방하라.”고 했다. 작은 일이라도 많이 사고하는 습관을 들이면 큰일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반대로 작은 일을 얼떨떨하게 처리하면 큰일에서 필연코 자아를 상실하고 결과는 볼품없게 된다.

예를 들면 중공의 역대 운동은 모두 평소 작은 일에서 단련해낸 것이다. 방송에서부터 신문선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화문화로 세뇌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당에 대하여 의존하는 심리가 형성되게 된다. 매번 운동에서 한 무리 사람을 타도하고 잇따라 누명을 벗기고 다시 탄압하고 또 누명을 벗겨준다. 반복적인 운동으로 중국인은 심리적으로 무척 피곤해졌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무슨 운동이 시작되면 조건반사적으로 “당(黨)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틀림에도 자신의 미래가 어떠할 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할 때 각급 관리들은 또 노력하여 당을 위해 선봉에 썼고, “당”이 불법(佛法)을 탄압하고 있으며 “당”이 신불(神佛)과 대항하고 있어서 나중에는 반드시 하늘의 징벌을 받을 것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까지 12년간 각급 관리들은 파룬궁을 박해했기 때문에 신체와 명예, 이익에서 악(惡)의 보응을 받은 예가 만 건을 넘고 있다. 2011년 8월 19일 밍후이왕은 광동 무명(茂名)에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관련인원이(막후에서 명령을 내렸든 혹은 묵인한 관리든 혹은 제1선에서 박해에 참여한 경찰이든) 모두 점차적으로 각기 다른 형식으로 응징을 받은 사실을 보도했다.

위로는 시위원회 당서기, 시장, 검사장, 공안국장에서 아래로는 과장, 진장(鎭長), 파출소장과 일반 경찰에 이르기까지 잇따라 응징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불치병에 걸렸고 어떤 사람은 차사고가 났거나 혹은 자살했다. 예를 들면 전 무명시 전백(電白)현 공안국장 하아녕(何亞寧), 전 무명 화주(化州) 제2간수소 소장 여문웅(黎文雄), 전 무명시 무항(茂港)구 서기 이창휘(李昌輝), 전 무명시 전백현 수동진(水東鎮) 부서기 황국상(黃國祥), 전 무명 화주시 부시장 여권(黎權)은 암으로 사망했으며 전 무명시 검찰원장 유광진(劉光進)은 불치병에 걸려 고통을 참지 못하다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어떤 관리는 “어떤 사건”의 촉발로 심사에 걸렸으며 혹은 가택수색 당하고 면직되거나 혹은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어떤 관리는 승진되었으나 다른 곳에 가서 응징을 받았다. 그 중에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610조직 우두머리 자리는 곧 “사망 직위”로 불렸다. 누가 그 자리에 앉든지 막론하고 오직 파룬궁을 박해하면 곧 응징을 받았다. 만일 그들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에 여러 번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악한 행위를 벌인 후과(後果)를 생각해본다면 아마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 7월 강택민 사망소식이 퍼지면서 전국각지에서 환호소리가 들렸다. 강씨가 어떻게 죽었든지 강은 더 이상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이는 변론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분분히 폭죽을 터뜨려 경축했고 어떤 사람은 강의 사진을 폭죽에 매달아 터뜨렸다. 강택민은 어찌하여 이렇듯 사람들의 원한을 샀을까? 이는 아마도 13년 전 정권을 잡았을 때 저지른 행위와 직접적으로 큰 관계를 갖고 있다. 승진에 눈이 먼 강택민은 중공이 64학생운동 탄압을 지지하여 천안문 참사를 빚어냈다.

1999년에는 다른 상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억 파룬궁 수련자의 민심도 고려하지 않고 고집스레 파룬궁 탄압명령을 하달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왜”라는 질문을 가져보지 않았으며 그건 반드시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고 신경이 잘못된 것이다. 그 후과에 대해서 그마저 예상하지 못했다. 12년이 지났으나 파룬궁은 무너지지 않았고 강씨만 전국민의 미움을 사게 됐으며 중공도 붕괴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 역시 지금까지도 파룬궁을 박해하고 있는 각급 관리들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단지 강씨를 따라 폭죽에 매달려 터뜨려지는 신세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절벽에서 고삐를 돌려 지난 날을 후회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무신론은 늘 “사람의 죽음은 꺼지는 등불과 같다.”고 한다. 또 생전에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강씨는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인 상태인데 그가 벌인 일들은 그의 친척과 친구에게, 과거의 당의 동료에게 모두 지극히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만일 강씨가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에게 약탈당한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재부와 재물을 어찌 그 후대들이 향수할 수 있도록 가만둘 수 있겠는가? 세상에 알려진 명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찌 마음으로 탄복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엔가 강씨의 일체 이익은 전부 무너질 것이며 만년이 지나도 그 악명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는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강씨를 따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발표시간: 2011년 8월 24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11/8/24/768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