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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연대전성(蓮台展聖)

글/ 석방행

【정견망】

나는 오늘 정견망에 수련인이 쓴 윤회류 문장에 대해 정면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을 지닌 글을 보고 깊은 감사와 위안을 느꼈다. 그 글에서는 한 가지 소재를 선정해 글을 전개하면 효과가 더 좋을 거라고 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독자 여러분들과 나눠보고자 한다.

동수의 문장에서는 《서유기》를 언급했다. 이 작품은 지금 세대 중국인들이 수련을 인식하는데 확실히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 오승은(吳承恩)은 이야기의 형식으로 수련과 집착을 없애는 것에 대한 관점을 표현했고 이 한 점은 확실히 아주 소중하며 몹시 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유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곧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당 현장(玄奘)이 장안에서 줄곧 서쪽으로 가면서 서천(西天) 뇌음사(雷音寺)에 도착할 때까지 비록 아무리 많은 나라를 지나고 아무리 많은 사람, 신(神), 요(妖), 마(魔) 등을 만났을지라도 사실 이 전 과정은 모두 현장과 다른 세 도제들이 성취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서유기》에서 쓴 것은 당승(唐僧) 사도 4인의 연분이란 체계 범위 내의 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만약 단지 몇 사람의 윤회만 쓴다면, 설령 아무리 많은 역사상의 윤회 경험이든 또는 이야기가 제아무리 다채롭고 독자들이 좋아할지라도, 그렇게 하면 연분 체계가 아주 단일하게 변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하는 일은 결코 연분에 ‘한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다른 연분 체계의 생명은 우리가 한 일에 ‘공정함’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내가 가장 처음 ‘윤회기실(輪回紀實)’을 쓰기 시작했을 때(그때는 지금과 다른 필명을 사용했다) 그 글에도 법을 찾는 경험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많은 글에서 사람과 사람, 혹은 기타 동식물 사이의 윤회 속 인연이야기를 썼다.

나중에 십여 년의 모색과 경험과 한동안의 사고를 거친 후 나는 지역별 시대별로 나눠 직접 법을 찾는 시리즈인 《간신심법(艱辛尋法)》과 《천재법연(千載法緣)》으로 대체적인 길을 깔았다. 그 후 이번 《천애심법(天涯尋法)》 시리즈를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시간은 사실 매우 빨리 지나서 벌써 15년이 지났다.

내가 이번 시리즈를 쓸 때 고려한 것은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님께서 일찍이 하셨던 다음 말씀이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다 중국에서 전생(轉生)했다. 각 나라의 사람을 포함하여, 최근 법이 전해진 때부터 또 대량의 상계(上界) 생명이 온 것을 제외하고 역사상의 각 나라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전생한 적이 있다.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당신은 우선 중국인으로 되었는데 왜냐하면 당신들은 가장 처음에 그곳에서 전생했기 때문이다.”(주 1)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중토(中土) 이곳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연분이 응결되어 있다면 그럼 나는 중점적으로 중토의 범위에서 법을 찾은 경험에 대해 조금씩 써야겠다. 현재 중국의 판도는 역사상 중국의 판도와 달라서 내가 좀 빠뜨리는 게 있을까 염려되어 지금 중국 판도 범위 외에도 썼는데 본래 이들 지역 역시 대중화문화권(大中華文化圈) 범위에 속했던 곳이다. 또 문장을 쓸 때 나는 기본적으로 성(省)이나 나라별로 나누어 썼다.(범위 밖의 나라들은 나라별로 나누어 썼고 유사한 성이나 나라는 함께 쓰기도 했다).

중토(中土)란 이 범위는 창세주께서 아주 오랜 연대 이전에 일찍이 배치하신 곳으로 법연(法緣)의 ‘집결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비유이며 장차 오늘날 대법이 이곳에서 널리 전해지려면 금생에 부동한 민족의 사람들이 예전에 중국에서 전생했을 때 모두 인기(印記)를 남겨야 했다. 그들은 창세주께서 선택하신 법을 얻을 생명들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때 ‘교거(僑居 이런 표현이 비교적 적합하다. 역주: 교거란 지금은 외국에 살지만 전에 이곳에 살았었던 교민)’였던 다른 나라와 민족 신(神)의 자손들이 중토에 전생할 때 중토의 여러 지방에서 전생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직 성(省)을 구별하고 오늘날 중국판도 범위 밖 인근 나라들은 나라에 따라 써야만 비로소 중토에서 법연(法緣)을 맺은 모든 중생을 포함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민중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세계 각 지역에서 윤회하면서 주동적으로 창세주를 찾아 다닌 적이 있을 것이다. 다만 중토가 그 핵심지역일 뿐이다.

사실 내가 어느 사람이 어느 성에서 법을 찾으러 다닌 경험을 쓸 때, 그 사람 자신의 경험을 쓰는 자체는 문장의 가장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나는 문장 속 주인공의 경험이란 이런 줄거리(主線)를 통해 그 지역의 지리・인문 등 모든 것의 유래와 신이 안배한 근본 목적 및 그와 관련된 신의 경험과 상태에 대해 써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後者)야말로 본 시리즈의 가장 핵심이다.

예를 들어, 나의 방식으로 해남도 천애해각(天涯海角) 명승지의 천애석과 남천 일주석의 목적과 기다림을 쓸 때 예부터 지금까지 이 두 바위와 인연을 맺었던 그런 생명들의 내심에 먼지로 봉폐되어 있던 모든 것 역시 아마 일깨워졌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나는 하나 또는 몇몇 주인공이 법을 찾으러 다닌 경험을 쓰면서 이 두 바위를 언급했다. 물론 생명이 이 글을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각성 과정 중에서 대법과 사부님의 역량과 역할이 제1위임을 알고 있다. 이 한 점은 그 언제든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동한 생명에게 있어 예전에 어느 지역과 연을 맺은 후 그의 내심에 그 지역에 대한 그리움과 추구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신(神)이 어느 지역에 부여한 내함(內涵)을 지금 시기에 드러낸다면 이 생명에 대해 어느 정도 좋은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가령 마음에 맺힌 것을 푼다든가 사유가 활짝 열린다든가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든가 노력해서 정진하는 등등이다.

물론 서로 다른 생명은 이전의 경험이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효과 역시 같을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종류의 문장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이게 다 뭐냐?”고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런 글을 보기 좋아하든 아니면 이런 글을 보는 습관이 없을지라도, 독자 여러분들이 모두 이성적으로 대하길 바란다. 그 어떤 파동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언제든 늘 법을 크게 놓아야 한다. 설령 이런 종류의 문장을 보고 싶다 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한 후 여가 시간에 보기 바란다.

농담을 하나 하자면 “여러분이 만약 남성 기혼자라면 아내가 바닥을 닦으라고 하면 바닥을 닦고 시간을 늦추면서 일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아내가 나를 탓할 텐데 그럼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하하.”

이번 기회에 나는 이 시리즈를 쓰게 된 애초 의도와 무엇 때문에 성(省)별로 나누어 쓰게 되었는지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눠보았다.

지금 나는 지면을 나눠 돈황에 대해 쓰고 있다. 이것은 어느 한 가지 전문 주제를 정해서 연재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 가지 전문 주제를 연재하면 표면적으로 하나의 중심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돈황 시리즈는 다르다. 이곳 막고굴 동굴 조상(造像)과 회화 등은 모두 직접적으로는 신이 천년을 쌓아 완성한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이번 차례 문명의 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조대(朝代)에 중토에 전생한 사람들에게 신이 준 신앙 위에 직접 길을 닦고 펼쳐낸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나는 돈황에 관해 여러 편으로 쓸 때 모두 하나의 관련된 주제를 선택했고 매 편마다 독립적으로 완성했다. 하지만 서로 간에 일정한 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그 관계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 본문에서는 연꽃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신앙을 지닌 동방 사람에게 있어, 연화(蓮花)란 성결(聖潔)의 상징이자 신선(神仙)의 사자(使者)를 싣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지위가 매우 높다.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신 적이 있다.

“연화(蓮花)는 부처세계에서 생긴 것이며 연화는 부처세계에서 한 가지 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과위와 부처의 위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연화는 사람 개념 중의 꽃이 아니지만 꽃으로 비길 수 있다. 지금 불교 중에서는 하화(荷花)로 성결(聖潔)을 비유한다. 진흙탕 속에서 나왔지만 오염되지 않고 진흙 속으로부터 자랐지만 오히려 오염되지 않고 그렇듯 깨끗하고 성결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비유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부처의 연화(蓮花)가 아니다.” (주 2)

설법도(說法圖) 제260굴, 북위(北魏)
불설법도(佛說法圖) 제392굴, 수대(隋代)
설법도 제205굴, 성당(盛唐)
보살상(菩薩像) 제306굴, 서하(西夏)

이상 네 폭의 그림에서 연화(蓮花) 부분을 자세히 관찰해보자.

첫 번째 그림은 고대 인도와 그리스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연꽃의 잎이 매우 뾰족하고 세밀하다.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이것은 고대 인도에서 수련(睡蓮)을 그린 화법(畫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그림 기법은 고대 그리스의 일종 풀잎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대(隋代)부터 중원의 화법이 점차 성숙해졌고 연잎이 두텁고 풍만하게 변했다. 그러다 성당(盛唐)시기에 이르러 연잎은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운 상태로 그려졌고 이는 대당(大唐)의 예지(叡智)와 활달하고 드넓은 기상을 체현해냈다.

나중에 서하(西夏) 시기에 이르면 연꽃은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크게 그려져 명쾌한 느낌을 준다. 마치 이들 소수민족의 거칠지만 호방한 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상은 가장 표면적으로 연꽃을 그리는 화법의 변화에 대해 말해보았다. 만약 연꽃 그 자체를 말하자면 시대에 따라서 수련인이든 신을 믿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릴 때 연꽃이 이들에게 펼쳐낸 상태가 다르다. 게다가 부동한 시대에는 부동한 신(神)이 질서 있게 이 방면의 일을 관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이 달라지면 사람에게 나타내 주는 것 역시 달라진다. 게다가 천상의 부동한 신이 타는 연화좌(蓮花座) 역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신을 믿지 않은 사람이 돈황과 관련된 문물의 변천을 연구할 때면 다만 사회에서 가장 얕은 층에 서서 문제를 볼뿐이다. 하지만 신이나 신앙에 관련된 역사와 진상은 오직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진상(眞相)을 볼 수 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업종이 다르면 마치 산이 가로 막는 것처럼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隔行如隔山).”

무신론자가 신을 연구하면 모든 것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격히 말해 신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신과 관련된 역사 연구에 종사한다면 신은 아예 당신에게 진상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자연히 최종의 진상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물론 어떤 연구자는 비록 처음 시작에는 무신론자였지만 돈황에 머문 시간이 길어져 마음이 이곳에 귀의하게 되면 사실 그는 이미 간접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다. 단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이 역시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막고굴 연구소가 설립된 후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줄곧 아주 고생스러웠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지금은 60여 년 전보다 조건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일반적인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다. 대사막 속 동굴에서 그림을 모사하는데 시간이 길어지면 고독해진다. 사실 이렇게 견딜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행과정이다.

앞 두 편에서 우리는 초기에 조상(造像)과 관련된 두 사람의 인물을 말했다. 이번 문장에서는 연화선자(蓮花仙子)가 북위(北魏) 시기에 어떻게 화공에게 그녀의 ‘아리따운 용모(芳容)’를 나타내 주었는지 말해보자.

앞 인용문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연화(蓮花 부처세계의 연꽃)는 하화(荷花 인간세상의 연꽃)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연화는 불국(佛國)세계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곳에서 부처의 과위와 위덕을 펼쳐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펼쳐내는 방식 역시 우주대법의 기제가 작용을 일으킨다.

막고굴의 벽화와 조소로부터 보면 신(神)이 중생에게 펼쳐준 연화는 색깔이며 양식이 아주 여러 종류였다. 이는 사람이 그려낼 수 있거나 인간의 안료(顔料)로 조화해낼 수 있는 색깔이다. (많은 색깔은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안료가 산화해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

천상의 연화는 가히 ‘신(神)’이라 부를 수 있지만 표현상태가 일반적인 신불(神佛)과 다를 뿐이다. 부동한 신은 과위와 위덕 및 내원한 특징 등 많은 측면이 다르기 때문에 펼쳐낸 연화의 잎, 색, 연화대의 층수, 크기 내지는 잎의 경지 상태가 다 다르다.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억만 가지 종류 중에서 한 가지만 골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불국(佛國)의 연화에 초보적인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매우 높은 한 경지에서 한 불타(佛陀)가 태어날 때 우주 법의 기제는 하나의 연화좌(蓮花座)를 만들어 낸다. 이곳은 층차가 아주 높진 않기 때문에 연화좌는 81층으로 고정되어 있다. 매 연꽃잎의 외곽은 감청색이며 바로 이어서 오렌지색이 있고 그 이후는 황금색이다. 이 불타는 이 경지 중에서 산생되어 이 연화대 위에 앉아 있으며, 게다가 무량한 불광(佛光)과 다른 방면의 위덕을 드러내기에 중생들은 모두 그를 대단히 존중한다.

한번은 이 불타가 다른 한 대도(大道)와 함께 어떻게 하면 이 경지를 더 순정하고 번영하며 중생들이 더 아름답게 생활할 수 있을까 상의하고 있을 때 이 불타가 앉은 연화대의 제45층 연잎 중에서 매우 위대한 장면이 나타났다. 그것은 매우 광대한 장면이었다.

무수한 부처와 보살이 그 한 층의 법(法)이 부여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드러냈다. 또한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비천(飛天)이 각자 강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위엄과 상화함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호법(護法)이 그 장에 나타나 무한한 위엄을 드러내었다.

불타가 이런 면들을 다 나타내 보이자, 그 대도가 앉은 연화좌 역시 그 지극히 광대하고 차분한 가운데 자재함을 드러냈다. 부처와 도는 형상의 구별 외에도, 우주대법에 대한 바른 깨달음[正悟]이 다르기 때문에 생명이 존재하는 특징에도 큰 차이가 있다.

부처는 선(善)과 자비 등 방면의 것을 좀 많이 드러내기에 그 경지의 풍부함은 도가의 ‘진(眞)’으로 체현한 풍부함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어떤 음악은 듣는 이에게 선의 힘을 느끼게 하고, 어떤 음악은 생명이 영원히 그런 ‘진(眞)’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언어로 가장 거칠고 뭉뚱그려 개괄적으로 그 특징의 억만 분의 일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여러 부처와 다른 신들은 모두 매우 놀랐다. 모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신성한 힘을 느꼈다. 사실 이것은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이 불타가 앉은 연화좌의 다른 연꽃잎 역시 이 기회에 마음껏 자신들의 풍채를 드러낸다.

그것은 정말 이랬다.

건곤의 아름다움 춤으로 드러내
연꽃잎의 움직임 온갖 상화로움 거두네
수승한 온갖 불국토의 상서로움과
불법의 현묘함 노을빛에 비치누나!

舞動乾坤展芳華
蓮瓣靜動萬祥納
殊勝千般佛地瑞
佛法玄妙映光霞

이번 모임에서 전시한 후 이 한 층차의 생명은 연화대와 연화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끊임없이 흐름에 따라 연화대는 자기가 어떻게 이전의 그 순정함과 신성한 상태가 없을까 느꼈다. 불타 역시 자신이 있는 경지가 처음처럼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신들을 찾아가 함께 상의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신들도 이에 대해 어쩔 방법이 없고 매우 힘이 부족함을 느꼈다.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이곳의 변이는 점점 심해졌고 이런 것들에 대해 뭇신들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곳에는 ‘날짜’가 없다) 이 불타는 이미 노쇠한 모양으로 변했고 연화대에 앉아 수심에 잠겨 있었다. 이때 한 연꽃잎이 연화대에서 떨어져 내려와 선자(仙子)의 모습으로 화(化)하여 불타에게 예를 올린 후 말했다.

“당신의 고뇌를 저는 다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리느니 제가 다른 경지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불타가 말했다.

“가야할 곳은 나도 일찍이 내 방식대로 다 가보았다. 네가 내가 가지 않은 곳을 갈 수 있겠는가?”

연화선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부처님의 위덕과 과위를 나타내는 신이라 우리와 같은 신들은 일반적인 신과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불타가 갈 수 없는 한 층차의 경지와 지역이 있습니다. 당신께선 이렇게 아시면 그만입니다. 저는 먼저 한동안 떠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연화선자는 그 경지를 떠났다.

아마 이 경지의 생명이 구도될 인연이 성숙했는지 연화선자가 막 이 경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무리의 신들을 만났다. 이 신들은 몹시 흥분한 듯 말했다.

(이것은 표현일 뿐이며 신은 사람처럼 그렇게 흥분하지 않는다)

”우리 그 경지에서 패괴(敗壞)와 변이가 나타났지만 장시간 해결할 수 없었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을 때 창세주(創世主)께서 우리 경지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창세주로부터 매우 높은 경지에서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에 창세주께서 직접 내려오셨고 가장 낮은 층에서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 전반 우주와 우리가 있는 경지가 구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창세주께서 만약 나를 따라 내려가고 싶으면 갈 수 있으며, 장래 기연이 닿으면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서 우주대법을 널리 전하실 때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들은 모두 따라서 내려갔습니다.”

“구도 받을 희망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한 신이 이렇게 보충했다.

이에 연화선자가 얼른 물었다.

“현재 창세주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저도 이때에 창세주와 인연을 맺어 장래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서 우주대법을 널리 전하실 때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 신이 말했다.

“당연히 더 낮은 층으로 내려 가셨지요.”

연화선자는 이 말을 듣고 얼른 말했다.

“당신들 중 한 분께 부탁드립니다. 내가 당신들을 만난 일을 제가 있는 층차의 불타께 좀 전해주세요. 저는 먼저 창세주를 찾아 봐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연화선자는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낮은 층차로 날아갔다. 이 신선들은 이 모습을 보고 연화선자의 용기에 매우 탄복했고 함께 그녀가 원래 있던 경지에 가서 불타에게 이 사정을 말했다. 불타는 기뻐하면서 연화선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가득했다.

(이것은 사람의 상황이나 표현과는 완전히 다른데 그 경지는 하나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연화선자를 말해보자.

그녀는 아래로 내려가는 중에 각종 어려움을 만났다. 이런 어려움은 사람들에서처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욱 높은 경지에서 오는 생명에게는 아래 낮은 층으로 내려가자면 여전히 고생스럽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부동한 층차의 시공을 뚫고 가는 일은 시간과 기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단번에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부동한 층차와 상태 중에서 어느 정도 머물러야 하는데 이 시간 역시 길고 짧은 것이 있다.

한번은 이 한 층차에서 이곳의 신(神)이 마침 마(魔)와 대전(大戰)을 벌이고 있었다. 결과는 그녀가 막 뚫고 지나왔을 때 마가 법기(法器)를 가지고 원래 그 신과 싸우려고 하다가 결과적으로 그녀의 몸을 때렸고 그녀는 즉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그 경지 중에서 아주 오래 머물러야 했다.

어느 날 속으로 매우 시원함을 느끼며 몸의 상처가 단번에 다 나은 것을 알았다. 이때 그녀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신이 미소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신이 말했다.

“네 몸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았다. 우리 함께 한 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신과 상의 해야겠다.”

연화선자는 바로 이 신을 따라 다른 한 경지로 왔다. 이곳에서 그녀는 한 송이 연꽃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림 5를 참조) 그러나 여기의 신은 여전히 그녀를 연화선자라 부른다.

연화 심향(沁香) 작품

그곳에 이르자 뭇신(衆神)들이 그녀를 데리고 온 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이분이 바로 창세주임을 알았다.

창세주께서 말씀하셨다.

“연화선자의 고귀함이 여기에 있다. 고층차에서 나를 보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층차의 일체를 버리고 나를 따라 내려와 연(緣)을 맺었다. 이런 용기는 일반적인 신이 구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경지의 모든 생명을 위해 한 것이다.”

말씀을 마치신 창세주께서는 연화선자 원래 그 경지의 불타가 연화선자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시공(時空)의 문을 열어주셨다. 아울러 불타에게 장래 그 한 층차를 최대한도로 잘 수호하라고 당부하셨다. 사실 창세주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불타에게 힘을 가지해주신 것이다.

이때 한 신이 연화선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찾아 상의하러 왔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우리는 신앙의 장면을 펼치려 하는데 이런 장면은 조각이나 그림을 그리는 형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는 과정에서 신불(神佛)과 천국의 상태를 나타내야 하는데 이런 일체 드러남은 연꽃과 뗄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연화선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창세주께서 말을 받으셨다.

“인간세상에서는 부동한 시대에 근거해 신이 계통적으로 사람에게 문화를 나타내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원칙이다. 예를 들어 신은 때가 되면 소수민족이 의식주와 행동 등에서 일체 표현이 어떠한지,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떤 유형으로 해야 하는지 등이다. 신은 또 그때 인류의 인지특징 상태와 표현에 부합하도록 사람에게 펼쳐내야 한다.”

창세주의 이 말씀에 뭇신들은 명백해졌다.

연화선자가 말했다.

“기왕 창세주께서 말씀하셨으니 때가 되면 저는 완전히 신(神)이 계통적으로 한 어느 시기 인류문화에 대한 배치에 완전히 협조해 불타의 위덕・과위와 위엄을 더욱 잘 나타내겠습니다.”

나중에 연화선자는 인간세상에서 여러 차례 윤회전전하며 사람 이 층 생명의 진실한 심리상태를 알게 되었다. 나중에 북위(北魏)시기 연화선자는 잠시 하늘로 돌아갔다. 그녀가 어느 화가가 불타를 그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즉 그의 눈앞에 연화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당시 사회는 막 한화(漢化)가 시작되어 호풍(胡風)과 서역 및 고대 인도와 그리스의 영향이 여전히 아주 컸다. 연화선자는 창세주의 이전 말씀에 근거해 계통적으로 인간 신앙을 배치한 신의 동의하에 화공더러 연꽃을 그런 식으로 그리게끔 했다.(가령 그림 1)

물론 이후 시대 화공이 그려낸 연화는, 부동한 신이 부동한 시대에 신의 질서 있는 배치에 근거해 드러낸 것이다. 연화선자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사람 몸으로 전생했고 나중에 한번은 청나라 때 라마가 되어 묵묵히 막고굴을 지켰다. 금생에 연화선자는 칠레에서 태어났다. 이미 일찍이 법을 얻었는데 이런 것들은 지면의 제한으로 상세히 쓰지 않는다.

바로 다음과 같았다.

연화대가 신성한 위덕 드러내니
변이가 점점 창우를 채웠다네
선자가 용기 내어 출로를 찾으니
기연이 닿자 신의 점화 받았다네.

층층이 내려오며 온갖 마난 겪고
만겁동안 법의 인연 지켜냈네
세상에 내려와 화가를 점오하니
찬란한 위덕의 빛 다시 펼쳐내누나!

蓮台展聖威德顯
變異漸漫蒼宇間
仙子奮勇尋出路
機緣所致遇神點

層層下走曆魔難
萬劫堅持接法緣
下界點悟繪畫者
重展威德光萬千!

주:
1.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 저작 《북미순회설법》
2.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 저작 《미국서부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