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덕(孟德)
【정견망】
나는 1976년에 고향인 당산(唐山) 고가장(高家莊)에서 당산 대지진을 직접 겪었다. 당시 기억을 써내어 사람들이 그때의 역사를 잊지 말고 하늘이 징벌을 내릴 때 사람에게 주는 경고를 잊지 말 것을 희망한다.
우리가 살던 고가장에는 100가구 500여 명이 살았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 저녁 우리는 단원회의(團員會)를 열고 있었다. 생산대에서 철야하며 새벽 3시 27분까지 회의를 했다. 처음부터 건물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우리는 주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당산에서는 늘 작은 지진이 빈번했고 흔들리는 현상이 아주 흔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다.
우리가 생산대를 떠나려 할 때가 되어서야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와르르하는 소리만 들리더니 생산대 초가집이 무너졌다. 우리는 처마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 있던 세 사람이 창문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문을 열 수 없었고 결국 발로 창문을 부수고 탈출했다. 그런데 나는 단번에 창문 옆에 놓아둔 가축용 물 항아리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겨우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보니 동북 방향에서 마치 홍시(紅柿) 모양의 구름이 거의 온 하늘을 덮을 것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지진으로 땅이 뚝뚝 갈라지는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차이점이라면 단지 이 소리가 지하에서 들려왔다는 점이다. 지면 전체가 마치 파도처럼 잠시 올라갔다가 다시 낮아졌는데 기복이 심했다. 가장 높은 파도는 약 1.5미터정도였다. 나는 땅위에 엎드려 피하려 했지만 이런 파도에 몇 번이나 곤두박질쳤다.
지진파가 마을 전체를 석권하자 5분 만에 거의 모든 건물이 다 무너졌는데, 지진파가 이르는 곳마다 전부 무너져 내렸다. 마을 전체에서 약 반시간 동안 거위며 참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당시 피해를 입은 가옥이 80여 가구나 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마을 전체가 무너졌는데 심지어 자그마한 닭장마저 무너져 내렸다. 직경 1미터 정도의 큰 나무도 부러졌고 전신주도 전부 쓰러졌다.
나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아직 집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 문 앞에 가서 보니 건물이 다 무너져 있었다. 이때 일곱째 오빠가 달려왔다. 우리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폐허 속에서 사람을 파냈다. 모친은 이미 깔려서 돌아가신 것을 발견했다. 아홉 살 남동생은 본래 창문 입구에 있었는데 지진으로 20여 미터나 나가 떨어졌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부상을 입었다.
지진이 처음 시작될 때 우선 횡파(橫波)가 지표면에 이르렀기 때문에 제일 처음에는 사람들이 지진파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힘이 너무 강해서 사람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동생은 바로 이렇게 흔들리다 나가떨어진 것이다. 이어서 종파(縱波)가 위아래로 파동을 일으키며 파도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진파가 다 지나간 후에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이날 아침에만 나는 이미 10여 개의 시체를 파냈다. 마을 전체에서 나와 오빠처럼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12명에 불과했다. 우리는 모두 1분 1초를 다퉈가며 사람을 구했다. 집이 모두 무너져서 사람들이 아래에 깔린 상태였기 때문에 1분이라도 빨리 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안에서 질식해 죽기 쉬웠다.
흔히들 대재난이 지난 후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마치 친가족처럼 반갑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런 역사를 진정으로 경험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너무나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담벼락이 무너져 폐허가 된 마을에서 걸어 나와 죽거나 다치지 않은 사람을 보면 모두들 너무나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집안에 사망자가 있는지 안부를 물었으며 사람을 구원하거나 시신을 매장할 일손이 필요한지 물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당시 재난 속에서 선량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하늘의 이치는 언제든 늘 영험한 것이다!
집안의 일을 다 처리한 후 나는 50리 정도 떨어진 당산 시내에 들어가 보았다. 오후 3시쯤 자전거를 타고 당산 시내의 한 구역에 갔는데 약 1km에 달하는 시체로 쌓은 담과 흰 천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당시 마침 중복(中伏) 시기라 알몸으로 된 시체들을 담처럼 쌓아놓았던 것이다. 큰 건물이 하나 무너지면 사람들은 발굴한 시체를 되는대로 길거리에 쌓아놓았는데 당산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모두 시체로 가득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약 5~6만 명의 시체가 도로 위나 길가에 아주 넓은 면적에 걸쳐 깔려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보고 생각마저 멈춰버렸고 오직 기계적으로 구조작업에만 매달렸다. 여러 종교에서 모두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사람을 도태시킨다고 말하는데 나는 당시 장면을 생각만 해도 줄곧 등골이 서늘해진다.
중공은 줄곧 당산 지진으로 24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52만 명이 죽었다. 현지 정부 부문에도 모두 기록이 있고 당시 우리 친척 중에 정부 부문에서 일하는 분이 직접 내게 사망자수를 말해준 적이 있다. 당시 당산 인구가 약 100만이니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지금도 당산에 가서 땅을 파기만 하면 죽은 사람의 유골이 나온다. 왜냐하면 당시 한여름이라 무더위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시체를 장기간 보존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시체는 곧 부풀어나고 썩어문드러졌다. 가족이 있으면 작은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었지만 가족이 없는 경우에는 만인갱(萬人坑 공동무덤)에 묻었다.
지게차로 마치 돼지처럼 시체를 큰 차에 싣고는 만인갱으로 운반했다. 시체를 한층 깔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렸는데 15만 명이 구덩이에 가득했다. 당산 전역에서 도처가 시체였다. 나는 당시 자신이 마치 살았어도 죽은 사람처럼 마비되었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이틀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배고픈 것을 몰랐고 오로지 사람을 파내거나 매장하는데 매달렸다.
그때 시신을 매장할 작은 땅이나 시신을 감쌀 어떤 물건이라도 있으면 모두 일종의 사치로 여겼다. 우리 집은 다행히 살아남은 식구가 많아서 형제들이 모친의 시신을 돗자리로 싸서 단독으로 매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집에서는 대부분 몇 명 또는 몇 십 명을 함께 묻었는데 시신을 덮을 것도 없어서 그냥 묻어야 했다.
당시 외지인들이 당산에 구조 활동을 하러 왔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체가 열이 나면서 부풀어 올라 원래의 2~3배로 커졌다. 쇠갈고리로 시체를 찌르면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냄새가 당산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사병 몇이 시체를 찌를 때 나온 연기에 질식해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때문에 많은 사병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뒤에서 중공 관리가 총을 들고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 어떤 병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면서 쇠갈고리를 내려놓고 도망치려다 현장에 있던 관리에게 총살당했다.
재난 중에서 나는 인성(人性)의 선과 악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사람을 구했지만 어떤 사람은 재난 중에 돈을 벌었고 어떤 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어떤 사람이 손목시계를 강탈했다가 한 병사에게 발각되었다. 사병이 시계만 남겨놓고 떠나라고 하자 그는 모두 인민의 병사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병사가 몸을 돌려 손에 들고 있던 장총으로 쑤셔 그의 몸을 관통했다.
당시 겪은 경험 때문에 나는 1989년 6.4도살을 듣고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들 병사들은 중공의 조종을 받아 인성(人性)이라곤 전혀 없으며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탱크로 그들을 밀어버리라고 하면 그냥 밀어버린다. 다시 말해 오직 이렇게 생각이 없는 병사들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
또 한 가지 인재(人災)가 있었다. 시장 안에 있던 큰 은행건물이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사람을 캐내고 사람을 구했지만 어떤 이들은 은행에 있던 돈을 약탈하려 했다. 건물 밖은 중공 군대가 와서 포위했다. 그들은 빌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을 구하던 사람이건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건 빨리 건물 밖으로 대피하라고 경고했다. 3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8대의 기관총이 미친 듯이 난사되었고 당시 건물 안에 있던 100여 명이 죽었다. 이는 모두 공산당이 저지른 나쁜 짓들이다.
재난이 지나간 후 나는 또 왜 우리 마을은 유독 피해가 심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우리 마을에서 500미터 떨어진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모두들 ‘소신장’(小神莊 작은 신의 마을)이라 불렀다. 그곳 사람들은 집집마다 선행을 했는데 지진 중에도 오히려 편안하고 무사했으며 무너진 집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은 가난했기 때문에 물건을 훔치는 일이 아주 많았고 남들이 다 ‘좀도둑 마을’(小賊莊)이라고 불렀다.
지진 중에 마음씨가 곱지 않은 이들은 거의 다 가족이 전멸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몇 집이 다 죽었다. 또 많은 집에서는 어른은 전부 죽고 아이들만 남아서 울며 불며 엄마를 찾았다. 아마도 이게 바로 하늘의 징벌일 것이다!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은 20년 넘게 줄곧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중공을 따라 악행을 저지르지 말고 중공 조직에서 탈퇴하라고 알려왔는데 그들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진심임을 믿는다. 지금도 중공을 따르는 이들이 많은데 수천만 당원이 있고 또 단원과 소선대원이 있다!
하늘이 중공을 멸망시키고 사람을 도태시킬 때면 아마 과거 당산대지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정말로 대단히 비참할 것이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선양하는데 다시 말해 바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선량한 사람이 되라는 것으로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재난 중에 구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7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