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99년 7.20 이전에 법을 얻었으니 노제자라 할 수 있고 또 많은 마난과 난관을 겪었다. 최근 2년간 수련에서 관(關)을 지나가는데 나는 듯이 맹렬했지만 법공부에서만은 돌파가 매우 어려웠다. 최근 사부님의 자비하신 점화로 마침내 돌파할 수 있었다. 이 글을 발표하여 사부님께 감사를 표하고 동수들과 최근 법공부에 관한 깨달음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법을 공부하면서 부딪힌 교란
사부님께선 줄곧 설법에서 법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동수들의 교류문장에서도 늘 법공부에 마음을 들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전에 나는 이 두 가지를 중시하지 않았고 또는 구세력이 나의 사상을 겨냥해 내가 법을 학습하는데 겹겹의 장애를 설치한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매일 법공부를 했지만 많은 때는 임무를 완성하듯이 했다.
더욱이 《전법륜》을 공부할 때 한 구절만 보면 다음 구절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어서 매번 새로운 깨달음과 수확이 없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억지로 읽었으며 내심으로 보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법을 공부할 때도 깊이 마음을 쓰지 못했고 심지어 무엇이 법공부에 마음을 쓰는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내가 읽기만 하면 배우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완전히 형식에 그쳤다. 심지어 막 공부하고 나서도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는 늘 각 지역 설법을 보면서 배우기 쉽고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느꼈다. 《전법륜》 학습은 실로 너무 어렵다고 여겼고 이에 곤란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일어났다.
사부님께서는 《2015년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법 공부를 견지할 수 있고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고 법을 읽으며 착실하게 『전법륜』을 읽으면서 줄곧 걸어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이 가장 탄복하는 것이다.”
나는 장기적으로 《전법륜》을 진지하게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까닭은 아마 이 법이 너무나 중요해서, 일단 법을 얻게 되면 갈수록 수련에 겹겹의 장애가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구세력은 당신이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이 쉽게 얻지 못하게 하며 당신의 법공부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법공부를 해도 법을 얻지 못하게 하며 당신이 피곤하거나 바쁘거나 어렵게 여기게 하는 정서가 생기게 한다.
법공부에서 돌파하지 못하면 수련에서 법리가 따라가지 못하게 되며 반드시 수련에서 슬럼프를 만나게 된다. 어느 한 층차에서 한동안 배회한 후 나는 마침내 반드시 법공부에서 돌파해야 하며 또 《전법륜》을 공부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전법륜』은 한 부의 계통적으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원만하게끔 할 수 있는 한 부의 대법이자 천기(天機)이다.”
매일 《전법륜》을 두 강씩 읽고 슬럼프를 돌파하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두 강을 읽기로 규정했다. 배우는 자세도 무릎을 꿇거나 또는 결가부좌를 했다. 왜냐하면 내 기억에 천목이 열린 동수의 문장에서 언급했다시피 천상의 신들마저도 모두 꿇어앉아 법을 듣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자세 문제가 아니며 이것은 하나의 경건한 마음이자 사부님과 법을 공경하는 태도다. 나는 또 전에 법공부할 때의 일체 사람의 관념 역시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관념을 갖고 법을 공부한다면 어떻게 천법(天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가령 이는 한 권의 책이라고 여기는 뿌리 깊은 관념을 들 수 있는데 법공부는 바로 독서와 같다는 관념이다.
나는 법을 공부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대법을 보는 관념을 지니고 법을 배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이 책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보서(寶書)임을 볼 수 있고, 책을 펼치면 곧 무수한 신기함이 나타나고 매 글자의 배후가 모두 사부님 법신의 형상임을 본다면 우리가 여전히 보고 싶지 않거나 심지어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의 천목이 우리에게 이 보서의 진상을 나타내주지 않기 때문인데 바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설사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한다 해도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단지 우리의 오성이 너무 차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대법에 대해 숭경(崇敬)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났고 대법 책을 받들면 이전에 법을 공부하던 개념이 없어졌으며 대신 사부님께서 내 눈 앞에서 설법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얼굴이 온통 눈물로 가득 찼고 나와 대법을 격리하던 그 한 층의 물질이 녹아내린 것을 느꼈으며 법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전에 “부체”, “기를 훔치다”, “기를 채집하다” 등의 설법을 읽을 때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매 하나의 작은 소절에서도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와 무관한 것 같은 이들 법리를 통해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법리를 알려주시거나 또는 현재 내 수련에 관련된 문제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전에 나와 무관하다고 느꼈던 인식은 사실 사람의 천박함과 무지였다!
나는 또 사부님께서 법을 말씀하신 순서에도 정심한 안배와 박대(博大)한 내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법공부 중에 또 연공 중에나 있을 수 있었던 느낌이 나타났다. 예컨대 에너지장이 아주 강하다든가 또는 자신이 연화반(蓮花盤) 위에 앉아서 회전하는 느낌 등이었다.
다시 대법을 보니 매 한 구절의 법에서 모두 비할 바 없이 굳은 믿음이 생기게 했고 매 한 구절을 볼 때마다 속으로 옳다고 느끼며 바로 이것이 진리이며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구절의 법을 전혀 굳게 믿지 못했음을 느꼈다. 어떤 법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너무 너무 허황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사람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니 당연히 법 역시 내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법의 진귀함을 알고 나서 나는 이후의 법공부에서 가능하면 법을 공부하는 각종 교란을 극복하고자 했다. 우선 스스로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고 일념으로 배우게 했고 만약 한눈을 팔면 스스로 뺨을 한 대 때리고 반드시 매 한 구절의 법에 대해 모두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신념을 품고 배워야한다고 규정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법을 배우는데 정진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보시고 의념을 통해 내게 알려주셨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다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지만 사실 역시 단지 표면적으로만 알뿐이며 진정으로 법의 진귀함을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소중하며 법공부의 고귀함을 알고 법공부에서 정진하여 수련에 제고가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선 의념으로 내게 알려주셨다.
“사부가 이렇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천기(天機)다.”
내 생각에 이런 천기를 똑똑히 알게 되면 비로소 법공부에 정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련의 길에서 굽은 길을 적게 걷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 비로소 활짝 깨달았다. 알고 보니 이전의 법공부는 진정으로 법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천기는 법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설명한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반대로 말한다면 정진하지 않는 사람도 여전히 법 공부를 하고 있고 또 법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법에 있지 않으며 정념도 부족하기에 인식이 자연히 높지 않은데, 곧 진정으로 법의 진귀함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법을 소중히 함과 경건함에 너무나 멀어져 있다.
사부님께서는 내게 법공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셨고 또한 법공부의 긴박성을 의념으로 넣어주셨다. 당시 나의 느낌은 바로 법공부는 마치 내게 혈액과 영양을 주입해주는 것 같았다. 만약 다그쳐 법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곧 시들어버릴 것이다. 법은 바로 우리 생명을 지속시키는 원천과 같다. 내가 다시 법을 공부할 때 정말로 법공부가 마치 내게 에너지를 넣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내 혈액 속에 주입되어 나로 하여금 다시금 활력과 정념이 있게 했다.
이상은 개인 층차에서 깨달은 것으로 만약 법에 있지 않은 점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55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