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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암리에 정해져 있다: 장숙야가 신인을 만나 예언을 얻다

덕혜(德惠)

【정견망】

장숙야(張叔夜)의 자는 “혜중(嵇仲)”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북송의 유명한 관원이다. 문무에 다 능했는데 가장 유명한 사적은 바로 양산(梁山)의 송강군(宋江軍)을 물리친 것이다. 오늘은 장숙야가 젊은 시절 겪은 한 가지 기이한 일을 말해보겠다.

장숙야는 젊었을 때 무관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한번은 사천(四川)에 출장갔는데 여관에서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당시 그들 둘만 함께 있었다. 도인은 겉보기에도 선풍도골(仙風道骨)이었고 범속하지 않았다. 장숙야는 도인을 주의해 보았고 도인 역시 장숙야를 주시했다.

밤이 깊어지자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젊은이는 장차 ‘이부(二府)’에서 청귀(淸貴)한 요직을 맡을 것이오.”

송대에 ‘이부’란 ‘중서문하(中書門下)’와 ‘추밀원(樞密院)’을 가리킨다. 중서문하는 또 ‘정사당(政事堂)’또는 간단히 ‘중서(中書)’라고 했으며 조정의 최고 행정기구다. 또 ‘추밀원’은 조정에서 가장 높은 군사기구로서 두 기관이 각각 정치와 군사의 대권을 갖고 있어 ‘이부’로 불렸다.

장숙야는 그 말을 듣고 이 도사가 일부러 좋은 말로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이라 생각해 반문했다.

“당신이 무슨 능력이 있는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송조(宋朝) 사회 분위기는 문인을 중시했기 때문에 도인에게 시를 지을 줄 아느냐 물었던 것이었다. 뜻밖에도 도사는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고 반문했다.

“시제(詩題)를 내보시게.”

장숙야는 도사에게 갖고 있는 호리병을 가리키며 이것을 제목으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도인이 붓을 들더니 즉시 한 수의 시를 썼다.

호리병을 비웃지 말라 그 속은 천지처럼 넓다네
쇠가 흘러도 덥지 않고 바위가 갈라져도 어찌 추위를 알랴
당기면 종적 찾기 쉽고 불면 틈을 찾기 어렵다네
가르침으로부터 먼지가 다하도록 후인이 보도록 남겨놓네

莫笑葫蘆子,其中天地寬
流金不著暑,裂石豈知寒。
拖後尋蹤易,吹時覓縫難。
從教灰盡卻,留與後人看。

다 쓴 후 도사는 즉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장숙야는 비로소 신인(神人)을 만났음을 알았다. 나중에 장숙야는 전장에서 공을 세워 문관체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받았다. 양성(襄城), 진류(陳留)의 지현(智賢)을 맡았고 나중에 예빈부사(禮賓副使)를 맡았다. 또 서주(舒州), 해주(海州), 태주(泰州) 지주(知州)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나중에 경성으로 불려와 비서소감(秘書少監)을 맡았고 나중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승진했다. 이 직책은 황제의 조령(詔令)을 기초하고 기밀에 참여해 권한이 아주 컸다. 즉, 이때 그는 도인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중서문하’의 청귀한 요직을 맡은 것이다.

송 휘종 선화(宣和) 2년(1119년) 송강(宋江)이 양산에서 기의해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조정의 관군은 감히 예봉을 건드릴 수 없었다. 선화 삼년 장숙야는 재차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미리 매복을 설치하고 송강의 투항을 압박했다. 나중에 또 제남부(濟南府) 지부(知府)로 갔는데 이 기간에 수천 명의 도적을 제거한 전공으로 승진해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청주부(靑州府) 지부가 되었다.

흠종 정강(靖康) 원년(1126년) 금나라 군대가 대대적으로 남침하자 장숙야는 상소를 올려 기병을 뽑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금나라 군대가 개봉 가까이 다가오자 흠종은 즉시 명령을 내려 입경하여 호위하라고 했다. 장숙야는 명령을 받은 후 중군(中軍)을 통솔했고 그의 아들 장백분(張伯奮)이 전군(前軍)을 통솔하고 다른 아들 장중웅(張仲熊)이 후군(後軍)을 통솔하여 모두 삼만 명이 다음날 출발했다.

도중에 금나라 군대를 만나자 장숙야는 군대를 이끌고 싸우며 전진했다. 11월 15일 개봉에 도착하자 황제가 남훈문(南薰門)까지 나가 그들을 접견할 때 군대의 진용이 여전히 질서정연했다. 황제가 기뻐하며 그를 자정전(資政殿)학사(學士)로 승진시키고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라고 했다. 얼마 후에는 또 ‘첨서추밀원(簽書樞密院)’으로 승진시켰다. 추밀원에서 나오는 모든 군사명령이 그의 서명이 있어야지만 유효한 청귀한 요직이다.

이에 장숙야는 중서문하와 추밀원 ‘이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니 도인의 예언이 완전히 들어맞은 셈이다. 나중에 송 흠종은 장숙야의 권고를 듣지 않고 금나라 사람의 보장을 믿고 적진에 들어가 담판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금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정강의 변”이 발생했다. 장숙야는 정강의 변 와중에 순국했다.

남송 조정은 사후에 장숙야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했다.

애초 도인은 무엇 때문에 청년 장숙야가 ‘이부’의 고관이 될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이는 사람의 운명은 신령(神靈)이 배치한 것임을 설명하는데 때문에 비로소 사주명리로 미리 예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인은 왜 그에게 ‘정강의 변’을 미리 알려주진 않았을까? 내 생각에 아마도 ‘정강의 변’은 개조환대(改朝換代)의 필연이니 역사의 필연을 교란함을 허용하지 않기에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장숙야의 성격이나 그가 가진 권력으로 보아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황제가 금나라 병영에 들어가 담판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자료출처: 《투할록(投轄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