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진(李道真)
【정견망】
4. 왕패의 도(王霸之道)
오제(五帝) 이후 대우(大禹)가 하조(夏朝)를 개창해 ‘가천하(家天下 한 가문이 세습하며 천하를 통치)’하면서 조대제(朝代制)가 선양제(禪讓制)를 대체하면서 중화 역사는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로 진입한다. 동시에 중화민족도 제도(帝道)치국의 시기에서 왕도(王道)치국의 시기로 들어갔고 삼황오제의 시기는 삼왕오패(三王五霸)의 시대로 들어간다.
《예기•시호》에서는 하조의 개창자 대우(大禹)와 상조의 개창자 상탕(商湯) 주조의 개창자 무왕(武王)을 모두 왕(王)이라 칭했다.[16]
우리는 먼저 ‘왕(王)’에 담긴 함의에 대해 알아보자.
《설문해자》에서는 “천하백성이 앞 다퉈 귀순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가리켜 왕이라 한다. 공자와 동중서는 왕(王)은 수선 하나와 횡선 3개로 구성되는데 횡선 3개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가리키니 천지인 삼재를 관통하는 이를 일러 왕이라 한다”[17]고 했다.
《관자•진법편》에서는 “덕(德)에 달통한 이를 일러 왕(王)이라 한다.”[18]고 했다.
《예기‧시법》에서는 “인의(仁義)가 존재하는 이를 가리켜 왕(王)이라 한다.”고 했다.
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치국(王道治國)의 시기로 들어오자 인심(人心)은 더 복잡하고 혼탁해져서 천하는 대도(大道)에서 더더욱 빗나갔다. ‘왕’이 천지인을 관통해 예악(禮樂)을 제정해 인류의 행위를 바로 잡고 천하를 교화(敎化)하며 천하에 인의(仁義)를 널리 실천하니 천하가 앞 다퉈 귀부하고 복종했다.
《태평경(太平經)》에서는 “제(帝)는 천지 사이에서 도(道)의 지혜를 깨달아 천하가 조화로운 평형으로 돌아가 흉험(凶險)에서 벗어나게 했기 때문에 제(帝)라 부른다. 왕(王)은 인의(仁義)를 시행해 백성과 만물이 그에게 귀순해도 해침을 받지 않기 때문에 왕이라 부른다”[19]고 했다.
제가 통치하는 제치(帝治) 시기에 인류는 대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때문에 제(帝)는 천지 만물 사이에서 도를 깨달아 천지만물의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기제를 발견해 덕(德)을 세우고 이를 통해 천지만물이 조화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이 통치하는 왕치(王治)시기에 이르면 인류는 대도에서 이미 너무 멀리 벗어나 더는 도(道)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도덕(道德)에 의지하고 예악(禮樂)을 수단으로 삼아 외재적인 규범으로 천하 백성의 언행이 인의(仁義)의 표준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천하가 상대적으로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했으며 백성과 만물이 그에게 귀순해도 해침이 없었다.
다시 춘추시기에 이르러 주(周) 왕실이 쇠미해지자 왕도가 쇠약해졌고 인심과 도덕이 더욱 패괴(敗壞)해져서 예악이 붕괴되자 천하 제후들이 앞 다퉈 패자(霸者)를 칭하면서 이에 패도(覇道)가 천운에 따라 생겨났다.
《춘추》에서는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 송양공(宋襄公), 초장왕(楚莊王)을 오패(五霸)라 칭했다.”[20]
《관자•진법편》에서는 “무력적인 수단을 통해 천하를 위협해 굴복시킨 이를 가리켜 패라 한다.”고 했다
《맹자・공손추상》에서는 “힘으로 인의(仁義)를 가장하는 이가 패(覇)이니 패자가 되려면 반드시 대국(大國)이 있어야 한다. 덕으로 인을 실천하는 사람이 왕(王)이니 왕자는 큰 나라가 없어도 된다. 탕(湯)은 사방 70리로 왕이 되었고 문왕(文王)은 사방 100리로 왕이 되었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함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서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이다.”[21]라고 했다.
맹자의 이 말은 왕도와 패도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패도(覇道)시기에 이르면 치국의 방식도 이미 인의로 교화해서 인심을 귀순시키는 것에서 무력이란 강제적인 수단으로 천하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변했다.
동한(東漢) 시기 환담(桓譚)은 《신론(新論)•왕패(王霸)》에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삼왕오패(三王五霸)가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천하의 군왕(君王)을 대표한다. 삼황(三皇)은 도(道)로 세상을 다스렸고 오제(五帝)는 덕(德)으로 만물을 교화했으며 삼왕(三王)은 인의(仁義)를 시행했고 오패(五霸)는 권술과 지략(權智)에 의존했다.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 그 어떤 법령제도도 없이 국가를 크게 다스리는 이를 가리켜 황(皇)이라 한다. 법령제도는 있지만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도 국가를 다스리는 이를 가리켜 제(帝)라 한다. 착한 사람에겐 상을 주고 악한 이를 처벌해 천하제후들이 귀순해 신하로 복종하게 하는 이를 왕(王)이라 한다. 무력에 의지해 제후들과 서약을 맺고 신의(信義)를 가장해 천하를 바로잡는 이를 패(覇)라 한다.
왕(王)이란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왕이 인의로 천하에 혜택을 주니 백성들이 앞을 다퉈 그에게 돌아간다. 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치국(王道治國)은 우선 백성들을 해치는 것을 없애 백성들의 의식이 풍족하게 만든 후에 예의(禮義)로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刑罰)로 굴복시켜 권선징악의 목표에 도달해 천하를 편안하고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패도치국(霸道治國)에서는 큰 공 세우길 좋아하고 군주는 존귀하고 신민(臣民)은 비천하다는 명을 내려 국가권력을 전부 군주 한 사람의 손에 집중시켜 군주 한 사람이 명령을 내리고 생사여탈권을 쥔 후에 강제력과 위세로 법령을 실행해 상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천하 백성이 모두 다스려지는 것이다.…중략…. 공자 문하에서는 오척 어린 아이라도 오패의 일에 대해서는 거론하려 하지 않았으니 인의를 어기고 권모(權謀)를 숭상했기 때문이다.”[22]
여기서 환담은 중화 치국 과정의 특징을 비교적 정확하게 논술하는데 삼황에서 시작해 주조(周朝)에서 끝난다. 중화 역사 속에서 치국의 과정은 모두 황도(皇道), 제도(帝道), 왕도(王道), 패도(霸道) 4시기를 거쳤다. 이 전체 과정을 두루 관찰해보면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화치국 과정의 발전과 사회 인심의 타락이 같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회인심과 도덕의 층차가 치국(治國) 방식과 사회형태를 결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전국 말기에 이르러 진(秦)나라가 패자를 칭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나머지 6국을 소탕하고 진조(秦朝)를 수립했다. 그는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봉건제를 폐지해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중화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대일통(大一統) 왕조를 수립했다. 때문에 진시황은 ‘조룡(祖龍)’으로 불린다. 그는 또 ‘황(皇)’과 ‘제(帝)’를 합해 ‘황제(皇帝)’라는 존호를 최초로 만들어내 이후 역대 조대의 발전을 위한 천추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
16. 《예기・시호》:「夏禹、殷湯、周武王,是三王也。」
17. 《설문해자》:王,天下所歸往也。董仲舒曰:「古之造文者,三畫而連其中謂之王。三者,天、地、人也,而參通之者王也。」孔子曰:「一貫三為王。」凡王之屬皆從王。李陽冰曰:「中畫近上。王者,則天之義。」
18. 《관자•진법편(真法篇)》:「通德者王,謀得兵勝者霸。」
19. 《태평경(太平經)》:帝者,為天地之間作智,使不陷於兇惡,故稱帝也。王者,人民萬物歸王之不傷,故稱王。
20. 《춘추》:齊桓、晉文、秦繆、宋襄、楚莊是五伯也。(《風俗通義》引)
21. 《맹자•공손추상》:以力假仁者霸,霸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裡,文王以百裡。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心悅而誠服也。
22. 《신론(新論)•왕패제2(王霸第二)》:夫上古稱三皇、五帝,而次有三王、五霸,此皆天下君之冠首也。故言三皇以道治,而五帝用德化;三王由仁義,五霸用權智。其說之曰:無制令刑罰,謂之皇;有制令而無刑罰,謂之帝;賞善誅惡,諸侯朝事,謂之王;興兵眾,約盟誓,以信義矯世,謂之霸。王者,往也,言其惠澤優遊,天下歸往也。……夫王道之治,先除人害,而足其衣食,然後教以禮儀,而威以刑誅,使知好惡去就,是故大化四湊,天下安樂,此王者之術。霸功之大者,尊君卑臣,權統由一,政不二門,賞罰必信,法令著明,百官修理,威令必行,此霸者之術……傳曰:「孔氏門人,五尺童子,不言五霸事者,惡其違仁義而尚權詐也」。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42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