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高潔)
【정견망】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天在看)는 이 말은 고인(古人)이 오늘까지 전해온 속담이다. 하지만 속담이라고 해도 속된 것은 아니며 이는 틀림없이 확실한 사실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머리 위에 있는 ‘삼척신령(三尺神靈)’을 벗어날 수 없다.
얼마 전 정견망에 근추(瑾秋)라는 저자가 《재해 배후에는 성군(星君)이 있고 인간세상에서 신의 자비가 있다(火災背後星君顯 神的慈悲在人間)》란 문장을 발표했다. 작자는 파룬궁 수련자이다. 다음은 이 문장의 일부이다.
내가 막 법을 공부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건너편 건물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데 불이 났다, 불이 났어!”
내가 보니, 맞은편 건물에 있는 한 집에서 불이 났고, 거실에서 불이 번져 불길이 솟아올랐는데 기세가 대단해서 곧 침실에도 불이 붙었다.
나는 베란다로 나와서 건너편 건물 화재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왜 소방차가 오지 않을까?’
잠시 후 소방차가 오더니 건물 아래에 멈춰 섰고 어떤 사람이 지휘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내가 보니 소방차의 수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아주 높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불길이 잡혀 불이 꺼졌다.
내가 돌아와서 계속 법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 건물에 불이 번지는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맹렬한 불길 속에서 화덕성군이 나타났는데 얼굴은 붉었고 긴 수염이 있었다. 내가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는데 눈앞의 광경이 바뀌더니 소방차가 언제 오는지, 누가 지휘하는지, 화재로 얼마나 많은 재산을 파괴하는지 등이 정해져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고 또 얼마나 배상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주관하는 관원[천관(天官)]이 명세서를 갖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화덕성군이 다시 나타난 것을 봤는데 그가 내게 말했다.
“이 집 사람이 덕(德)을 잃은 행동을 했는데 장사를 하면서 양심을 속여, 조왕야(灶王爺 부뚜막 신)께서 기록하셨소. 나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화재로 그의 재산을 줄여 죄업을 없애려합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히 그렇다, 사람의 재앙은 업채(業債 업의 부채)와 서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모두 물과 불은 무정하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의 업채(業債)를 줄여주는 것이다. 세상에 어디 우연한 일이 있겠는가!’
나중에 나는 또 가부좌 중에 화덕성군을 보았다. 성군(星君)은 불처럼 붉은 두루마기를 쓰고 있었다. 두루마기 위에는 불타는 구름과 화염(火焰) 무늬가 있었고, 손에는 붉은 책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시기, 어느 집에 화재가 발생할 것인지, 화재의 크기 및 피해 상황, 화재 원인 등이 모두 열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원인은 사람들이 찾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가령 무슨 선로(線路)가 노후화 되었다든가, 담배꽁초 때문이라든가, 아이들의 불장난이니 이런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원인은 사람이 덕(德)을 손상시키는 일을 해서 악업(惡業)을 지어 일종의 천벌을 초래해서 화신(火神)이 집행하는 것이다.
어릴 때 노인들이 흔히 말하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옳은 것이고 우리가 다년간 중공 당문화(黨文化)에 세뇌당한 소위 ‘우연성’이 틀린 것이다. 중공은 신불(神佛)을 부정하는 동시에 선악에 보응이 있음을 부정하며 인간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우연’ 또는 ‘인위적 요소’ 탓으로 돌린다. 이는 설득력은 없지만 이런 당 문화의 삿된 설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과 신(神)의 연계를 끊어버리고 중국인과 오천년 동안 전승되어 온 전통문화의 맥을 끊고, 중화민족을 뿌리 없는 민족으로 만들어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게 했으며, 중국인의 신성(神性)의 내함 역시 끊어버리고 대신 공산사당의 가짜・사악・투쟁의 요소를 주입했기 때문이다.
이는 몹시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고 신불(神佛)은 사람의 선악, 업력의 크기에 따라 사람의 미래를 배치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당문화(黨文化)에 따라 나쁜 일만 하고,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며, 좋은 사람을 바보로 여기면, 오직 업만 쌓고 덕을 쌓을 수 없어 온몸이 시커먼 업력으로 가득 차는데 이런 생명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사람이 될 기회조차 없으니 그저 지옥에 떨어져 무생지문(無生之門)에 들어가 형신(形神)이 전멸(全滅)하고 생명이 영원히 소훼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세간에서 사람을 미혹시켜 나쁜 짓을 저지르게 하는 진정한 목적이다.
중공이 하는 말과 행동은 인간의 진정한 이치가 아니다. 인간의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가늠하는 표준은 하늘의 이치이며 하늘의 이치는 영원불변한 것이다. 사람의 행동은 집권당의 언행(言行)을 포함해, 하늘의 이치에 부합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비로소 장구(長久)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일부 유구한 가문을 연구했는데, 그들이 왜 이렇게 큰 복이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조상이 두터운 덕을 쌓았고 후손들이 계속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았기 때문에 가문이 지속되고 아름다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나쁜 일을 하고 업을 지은 가문이 오랫동안 지속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서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미국 학자 윈십(A.E.Winship)이 1900년 한 가지 연구를 진행했다. 즉, 신앙이 있는 가족과 무신론자 가족을 비교한 연구를 통해 《주크와 에드워즈(Jukes-Edwards)》란 책을 썼다. 이 연구는 기독교를 믿는 에드워즈와 무신론자로 유명했던 마크 주커스 등 같은 시대 두 가문을 비교한 것이다. 200년 후, 어떤 사람이 에드워즈와 주커스 가문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통계를 냈는데 그 결과는 이랬다.
(1) 신앙이 있었던 에드워즈 가문 후손의 인구는 1394명이었다. 이중 대학교수 100명, 대학 학장 14명, 변호사 70명, 판사 30명, 의사 60명, 작가 60명, 목사 및 신학자 300명, 의원 3명, 부통령 1명 등을 배출했다.
(2) 무신론자 주커스 가문의 후손은 총 903명이었다. 그 중 불량배 310명, 13년 이상 수감된 죄수 130명, 살인자 7명, 술꾼 100명, 도둑 60명, 기생 190명, 상인 20명(이 중 10명은 감옥에서 사업을 배웠다) 등이다.
《도덕경·제79장》에서는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니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常與善人).”고 했다. 즉, 선한 사람은 복이 많고 악한 사람은 화(禍)가 많다. 하늘의 이치는 절대적으로 공평한 것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다.
중공은 사악한 본성에서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했고, 상투적인 박해 수단인 거짓말로 길을 열고, 이익과 협박으로 수많은 세인들을 생명을 소훼할 악보(惡報)로 끌어들였다. 반대로 파룬궁 수련자들은 신불(神佛)의 뜻을 받들어 진상을 알렸다. 하늘의 수많은 신불들이 사람의 일사일념(一思一念)과 사람의 선택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생사(生死)가 달린 중요한 문제이자 생명이 장차 신우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에 관한 관건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중공이 하려는 일은 여전히 세인이 진상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고, 세인이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을 해치는 것인데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어찌 바라볼 수만 있겠는가? 그래서 중공은 지금까지 죽어라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또한 사람이 진상을 아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하늘의 이치는 공평한 것으로, 사람이 이 대선(大善)과 대악(大惡)이 결전하는 중요한 순간에 용감하게 파룬궁 진상을 선택할 수 있다면, 신불은 그에게 밝은 미래를 줄 것이다. 반대로 진상을 거듭 거절하면서 여전히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하고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한다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악보(惡報)일 뿐이다.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는 너무나 많은 행운아들과 너무나 많은 불행한 이들이 있다. 그 원인을 연구해보면 행운아들은 진상을 똑똑히 알고 선택했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진심으로 공경하게 외우는 동시에 친지들에게 진상을 알려 큰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반면 불행한 이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추종하며 갚을 수 없는 악업을 지어 악보를 당한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 빨리 진상을 알고 바른 길을 선택해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바로잡고, 전통으로 돌아가, 신불(神佛)이 인도하는 복보(福報)의 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만이 오늘날 가장 정확한 선택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