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평(曉平)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과 악의 표현 중에서 각자 나름대로 얻을 결과를 모두 충분히 체현하였다. 중생들이여, 장래의 위치는 당신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내 기억에 2000년에 이 법을 읽었을 때, 수련인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선과 악의 선택과 배치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또한 나가서 진상을 알리는 것이 옳다 해도 자신이 얼마나 강한 칠정육욕(七情六慾)을 지니고 있는지 몰랐다.
사부님께서는 《2018년 워싱턴DC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생활 중에서, 생업 중에서, 부동한 환경 중에서, 그들이 마주친 문제, 생각하는 사고(思考), 줄곧 그들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의 위치를 정하고, 모두 선과 악의 대결 중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한다.”
1. 호법신의 채점
정견망의 한 문장에서 호법신(護法神)이 날마다 제자들에게 점수를 매긴다고 언급했다. 내가 이해하기에 한편으로는 점수가 더해지는데 세 가지 일을 한 양과 질 등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수가 깎이는데, 일사일념(一思一念)으로 세분화되어 일념(一念)만 잘못 움직여도 점수가 깎인다.
고생스레 쌓은 점수가 이렇게 깎여나가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우리는 매일 얼마나 많은 염두가 있는가? 일념(一念) 일념(一念)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배치하고, 배치하고 또 배치하는데, 위타(爲他)한 선념(善念)을 움직이면 옳은 것이고, 위사(爲私)한 악념(惡念)을 움직이면 즉시 기록되고 점수가 깎이며, 아마도 미래의 어떤 난(難)이나 관(關)이 대응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엄숙하다. 이것은 현재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과거에 나는 기본적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사욕(私慾)에 통제 당했다. 법(法)을 배우고 공(功)을 연마하는 외에, 누구에게 불만을 갖거나,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등의 염두가 늘 나타나곤 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면 기뻐하고 과시했으며, 남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부러워하거나 질투했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나씩 늘어놓으면 수련인(修煉人)에 부합하기는커녕 좋은 사람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수련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동시에 또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매 일념(一念) 속에서 가급적 남을 혐오하거나 짜증내며 불평하는 등 각종 사람마음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가리지 말며, 동수나 속인, 가족, 아이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급적 겸손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 선(善)하지 못한 염두가 나오면 제때에 즉시 배척하고, 참회하고, 보완해야 한다.
2. 동수 입장에서 생각하기
개인적으로 보기에 남의 고통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지 여부가 선(善)이 의지하는 근거가 된다. 인터넷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엄마가 2살 아들에게 그림을 보고 선택하게 했다. 아이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그림 대신 늑대가 풀을 뜯어먹는 그림을 선택했다. 이유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으면 양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가 기어코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그림을 골라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이는 엉엉 울면서 “그럼 양이 아파요, 양이 아프다고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엄마가 늑대가 풀을 먹는 그림을 선택하는데 동의한 후에야 겨우 회복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로 선(善)인데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이 고생스러운 것을 보시고 자비심으로 널리 중생을 구도하려 하신다.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선이 의지할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남의 불행을 즐거워했고 남의 고통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들어도 가급적 늘 진심으로 동수와 함께 하려고 하며 때로는 사부님께 동수를 도와달라고 청한다. 내 생각에 남을 위해 기뻐하는 마음을 많이 내는 것이야말로 불성(佛性)을 기르는 것이자 자신에게 선(善)의 장(場)을 펼쳐주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붓다는 지옥의 중생을 구하려 했지만, 그들은 생전에 선념(善念)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구도해줄 인연이 부족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과거에 선념(善念)을 품고 밟아 죽이려 했던 거미를 놓아준 인연이 있는 것을 발견한 붓다는 거미줄을 지옥에 내려 그를 구하려 했다. 즉, 선념은 바로 자신의 미래에 복을 깔아주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나의 염두는 마치 악(惡)의 장(場)을 펼쳐 자신에게 복덕(福德)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았으니 생각해보면 정말 두렵다.
그러므로 동수 입장에서 장심비심(將心比心 역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해야 한다. 자신이 화를 다스리지 못할 때, 자만하거나 게으를 때… 나 자신은 배후의 고통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안다. 지금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운데, 가령 화를 낸 후 낙담하거나 허영을 누리다가 마난을 겪는 등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화를 낸 동수 자신도 고민하지 않겠는가? 정진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넘기 힘든 마음의 매듭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도와줄 수 있든 없든 적어도 남의 고통을 느낄 순 있어야 한다. 매 사람마다 지닌 물질이 다르므로 나의 고민이 아마 남에게 없을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으므로 절대로 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문장에서 (대략적인 뜻이다) 구세력이 일부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집착을 배치했다고 언급했는데, 사실 역사적으로 장기간 ‘배양된’ 집착심이다. 나는 어떤 동수는 강퍅하고, 어떤 이는 우울하며 어떤 이는 비정상적이고 지혜와 자비가 부족함을 인식했다. 눈앞에 놓인 이런 것들이 바로 수련 중에서 생명의 실질적인 어려움인데, 다른 사람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닌가?
우리에게 만약 지혜가 있다면 (동수를 위해) 꺼내주는 것이 가장 좋고, 법(法)에는 마음의 매듭을 풀도록 도와주는 법리가 있다. 설사 우리가 지혜를 꺼내주진 못하더라도 마음에 자비를 품어야 한다. 비난과 질책은 다른 사람더러 당신 얼굴에 흉터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의 아픈 곳을 찌르는 의미 외에 심지어 동수를 밖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 당신 자신의 상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대해주길 바라는지 당신이 생각해 보라?
어떤 동수는 아름답게 포장된 것 같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껍질을 깨는 것 역시 쉽지 않고, 어떤 이는 능력이 아주 강해서 자신을 낮추기 어려워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미혹 속에 있는 생명의 어려움이니, 눈에 거슬려 하지 말고 입장을 바꿔서 이해해야 한다. 동수는 일체(一體)이니 곧 다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비웃으며 질책하지 말고 선(善)하게 대하며 지지해주어야 한다.
나는 기세가 너무 강한 동수를 싫어하는데 이는 사실 나 자신이 너무 강한 것을 설명한다.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라, 이런 동수를 마주해서 나는 어떤 좋은 방법으로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圓容)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반감(反感)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법리에 따라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상대의 장점을 보아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또 진상을 아주 잘하는데 이것은 지지해야 한다. 둘째, 상대방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의(善意)적으로 문제를 지적하거나, 글을 써서 소통하거나, 또는 발정념으로 도와주는 등 자신이 생각한 방식으로 지지해야 한다.
나는 자신이 보기에 사람마음이 무겁다고 느끼는 동수에 대해 반감을 갖는데, 실질적으로는 나의 사람마음이 충격 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남이 나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데, 사람마음이 무거운 어떤 동수는 남을 잘 부정한다. 뿌리를 캐보면 이는 남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은 상대방이 나의 탐욕을 만족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남의 인정을 바라고 남이 잘 대해주길 바라는 등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반감의 배후에 원한심(怨恨心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원망하며 미워하기 때문이다. 남이 눈에 거슬리고 반감을 갖는 것은 모두 선(善)하지 못한 사람마음이다.
3. 질투심은 아주 위험
요즘 나는 진심으로 한 동수의 아이 때문에 기쁘다. 아이의 상태가 정말 좋으니, 부모가 얼마나 기쁘고, 사부님께서 얼마나 뿌듯해 하실지 생각하면서 아이의 엄청난 발전에 대해 감사드린다. 하지만 2년 전만 해도, 나는 이 아이가 좋아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의 집안과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늘 남의 좋은 일은 나의 나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뿌리 깊은 질투심은 정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천선록(遷善錄 역주: 개과천선한 기록)》에 따르면 춘추시대 장원(蔣瑗)에게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홉 명이 악질(惡疾 몹쓸 병)을 앓았다. 다른 사람이 왜 이런 재앙을 초래했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보면 평생 무슨 큰 나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늘 남을 질투했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미워했고, 누군가 내게 아첨하면 기뻐했으며, 남이 착한 일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의심하면서 믿지 않았고, 남이 나쁜 일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잘 믿었으며, 남이 좋은 것을 얻는 걸 보면 자신이 잃은 것 같고, 남이 손실을 보면 마치 내가 뭔가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똑똑히 알고 나서 장원은 질투하는 악습(惡習)을 고쳤다. 그러자 아이들의 병이 점차 치유되었다.
어떤 동수는 과거에 나처럼 남의 불행을 아주 기뻐했다. 우리는 정말로 생각해봐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아프지 않은가? 만약 남의 아픔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 여기고 심지어 몰래 기뻐한다면 당신의 선한 마음(善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 생각에 이는 하늘의 법을 어긴 것으로, 우리가 속인들에게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른다고 알려준다면, 우리 자신도 하늘의 이치를 공경해야 하지 않는가? 하물며 윤회 중에서 우리 주변 사람들은 아마 내 가족이었을 수 있고, 남의 아이 역시 내 아이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이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떻게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금생의 배역만 중시하며 생명의 진상을 잊어버리는가?
진심으로 동수를 선하게 대해야 하며 남의 아이가 수련에 정진하고 각종 방면에서 우수한 것을 보면 기뻐해야 하며, 성격이 나쁘거나 사상업(思想業)이 무거운 것을 보면 이해해야 하며 각종 좋지 않은 상태를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이 모든 면에서 잘 되기를 원해야 한다. 설사 동수에게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가급적 상대방이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바로잡힐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을 대하는 마음으로 남을 대해야 한다. 지금 나는 동수의 고민을 들으면 내가 마땅히 지지할 것을 메모해두고, 수시로 조용히 발정념을 한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말씀하셨다.
“구 우주의 생명으로서 일체 생명의 요소를 포함하여 정법 이 일에서, 나의 선택 중에서, 모든 생명들이 모두 내가 선택한 대로 그것을 원용(圓容)하고, 당신들의 가장 좋은 방법을 내놓으며,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고치려하지 말고 내가 한 말에 따라 그것을 원용하는, 이것이 바로 우주 중 생명의 가장 큰 선념(善念)이다.”
사부님께서는 매 한 제자를 위해 온갖 마음을 다 쓰시며, 제자들 일체(一切)의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가호 및 거대한 감당과 떼어놓을 수 없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동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나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데, 내가 과거에 질투하고 동수가 잘되지 않기를 바란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사부님께서는 1억이 넘는 제자들의 사부님이시자 모든 중생의 창세주(創世主)시며 사부님 마음속에는 모든 중생을 다 담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나 혼자만 잘 되기를 바랐는데, 그럼 구세력과 비슷하지 않은가?
4. 신이 중시하는 것
법(法)에서 이해하기에 신(神)의 눈에 가장 대단한 것은 묵묵히 원용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이것이 왜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아는데, 신은 자아를 내려놓는 것을 중시하신다. 또한 신(神)은 성적의 좋고 나쁨이나 의견의 높고 낮음은 중시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주특성 ‘선(善)’이란 바로 위타(爲他)한 것으로 위타한 마음은 신(神)의 가지를 받을 수 있다. 위사(爲私)한 것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제아무리 사심(私心)을 은폐하고 계획이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결국에는 우주특성의 제약을 받게 된다.
내가 남을 돕기 위해 시간을 더 많이 쓰면, 마치 내가 손해를 보고 바른 일을 그르친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남을 돕는 일, 특히 내가 조역이 되어 힘을 들여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神)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다. 또 일을 마치고 나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명예며 정(情)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럼 신은 당신을 더 소중히 여기신다.
신의 눈은 번개처럼 밝아서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 사람의 방식은 너무 피상적이라 결과와 성적에 중점을 두는 반면, 신(神)이 문제를 보는 것은 전방위(全方位)적이고 입체적으로 심사한다. 법(法)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아주 고층차의 대각자의 눈은 마치 파리의 복안(複眼)과 같아서 모든 층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오직 곳곳에서 법(法)에 따라서 해야만 신목(神目 신의 눈)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내가 인식하기에 당신이 한 일을 남에게 언급하지 않으면 수확이 더욱 클 것이다. 남에게 알리면 이미 ‘좋은 점’을 누린 것이 된다. 만약 당신 마음속에서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수확이 더욱 클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자신이 대가를 치른 것을 기억하는 것 역시 모종의 ‘좋은 점’을 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 공로부(功勞簿 공을 세운 기록)에 한 획을 긋는 배후에는 여전히 자아를 실증하거나 심지어 하늘의 공을 탐하는 것이다. 철저히 내려놓아야만 가볍게 전진할 수 있고 수련에서 수확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더욱 소중한 것이다. 자신의 희생, 성적, 진보 등을 담담히 보아야 한다. 언제든 ‘좋은 점’을 누리는 것은 마치 돈을 벌어서 바로 쓰는 것과 같고, 더 소중한 것을 사기 위해 저축하는 게 아니다.
착실하게 수련을 잘하는 일부 동수들은 인내심이 있어서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일을 가리거나, 자신의 일과 남의 일을 구분하지 않으며, 너무 높은 목적을 추구하거나 성급하게 목적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참지 못하는 원인은 자신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일을 정성껏 하는 것이 불성(佛性)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이며, 하면 할수록 더욱 착실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일화가 있는데 보살이 수다스러운 노인으로 변해 부처 수련을 하는 사람을 고험했다. 그 사람은 결국 화가 폭발해 고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내 생각에 조급하고 참지 못하는 배후에는 원한심을 포함해서 사람마음이 아주 많다. 왜냐하면 좋은 일이 없기에 원망하기 때문이다. 동수의 문장에서는 “능력 있음(能耐)”이 바로 인내(忍耐)할 수 있는 거라고 언급했다.
5. 작은 일부터 닦다
어느 날 동수가 보낸 메시지를 봤는데 나의 첫 일념은 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런 염두가 아주 악(惡)한 것을 깨닫고, 전력을 다해 배척하자 곧장 업무에 진전이 있었다. 나는 사부님의 격려임을 느꼈다. 사실 이 얼마나 작은 일인가? 염두가 바뀌면 다른 공간에서는 곧 변한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마음 닦음은 작은 염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은 것을 닦지 않으면 큰 것은 더욱 어렵다. 먼저 걷고 나서 뛰는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 눈만 높고 재주는 없는 이런 것은 당문화(黨文化)의 사유다.
한번은 내가 식기를 치울 시간이 없어서 가족이 정리를 도와줬지만 잘하지 못하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빠서 앞으로는 도와주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 그녀가 정말 나를 돕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돕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뿐이며 효과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작은 일에서 아주 많은 집착이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우선 사람을 나쁘게 생각했는데 왜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남들도 나처럼 체면치레만 한다고 여긴 것이다. 또 하나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법(法)에서 이해하기에 운전자가 차를 빨리 몰다가 사람을 치어 고통을 주었더라도 고의가 아니면 마땅히 이해하고 용서하며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선량하고 관대한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대하겠는가?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종종 입을 다물고 양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상대방에게 당신이 잘못해서 나를 이렇게 번거롭게 했다고 말했고, 기어코 이렇게 상대방을 한번 공격하려 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왔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상대방이 도와줬다고 여기면 상대의 마음이 더욱 편하지 않겠는가? 내가 원망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내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지만 배후에는 손해를 볼 수 없다는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종종 실수해서 자신의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은 조금도 지체해선 안 된단 말인가!
나는 수련에는 정말로 작은 일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속의 사람마음이 선하지 않았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았으니 그 어떤 마음도 작지 않다. 나는 곧 이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설사 다음에 가족이 또 도와주다가 잘못한다 해도 전혀 무슨 시간을 지체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요만한 시간을 들여 심성(心性)을 제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가치가 있다.
6. 미혹속의 사람마음
나는 일찍이 다른 사람과 이익문제로 격렬히 다퉜는데, 어느 날 새벽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온 가족을 흔들어 깨웠고, 남루한 옷차림에 제정신이 아닌 듯한 어떤 사람이 밖에서 연거푸 문을 두드렸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이렇게 기이한 일이 생긴 것은 분명 사부님의 방할(棒喝)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이를 알면서도 사람마음이 너무 강해서 다년간 계속해서 집착했다. 이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데 이 일 역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사람 마음이 귀신을 불러온다는 것을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정진요지 3》〈각성하라〉)
비록 이익을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법리에 대해 알았음에도, 나는 전혀 다툼이 줄지 않았고, 다년간 집착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또 구세력이 집착을 강화하는 환경을 배치해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법리와 점화를 알면서도 모두 무시했고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자신이 화를 낸 후 화재 경보가 울리고, 화를 내고 나면 가스가 새거나, 색욕에 집착하고 나면 꿈에 뱀이나 화장실・똥 같은 것을 보았고 더욱이 동수가 명리정(名利情)과 색욕 등에 집착한 교훈도 보았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깨어나게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난(難)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말하면서도 자신을 대조하지 않았다.
두 동수가 대법 일을 하는데 큰 노력을 했지만, 화가 많고 사람마음이 무거워 오랫동안 고통 스레 병업(病業)을 겪은 후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한 명은 또 색(色)에 관한 문제도 있었다. 나는 화를 내는 배후에는 때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능하다”며 싫어한다. 나는 “무능하다”는 지적을 받는 이들이 대부분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인 것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은 약할지 몰라도 도덕은 약하지 않다. 성실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정말 좋단 말인가? 말을 잘 할수록 더 신중하게 해야 하며 덕(德)을 중시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나는 일찍이 정환(情幻)속의 가벼운 맛에 취해 머리 부위에 극심한 불편함과 기타 마난을 초래한 적이 있다. 나는 자신이 색정(色情)과 사념(邪念)으로 인해 다른 공간에서 색욕의 물질을 초래했고, 쌍방이 서로 좋아한다고 여기고, 남이 내게 관심이 있다고(대개는 자신이 정이 많아서 생긴 착각) 느끼며 다른 사람에게 감정이 있다 여겼다. 사실은 색욕 물질의 작용에 자아(自我)와 자아도취가 더해진 것으로 ‘진정한 사랑’이나 ‘지기(知己)’와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다른 공간에서 사상이 바르지 않은 사람을 조종해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기란 아주 쉬운데, “귀혼(鬼混)”이니 “매력(魅力)”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마 다른 공간의 진상일 것이다.
[역주: 여기서 귀(鬼)는 귀신이고 매(魅)는 도깨비와 같은 다른 공간의 생명체를 가리킨다. 중국어에서 남녀 사이의 정당하지 못한 야합을 ‘귀혼’이라 하는데 직역하면 귀신과 한데 섞인다는 말이다. 또 우리말에서도 많이 쓰는 매력이란 단어는 도깨비와 같은 요괴의 힘이란 뜻으로 다른 공간의 생명체가 사람의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중국어의 내함이 대단힌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명예 방면에서 칭찬을 누리길 좋아하고 남이 띄워주길 좋아하는데 마약을 먹어도 붕 뜨는 느낌이 난다. 나는 전에 좋은 일이나 듣기 좋은 말을 즐겼지만, 사실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자극을 좋아한 것이다. 이는 만족함을 알아야 오래 즐거울 수 있다[知足常樂]는 전통문화의 즐거움과는 다른 것이다.
과거의 나를 생각해보면 정말 가련하다. 어찌 보면, 신(神)이 감히 인간 세상에 오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데, 인피(人皮)를 쓰고 미혹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 인피를 걸치면 공명(功名)이나 연인에 집착하기 쉽고, 노인이 인피를 걸치면 건강과 효자(孝子)에 집착하기 쉬운 등등.
정말로 연극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아울러 특정한 환경 하에서 이런 집착들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마치 모두 다 비슷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저지르면 불법이라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것은 인간세상의 왜곡된 이치일 뿐이며 법리(法理)는 엄숙한 천법(天法)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0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