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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의 선(善)과 악(惡)의 배치 (중)

효평(曉平)

【정견망】

7. 사과

미혹에 빠져 불성(佛性)이 깊이 매몰되었지만 표면적인 집착은 생명의 본질이 아니다. 동수들의 문장을 읽어 보면, 대법을 반대하던 일부 사람들이 나중에 법을 얻고 일부는 매우 정진하거나, 또는 일찍이 사람마음이 아주 무거웠던 동수가 이지적으로 각성한 후 수련에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면서 늘 감동받곤 한다. 때문에 나는 동수 또는 자신의 사람마음이 아무리 무거워도, 여전히 신심(信心)을 가져야 하며 부면(負面)적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생명 깊은 곳은 모두 불성이기에, 언제든 훌륭한 진수제자(真修弟子)가 될 수 있다.

법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동수는 모두 사부님께서 재배하신 깨끗한 연꽃이다. 차이점이라면 아마 어떤 연꽃은 활짝 피었지만 어떤 연꽃은 아직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동수는 굽은 길을 걷거나 또는 수련하지 않는데, 이는 아마 꽃이 중간에 시든 것에 대응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도 자비롭게 기다리시면서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데, 어떤 이들은 돌아온 탕자처럼 다시 새롭게 꽃을 피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 사부님께서 재배하시는 연꽃을 어느 하나라도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 노인들은 “스님을 때리고 도사를 욕하면 반드시 악보(惡報)가 따른다”고 말했다. 동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우주대법 수련자에 대해 불경(不敬)한 게 아닌가? 나는 일찍이 성실한 한 동수를 아주 오만하게 대했고 동수의 인식이 틀렸다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늘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했다. 꿈과 다른 방식을 통해 내가 상대방에게 너무 흉악하게 굴었다고 분명히 점화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자 곧바로 몇 가지 마난에 부딪혔다. 그 중 하나는 아주 오래 지속되었고 아울러 갈수록 더 심각해졌다. 내가 잘못을 인식하고 진심으로 동수에게 선량하지 못했음을 참회한 후에야 마난이 곧 해소되었다.

나는 일찍이 일부 동수들을 비웃거나 남몰래 속으로 비웃은 적이 있으며 또는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이 있는데 인과응보의 엄숙함을 깨닫지 못했다.

고대의 한 일화에 따르면, 목소리가 청아해서 경전을 잘 읽던 젊은 화상이, 목소리가 탁하고 둔해서 경전을 잘 읽지 못하는 노화상을 비웃으며 마치 개가 짖는 소리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이 노화상은 이미 나한과(羅漢果)를 증득했기 때문에, 젊은 화상의 말이 이미 악과(惡果)를 심었음을 알고 상대방을 자비로 일깨워주었다. 젊은 화상 역시 즉시 참회했지만 자신이 한 한마디 악담 때문에 오백 세(世) 동안 개로 태어나야 했다.

나는 또 일단 한 말은 끝가지 다 해야만 시원하게 여기는 습관이 있는데, 많은 경우 남의 상처를 찌르는 것과 같았고, 또 남의 잘못에 대해 각박하게 대했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이렇게 시원하게 끝가지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선(不善)하고 관대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나는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모두 자신에게 돌아옴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이 내 약점을 포용해주길 바란다면 나 역시 남의 아픈 곳을 찌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법의 요구에 따라 선의(善意)로 지적한다면, 출발점이 상대방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방법에서도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않는지, 다른 사람이 감당하기 어렵거나 난처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고려해야 한다. 나처럼 단번에 말을 끝내는 것은 이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바로 기점이 위사(爲私)한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과 당사자들에게 사과한다. 나는 내심의 사과가 다른 공간에서 작용을 일으킨다고 보는데 때로는 사과하고 난 후에 사부님의 격려를 느낄 수 있다. 일찍이 말과 행동으로 내가 상처를 줬던 이들에게는 내 생각에 직접 사과할 기회가 있다면 그게 더 좋다고 본다. 직접 대면하든 또는 내심으로 사과하든 모두 마음에 성의를 다해야 하며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15년 뉴욕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떠한 모순에 부딪히면 ‘나는 나 자신의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하면서 정말로 똑똑히 생각해 본 후,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 한다.”

8. 자아를 똑똑히 간파

‘쿵푸팬더’란 영화는 내게 아주 많은 계발을 주었다. 몇몇 흉악한 생명들이 열심히 쿵푸를 연마해 천하제일이 되려고 다투는데 그들은 모두 대단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사실 그들은 강대한 자아와 마성에 통제된 것으로 마도를 닦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정면적인 역할도 있고, 평범하고 외모도 별로인 소시민들이 있으며 혹은 천부적인 재능은 좋지 않지만 마음이 선량하고 한마음으로 남을 위해 마지막에 신의 보살핌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들의 성공은 바로 뭇사람의 성공이라 할 수 있고 마도를 닦는 생명의 성공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재난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전에 장점을 칭찬받는데 도취해 남들이 우러러보는 것을 누렸는데, 이런 종류의 허영(虛榮)적인 사유 방향은 마도(魔道)에 들어간 것과 비슷해서, 기점이 자신을 실증하고 다른 사람을 초월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진 후 몇 달간 십여 층 계단을 걸어 다녔는데,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어코 우세를 차지하려 했다.

나는 과거에 좋은 말재주가 부러워서 단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였고, 말솜씨가 발전한 후에는 또 매우 의기양양해 했고, 내가 하는 말이 모두 이치가 있어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청성해진 후, 이것은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임을 알고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남들이 “무능하다”고 하는 어떤 이들은 비록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교묘한 말로 인해 헛된 명성을 얻거나 또는 말을 잘해서 작은 이익을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얻은 허명과 이익은 아마 덕(德)으로 교환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에 말만 하면 폭발하는 것은 자아(自我)가 너무 강한 것으로 남에게 욕을 먹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려면 자아가 아주 약해야 한다. 남더러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어느 정도까지만 말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는 지표일 것이다. 자아가 아주 약한 사람은 남에게 욕을 먹어도 느낌이 없으며, 마치 욕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동수 갑(甲)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갑은 일찍이 농담으로 나더러 자아(自我)와 ‘이혼’하면 더는 각종 감수에 이끌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갑은 체면 등에 집착하는 것은 소위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런데 자아가 좋지 않으면 돌봐야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많은 일들이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 작년에 갑(甲)이 내게 자기(자아)를 비웃으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사실 자아가 건드려진 것이다. 그 후 가족들이 또 한번 나더러 자아를 실증하지 말자고 말했다. 그 후 갑이 내 원고를 읽다가 음침(陰沈)한 장(場)을 느꼈다고 말해 또 나를 불쾌하게 했다(자아가 부정됨). 나는 사이트에 발표된 문장을 갑에게 보여주며 내 글에 문제가 없다고 실증했다(자아를 실증).

이 일은 문득 나로 하여금 배후에 자아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리게 했고 나는 이때부터 자아를 닦아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거에 나는 자아를 닦아버리기에는 자신이 아직 너무 멀다고 느꼈다. 나더러 자아를 간파하고 닦아버리게 하시고 자아를 실증하지 못하게 하신 사부님의 절묘한 배치에 감사드린다.

나는 때때로 자신의 글쓰기와 단어 선택이 ‘정묘(精妙)’하고 인식이 ‘깊이가 있다’고 만족하며 희희낙락한다. 이렇게 자신을 치켜세우는 가소로운 생각은 모두 자아가 장난을 치는 것이다. 나는 수시로 갑의 건의를 채택해서, 자아를 ‘조소’하면서 자아에게 ‘호통’을 친다.

예를 들면, “너는 정말 너무 가소롭구나, 정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니 없애야 한다.”는 등이다.

나는 색(色) 방면에서 짝사랑에 잘 빠지는 외에 또 다른 방면에서도 혼자 착각에 잘 빠지곤 한다. 가령 남이 나를 한마디 칭찬하면 곧 상대방이 나를 인정한다고 생각되고, 남이 예의상 관심을 가져주면 곧 상대방과 친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곳곳에서 착각에 빠졌는데 이는 자아가 남들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받으며 남들이 좋아해서 없어선 안 될 존재임을 애써 실증하려는 것이다. 자아는 늘 자신의 가치를 과장하려 하는데 정말로 가소롭다.

《인민보(人民報)》에 실린 시리즈 문장 ‘대과학자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신의 뜻을 완성하다’를 보면 “자기애와 물욕(物慾)은 확실히 지옥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데 사실상 지옥은 바로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했다.

이 말을 한 스웨덴의 천재과학자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한 뜻은 위아(爲我)하면 지옥에 가고, 위타(爲他)하면 천국에 가는데, 위아에는 자신을 위하고 자기 사람을 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신의 표준으로 가늠하면 과거의 나는 지옥방향으로 향했음을 처음으로 방할(棒喝)했다.

동수 갑의 지적에 따르면 나는 사람 속에서 각종 습관이 있는데 가령, 우월감을 추구하고, 남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미워하며, 누구는 높이 보고 누구는 무시하는 등이다. 이런 사설(邪說)이 가득 차면 마치 ‘지옥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으며 이런 것들은 대법 법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5》〈무엇이 신앙인가〉에서 “성자의 말에 따르면 착하기가 어린 양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양은 얼마나 선량한가? 사람을 전혀 해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선(善)의 표준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과거에 무능하다고 경멸했던 그런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내가 사람 중의 강자라며 부러워했던 사람들보다 어린 양의 선(善)에 가깝다. 내 생각에 사람을 조금만 무시해도 곧 남을 해치는 것으로 어쩌면 눈빛이나 말투에서도 따라나올 수 있다. 오만은 큰 불선(不善)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