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련(心蓮)
【정견망】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에 대한 토론에서 출세(出世)와 입세(入世)를 둘러싸고, 어떤 사람들은 유가 사상이 입세를 강조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가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하고 ‘내성외왕(內聖外王 역주: 안은 성인 밖은 왕)’의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도가는 수련해서 도를 얻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입세와 출세 자체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자. 그런 한 가지 관점에서만 보자면 유가와 도가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공자(유가의 창시인)가 노자(도가의 창시인)를 찾아가 몇 차례 예를 질문한 것과 유가의 ‘신독(愼獨)’을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왜 유가가 궁극적으로는 도가로 귀착할 수밖에 없는지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공자가 ‘예(禮)’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不學禮,無以立).”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아마 “정말 그렇게 심각할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예’란 인정으로 서로 사귀는 한 가지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 자체가 바로 예가 붕괴된 사회이기에 예 자체를 모르기에 더는 예를 지키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공자가 말하는 ‘예’는 절대 한 가지 형식이 아니란 점이다. 유가 경전 《예기-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명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으로,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경계해서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드러나지 않는 것보다 더 보이는 것이 없고 미미한 것보다 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음을 삼간다.”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본질적 특성을 본성(천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라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를 바로 고치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는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떨어질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땅히 더 근신해야 하고,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마땅히 더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에서 벗어난 부분은 아예 감출 수 없고, 더 감춰지고 미세한 부분일수록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인이 요구하는 ‘예(禮)’다. 즉 예란 안에서 밖으로 나온 것이고 형식이란 단지 표면 한 층에 자연스레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물론 단순히 예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천성(天性)’, ‘도’, ‘교’에 대한 이해에서도 알 수 있는데, 고인은 “하루에 세 번 반성했다.” 자신에 대한 도덕적인 요구는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고, 자신의 편차를 바로 잡아 자신의 천성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사(萬事)의 기점이자 근본이며, 이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모두 노자가 공자의 스승임을 알고 있다. 공자는 노자에게 여러 차례 예에 대해 물었고 또 도를 물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은 이야기에 대해 《사기》〈노자한비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대가 말하는 사람들은 그 육신과 뼈가 모두 이미 썩어버리고 단지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또한 군자는 그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아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쑥대처럼 굴러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오. 내가 듣기에 뛰어난 상인은 물건을 깊이 숨겨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간직하고 있으나 외모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들었소. 그대의 교만한 기색과 탐욕, 태도를 꾸미는 것과 지나친 욕망을 버리도록 하시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말할 것은 단지 이것뿐이오.”
필자가 이해하기에 외부적인 것을 추구할 때는 아무리 해도 자기 내부의 편이를 보아낼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바르게 닦아야 하기에 이 방향은 통할 수 없다. 만물에는 저절로 배치가 있다. 사람이 되었다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후천적으로 형성된 도에 부합하지 않는 일체를 제거하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아 세간의 표상 속에 빠져 미혹되지 않는 가다.
나중에 공자는 또 노자에게 왜 자신의 주장이 왜 그 어느 나라 임금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물었다.
“사람이 안 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도’를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까?”
그러자 노자가 대답했다.
“본성은 바꿀 수 없고, 운명은 바꿀 수 없으며, 시간은 멈출 수 없고, 도는 가로막을 수 없다. 만약 도를 얻는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도를 잃으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는 불가에서 말하는 법(法)으로 이는 일체의 근본이며, 시간, 공간 및 일체 배치와 기제(機制)를 포함한 만물을 낳았다. 때문에 이는 고칠 수 없고 흔들 수도 없는 것이다. 당신이 법에 부합하고 도에 부합하면 곧 만물과 서로 포용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소통에 막힘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법에서 벗어나고 도를 벗어나면 마찬가지로 만물과 서로 포용할 수 없다. 때문에 노자는 또 “도(道)를 잃은 후에 덕이 나왔고, 덕(德)을 잃은 후에 인이 나왔으며 인(仁)을 잃은 후에 의(義)가 나왔고 의를 잃은 후에 예(禮)가 나왔다.”라고 했다.
당시에 예를 지킬 것을 제창한 것은 이미 도(道)를 잃은 것은 물론이고 인의예(仁義禮)를 잃었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예마저 붕괴된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은 이미 매우 위험한 경지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총결해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세웠고, 삼십에 섰으며, 사십에 흔들리지 않았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으며, 육십에 귀가 순해졌고, 칠십에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사실 공자의 일생은 바로 수련인(修練人)의 일생으로 끊임없이 내심을 바르게 닦고 편이된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제거한 과정이자 서서히 만물을 만들어 낸 대도(大道)를 깨달은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유가는 궁극적으로 도가로 귀착된다고 말하는가? 바로 유가 자체가 마음을 닦고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고 자신의 패괴(敗壞)되고 도(道)에서 벗어난 물질을 점차 제거한 후 선천적인 본성 역시 점차 청성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 또는 아주 일찍부터 이미 세상에 들어왔고, 매 사람은 속세에 살면서 여러 차례 윤회 속에서 슬픔과 기쁨, 단맛과 쓴맛을 보았고 정속에서 몸부림쳐 왔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원적인 생명은 왜 세상에 들어와야 했고 그 이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사람이 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똑똑히 알려주셨다.
“천체우주는 성주괴(成住壞) 과정 중에서 일체가 모두 순정(純淨)하지 않게 되었고, 모두 처음 만들었을 때만 못하게 되어, 비로소 ‘멸(滅)’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천체 중의 일체가 모두 망가졌고, 중생은 모두 처음만큼 그렇게 좋지 않게 되었으며, 생명도 모두 순정하지 않게 되었고, 모두 죄업이 있게 되었기에, 멸망하게 된 것이다. 종교 중에서는 이런 죄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천우(天宇)를 구원하기 위해, 창세주는 뭇 신(神)・뭇 주(主)에게 하세(下世)하게 하여 이 환경 중에서 사람이 되어 고생을 겪고・제고하고・죄를 없애고, 자신을 다시 만들어 천국으로 돌아오게 하려 했다. (창세주가 사람을 구함과 동시에 우주를 다시 만들기 때문에) 신천우(新天宇)는 절대적으로 순정하고 아름다운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람이 선념(善念)을 유지할 수 있고, 현대 관념의 충격에 직면하여 사람이 전통 관념을 견지할 수 있고, 무신론・진화론의 충격 속에서 신을 여전히 믿을 수 있으면, 이런 사람은 구도되어 천국으로 돌아가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일체 어지러운 상태(亂象)는 신이 최후로 안배한 것이다. 목적은 중생의 구도 여부를 고험하고, 동시에 고생은 또 그 과정에서 죄업을 없앨 수 있는바, 일체가 사람을 천국세계로 구도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생명이 세상에 들어온[入世] 것은 세상을 벗어나기[出世] 위함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자신이 이미 순정(純淨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순정하지 못한 자신을 방임한다면, 순정하지 못한 고향이 계속 나빠져서 오직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순정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되찾아, 진정하게 자신이 내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번에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여러분들이 모두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이 글을 한번 잘 읽어 보기 바란다. 이는 우리 모든 사람의 선택과 미래에 관련이 있으니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세상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일찍이 지녔던 기억이 지워졌고 자신의 진정한 가족과 고향을 망각했으며, 자신의 본래 모습과 세상에 내려오기 전의 소원마저도 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선택하고 깨어날 때가 되었다. 진상을 품고 청성(淸醒)해 질 기회를 꽉 잡아 정의와 양지를 지키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신(神)은 당신을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