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빙옥(嵐冰玉)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私)를 위하는 것은 과거 우주의 근본속성이었는바, 성주괴멸(成住壞滅)과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 속성이 가져온 필연성이었다.”(《각지 설법 5》〈2004년 미국 서부법회 설법〉)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긴긴 세월 속에서, 생명은 표준에 부합하지 않게 되고 패괴되었으며, 이 일체가 모두 안 되게 되었는데, 이는 이 우주 자체(本身)가 ‘성(成), 주(住), 괴(壞), 멸(滅)’이라는 요만한 크기의 지혜밖에 없기 때문이다.”(《각지 설법 12》〈2013년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나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통해 위사(爲私)의 속성과 지혜의 한계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위타(爲他)와 위아(爲我)를 일반적으로 뇌의 유연성보다는 개인의 선악(善惡)과 연관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위공(爲公 공을 위함)과 지혜 사이에는 도대체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1. ‘아(我)’는 하나지만 ‘타(他)’는 무수히 많다
만약 자신만 생각한다면 한 사람의 이익만 생각하면 되지만, 더 많은 사람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00위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가 자신만 생각한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쓸 것이다. 하지만 이 100위안을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분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100위안을 모두 아이들을 위해 쓴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선물을 살 돈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배포 방식에 매우 만족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공평하고 합리적이라고 느끼기를 원한다면 상황에 따라 돈을 분배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련인 사이에도 비슷한 상황이 존재한다. 대법제자의 항목이 많지만 수련생 각자의 시간과 정력에 한계가 있어서 A 일을 하면 B 일을 할 시간이 없을 수 있다. 만약 두 항목을 모두 한다면 두 프로젝트 모두 성의 없이 하게 되어 누락이 많아질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잘 관리하고 자원을 더 잘 활용하려면 역시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협조인들이 보다 많은 수련생들이 자신이 맡은 항목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자주 듣거나 본다. 그러나 한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는 항목에 참여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만약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자원이 낭비될 것이다. 먼저 사회적인 일부터 말해보자. 몇 년 전, 두 명의 미국인이 매우 성공적인 자선 행사를 시작하여 많은 돈을 모금했다. 그러나 한 사회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이라면 매년 일정 금액을 기부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지원하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면 다른 단체에는 기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후원하는 자선 단체는 매우 기뻐하고, 표면적으로는 많은 스타들이 모금에 참여하고 언론보도도 많이 나오는 등 활기차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 전체는 어떤가? 불평등한 기부로 인해 돈이 필요한 자선단체에는 더 적은 돈만 모으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일부 항목의 협조인은 동수를 항목에 끌어 들이는데 능숙해서 결과적으로 이 항목에 더 많은 수련생들이 참여하는데 그럼 다른 항목은 어떻겠는가? 진상을 알리는 어떤 항목에 사람이 부족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협조인으로서 자신이 책임진 항목에 더 많은 동수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고, 만약 나오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불러낼 수 있다면 더욱 공덕(功德)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협조인이 보다 많은 항목과 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고려할 지혜가 있고, 동수들이 모두 자신의 시간, 돈 등 자원을 보다 합리적으로 배분할 수 있다면 아마도 정체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2. 부동한 각도에 부동한 결론
며칠 전 어머니(동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제를 부동한 각도에서 문제를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식탁 위의 컵을 가리키며 비유했다. 이 컵에는 귀여운 강아지 세 마리가 프린트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어머니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다. 나는 강아지를 두 마리만 볼 수 있었고 어머니는 한 마리만 볼 수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상대방의 관점에서 문제를 볼 수 없다면, 컵 위에 개가 몇 마리인가를 두고 다퉜을 수도 있다. 나는 심지어 어머니가 너무 나이가 들어 숫자도 똑똑히 구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내가 수학 공부를 헛되이 해서 숫자조차 셀 수 없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실제 상황은 컵이 입체적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본 것과 내가 본 두 가지 모두 단편적이다.
수련 중에서도 나는 이런 상황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불교에는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이야기가 있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2》〈가로막지 못하리〉에서 “수련의 길은 같지 않으나 모두 대법 가운데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매 수련생마다 길이 다르다면 길을 가면서 보는 풍경도 다르고 법에 대한 이해도 다를 것이다. 때로 수련생들이 남의 수련이 차(差)하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다른 사람이 잘 수련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수련한 것이 당신과 다른 것인가? 그러나 당사자는 혼란스러워도 지켜 보는 이들은 분명하다.
나는 실제로 자신이 나의 표준으로 남을 가늠하는 것을 깨닫는데 나도 다른 사람이 이건 좋지 않고 저것은 그르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이것을 심성과 도덕 방면의 부족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지혜의 부족도 덧붙이고 싶다. 그 이유는 최근에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으면 남을 위해 생각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속인 중에는 입체기하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상으로 허공에 3차원 입체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이 입체 기하학 문제에 답할 수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학생이 이 방면에서 부족하며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왕에 속인들 중에서도 3차원 입체도형 상상을 하나의 능력으로 여긴다면, 사물을 주도면밀하게 여러 차원에서 볼 수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것 역시 일종의 능력과 지혜가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남에게 잘하고 싶어도 좋은 의도로 한 일이 오히려 나쁜 일이 되어 오히려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는 남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기란 쉽지 않다. 단지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대법의 요구도 고려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자면 더욱 어렵다. 남을 배려하는 것도 기술이고, 지혜가 있어야지만 잘할 수 있다.
3. 위기(爲己)의 총명과 위공(爲公)의 지혜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날카롭고 똑똑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총명’하다고 여긴다. 기왕 자신의 이익을 매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총명’하다고 본다면 반대로 남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마땅히 ‘지혜’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의 서두에 일반인들은 위공(爲公 위타의 의미)과 위사(爲私)를 선악과 연계시킬 뿐이지만 사실 이는 아주 피상적인 인식일 뿐이다. 속인은 ‘이기’와 ‘총명’을 연관짓는데 다른 말로 하면 즉 ‘이기(利己)’적이고 수련에서 ‘오성이 차’한 것과 연계된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속인도 자사(自私)는 지혜가 없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교활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이익 균형을 고려한다면 이런 상황이 마땅히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무수한 중생이 있어 당신이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 역시 아주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위공(爲公)은 또 신경쓸 것은 많아지겠지만 이 때문에 흉금이 넓어질 수 있으며 위사(爲私)처럼 무겁거나 고통스러진 않을 것이다.
《논어》에서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라는 구절을 수없이 외웠는데, 최근 들어 마치 ‘지혜’라는 이 단어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 것 같다. 이 구절 법에 대해 내가 이해한 것은 법을 공부하면 지혜가 자라나고 법을 잘 공부하지 않으면 지혜가 부족해서 위공(爲公)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위타(爲他)가 일종의 지혜라면, 이 점을 해낼 수 있는 것 역시 법을 잘 공부한 표현이다.
개인의 작은 견해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양해해주기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