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갈수록 수련인(修煉人)이 시시각각 다른 사람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깨달은 것을 한 가지 비유로 설명하자면, 내심(內心)에 공경을 유지함은 마치 심신(心身)을 아주 좋고 ‘전기가 통하기’ 쉬운 상태에 두는 것과 같다. 이 상태에서 법 공부, 연공 등을 해야만 마땅히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공경’을 지키는 것은 마치 심신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아서 자신의 매 세포가 모두 아주 편안해지는데 이런 상태에서만 우주 특성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
나는 한때 매우 오만(傲慢)했지만 그 때에 그것을 몰랐다.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을 공경하지 않았고 임의로 남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릴 때도 많았다. 그 기간에 나는 종종 법을 공부해도 법을 얻지 못했고 심지어 책을 여러 번 외웠지만 여전히 법리로 자신을 지도할 수 없었는데, 마치 무언가 가로막힌 것 같았다.
나중에야 나는 마침내 그 시절 자신이 아예 이치를 따지지 않았고 그야말로 터무니없었음을 깨달았다. 점차적으로 나는 자신의 오만을 제거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이것과 거리가 아주 먼 것을 발견했다. 오만한 습관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비록 뚜렷한 것들을 제거하긴 했지만 무심코 하는 일부 생각과 언행(言行)은 오만한 습관이 여전히 매우 강했다.
오만이 초래한 ‘혹’
동수 연(蓮)은 선량하고 소박하며 고지식한데 내가 보기에는 가끔 너무 어리석었다. 연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녀에게는 현대 관념이 없고 내심이 완전히 전통적인 도리로 가득하다. 마치 우리 할머니 시대에서 시간여행을 온 사람 같다. 그녀는 종종 전통적인 도리로 나의 현대 관념을 없애도록 도와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무시해왔고 그러면서 또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자신은 몰랐지만 사실 이는 오만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녀에게는 비전이 없고 너무 완고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자신의 이런 견해가 매우 객관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한 차례 경험이 있었다. 몇 달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러자 손에 혹이 올라오더니 점점 커졌고 마치 뼈처럼 단단해졌다. 나는 자신의 문제를 찾지 못했고 이렇게 끊임없이 커지는 혹에 대해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또 마난에 직면했을 때 연은 또 나를 선심(善心)으로 도와주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나 견해에 대해 따지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때 나는 자신의 불선(不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생각이 떠오른 후, 혹은 며칠 만에 급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사라졌다. 이 신기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자신의 심성 문제를 인식하게 했다. 즉 고집스럽고, 불선하며, 편협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배후는 바로 오만이었다. 설마 그 손의 혹이 내심의 견고하고 팽창한 물질과 대응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 이후 연과 소통할 때 오만함이 여전히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이 기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매번 처음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그녀와 내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나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그녀는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내 말을 따르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의 관점이 많은 일에서 옳다고 느꼈다. 때로는 그녀가 이런저런 실수했고 내가 지적했고 또 다른 일로도 확인된 것 같은데 왜 그녀는 여전히 깨닫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나는 비록 갈수록 자신의 문제를 더 많이 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뿌리를 파내지 못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게 공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깨달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때문에 상대방의 문제를 보고 만약 내가 이 공경심을 지켜낼 수 있다면 일종 겸손하고 성실하며 존중하는 심태로 대할 수 있는데 그럼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을 깨달은 후 이것이 뿌리를 제대로 팠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 소통에서 나는 늘 기본적으로 더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다른 것 같다. 전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면, 지금은 자신을 낮추는 관점이 되었다. 관점이 다르면 보는 것도 전혀 다르다.
나는 사부님의 한 구절 법이 생각났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
다툴 게 뭐 있느냐”(《홍음 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공경심을 잃지 말아야
나는 더 나아가 우리가 그 누구를 대하든 늘 공경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경심을 잃는 것은 자신에게 아주 큰 손실이다. 마치 심신이 모종의 불균형한 상태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며 일을 많이 해도 효과가 크게 감소한다.
지금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가급적 공경심을 지키려 한다. 내 생각에 우리가 갈수록 어떤 사람을 더 존중한다는 것은 내 관점이 옳고 공경심을 잃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내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존중할 때 나는 또 공경심을 잃지 않음을 알았다.
하지만 공경심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지금 나는 오만한 마음이 떠오르면 곧 알 수 있는데, 내심으로 누가 못마땅하게 보일 때 나는 오만한 마음이 또 떠올랐음을 안다. 내가 누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견해를 가질 때 나는 배후에 오만이 있음을 안다. 때로는 내가 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나는 오만이 또 떠오른 것임을 안다. 오만심이 올라오면 공경심은 곧 사라진다. 이럴 때 나는 관점을 조정해야 함을 아는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최근에 한 세일즈맨이 며칠 연속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나는 (그 제품에) 관심이 없고 이미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니 앞으로는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자신이 방금 막 공경심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내 말투 속에는 비난과 짜증이 있었다. 비록 상대방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심태는 그래도 여전히 공경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당 문화와 관련이 있다. 내가 아는 일부 동수들은 수련 방면에서는 그래도 아주 “열심”이라고 할 수 있고 세 가지 일을 하는 데도 모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오만한 습관이 많은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부류의 동수들은 나중에 병업(病業)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어떤 동수들은 아주 대단하고 표현도 좋아서 언제 누구를 대하든 늘 공경을 잃지 않는다. 이런 동수들의 수련 상태는 또 아주 평온하다.
때로 나는 생각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그런 동수들이 오만심을 닦아버리고 늘 공경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럼 그들 자신에게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 법 공부, 연공 및 일하는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수련이란 필경 심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마음이 성실하면 영험해지기 때문이다. 법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신(神)은 사람 마음을 중시하지만 사람은 종종 ‘성취’와 능력을 중시하고 사람 마음을 중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취’와 능력은 분명하고 쉽게 드러나지만 사람 마음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소위 ‘약자(弱者)’에 대해 공경심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또 더욱 어렵다. 이들 ‘약자’에는 능력이 아주 약한 사람, 지위가 아주 낮은 사람 등이 포함된다. 사실 약자와 비약자(非弱者)에서 약함이란 세속에서 보는 견해다. 사람들은 흔히 성실하고 얌전한 이들이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횡설수설하는 사람에 대해 쉽게 오만해지는데 자신의 각종 원인 때문에 무시하는 사람에게 오만해지기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사에 나오는 신선(神仙)은 흔히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고험한다. 가령 수다스런 늙은이나 또는 미치광이 노파나 앞이 보이지 않는 거지 등등이다. 왜냐하면 ‘약자’만이 시금석이 될 수 있고 사람 마음이 정말로 선량하고 성실하고 겸손하며 공경한지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생각해 보았다. 내가 과거 연(蓮)에 대해 무의식중에 오만했는데 이것이 왜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는가? 왜 그렇게 심각한 결과(손에 돌기가 생기는 현상)를 초래했는가? 내가 깨달은 것은 첫째로 연은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옛말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속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반대로 되는 이치 속의 세인(世人)은 이를 모르기에 흔히 온순한 사람을 혐오하지만 신(神)은 오히려 이렇게 보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고 덕을 잃지 않기에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
둘째 연은 줄곧 내게 큰 도움을 주었음에도 그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오히려 존중을 잃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은 이렇게 보지 않는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신의 표준과 나 자신의 생각이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체험했다.
현대관념 하의 ‘자신감’
내 생각에 현대인들의 사람에 대한 평가는 대개 현대 관념에 기초하는데, 배후에는 아주 강한 승부욕과 사람과 쟁투심이 있다.
내 기억에 자신이 아주 오만했던 시절 어떤 동수들이 내 상태가 아주 좋다고 말하면 나는 아주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우쭐거림’을 ‘자신감’으로 여기는데, 모종 교만한 표정과 몸짓을 ‘기장(氣場)이 강력하다’고 칭찬한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자신만만’은 사실 ‘자만’이다.
내 심태가 바뀌자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과거에 내가 ‘자신감’이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우쭐거린’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었으며 공경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훈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어떤 일에서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이는 일종 ‘우쭐거리는’ ‘기세’로 소위 그 ‘기장(氣場)’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상당수가 성격이 매우 좋고 인품이 아주 좋으며 정직하며 소박하게 ‘진(真)을 지킨’ 사람들임을 발견했다. 자신을 치켜올리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흔히 그런 ‘강대한 기장’을 조성하지 않는다.
나는 ‘강대한 기장’은 바로 내심의 취약성을 반영함을 깨달았다. 때문에 나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을 ‘지탱’할 무언가를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강대한 기장’은 내심(內心)이 팽창한 산물이며 사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은 텅 비어 있다. 진정으로 내심이 강대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강함을 보일 필요가 없고 또 약하게 보이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한(羅漢)은 사람 중의 일체 득실에 모두 개의치 않는데, 당신이 그가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심이 나한 경계에 도달한 사람이 여전히 그 ‘강대한 기장’을 원해서는 뭘 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는데 그의 ‘기장’이 정말 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롭고 공허하며 불행하다고 말했다. 이 슈퍼스타의 어릴 적 정신적 트라우마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다는 댓글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상처를 감싸 안고 겉으로는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많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는 결국 명예와 이익은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여기서 깨달은 것은 그런 허영심과 화려함이 가져다주는 자극은 내면의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또한 나는 ‘과시’ 역시 마찬가지로 유사한 잘못된 방법임을 깨달았는데 ‘칭찬’을 얻어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사실 그 반대로 이것은 자신을 진정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것은 또한 내가 수년에 걸쳐 늘 저지른 잘못이다. 나중에 나는 한 번 자랑하는 것은 한번 팽창한 것과 동일한 것을 발견했다. 내 생각에 팽창이란 대략적인 비유로 다른 공간에서 모종 심신의 균형을 잃은 것으로 단지 당시에 관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각종 심성관과 병업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고인은 ‘오만’을 수치로 여겼다
‘온유 선량 공경 절약 양보’를 제창했던 고인의 주류문화에서 사람을 상대함에 겸손하고 공경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교만해서 공경을 잃은 것을 수치로 간주했다.
《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 안영)의 마부가 자신이 아주 대단하다고 여겨 아주 오만했다. 어느 날 마부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짐을 꾸려 친정으로 돌아가겠노라고 했다.
부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럽습니다!”
마부가 말했다.
“내가 지금 재상의 수레를 몰고 있는데도 당신은 영광스럽지 않단 말이오?”
“당신은 학문이라곤 전혀 없으면서도 너무 오만하고 무례합니다. 재상은 그렇게 좋은 수양과 학문이 있어도 조금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만의 내원
‘9평 편집부’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중국편(8)》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것을 읽고 나서 나는 오만이란 보통 문제가 아니며 자신이 장기간 법을 공부하고도 법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임을 깨달았다.
“수련하려면 마음과 뜻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오만함은 마귀의 본성으로서 수련의 요구와 정반대된다. 공산 악령의 안중에는 신이 없으며 수련문화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특히 마성과 극도의 교만함을 불어넣어 사람들을 겸손하지 못하게 만들고 대신 자만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며, 무법천지로 신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만든다.”
“옛사람들은 마음과 뜻을 바로잡아야만 수련할 수 있었으며 마음속 신성(神性)이 작동해야만 우주의 특성과 신이 이야기한 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산 악령은 수련문화를 파괴해 인간의 교만함을 키움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신과 완전히 대립되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라디오 채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공산주의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고 신의 지혜와 가르침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결론
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오만한 마음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2018년 말쯤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했다. 남편은 일찍이 내가 오만방자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전에는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늘 자신의 ‘장점’ 및 다른 사람의 칭찬만 기억했는데 사실 자신을 아는 지혜가 부족한 것으로 매우 슬픈 것이다. 나는 단지 자신이 쟁투하는 문제가 좀 있고 또 아이를 다스릴 때 화를 좀 내는 문제 등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뿌리를 파진 못했다.
사실 처음 인식하고 나서도 오만한 습관이 여전히 강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오만이 떠올라 모순이 생기고 서로 다투는 많은 과정을 겪었다. 그러다 3개월 전에야 나는 비로소 내심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공경과 겸손을 지키는 것이 수련에 대해 말하자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주위 동수들 중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오만을 보는데 아주 심각한 병업 동수는 전에 늘 비교적 오만했다. 하지만 많은 동수들이 자신은 모르고 자신이 남들에 대한 태도가 경멸과 무시임을 모른다. 사실 이것이 바로 불선(不善)한 오만심이다.
이상의 내용은 개인의 작은 수련 체험이니 만약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