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우리가 평소 일상적인 대화에서 만약 화제가 뭔가 좀 비정상적으로 변했다면 그 안에 아마 숨겨진 집착심이 있을 수 있다.
지난 3월 6일, RTC 플랫폼 101에서 일부 동수들은 진상을 알리는 전화 중에 어떤 중생이 생체 장기 적출을 지지하는 무례한 발언을 했다고 제기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몇 가지 건의를 했다. 이것은 내가 101 플랫폼에서 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이때 한 노동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 이 중생은 이미 태도를 표명했으니 더는 그에게 (진상을)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즉시 경계했다. (이 말이 법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설령 그가 속인일지라도 그의 진아(真我)는 순결하고 흠집이 없으며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구별할 수 있다. 다만 중공사령(中共邪靈)의 통제를 받아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중생이 어떻게 표현하든 우리는 늘 가급적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3초도 생각하지 않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 다른 공간의 썩은 귀신에게 통제당한 것으로 그 말은 썩은 귀신이 중생의 입을 통해 한 말입니다.”
이때 그 동수 역시 즉시 발언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녀가 내 말에 대해 답변하는 대신 화제를 바꿨다. 오늘 전화를 건 성과에 대해 말했다. 10여 명을 어떻게 삼퇴 시켰는가. 나는 그녀의 전화 심득을 들으면서 갑자기 마음에서 반응이 나왔고, 사람 생각이 떠올랐으며 좀 부끄러웠다. 노동수의 삼퇴 성적이 이렇게 좋은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말한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좀 당황스러웠고 또 좀 불안해졌다.
이 동수가 말을 마친 후, 한 남자 동수가 중생이 이미 태도를 표명했다는 노동수의 발언을 언급했다. 그는 사부님의 법을 인용해 중생이 태도를 표명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의 이해를 말했는데 기본적으로 내가 한 말과 같았다. 또 다른 한 여자 동수도 나와 같은 의견을 말했다. 두 동수와 자신을 비교해 보니 그들의 표정이 내가 한 표현보다는 더 완곡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당시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마음’을 쓴 게 아니며, 그 속에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불선(不善)’이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선(善)’의 힘이 부족했음을 민감하게 느꼈다. 그렇다면 이 ‘불선’의 구체적인 표현은 무엇일까? 우리는 평소 늘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 찾아 잠재적인 집착심을 닦아버린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고 우리 평소의 일언일행(一言一行) 속에서 실천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발견해 앞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때 유사한 형태의 ‘불선이 나타나는 것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나는 ‘불선’의 표면을 찾는데 멈추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가 노동수와 나눈 대화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며 사색해 보았다, 나는 안에서 우리 교류 과정에서 심리 활동에 대해 조사하고 통찰해 보았다. 어떤 심리 활동이 현재 우리 반응을 조성했을까? 어떤 심리 활동이 우리에게 다른 표현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게 했을까?
나는 자신에게 묻고, 반성하며, 스스로 대답해보았다.
왜 그 노동수는 내 대답에 직접 응답하지 않고 3초도 안 돼 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화제를 바꿔 오늘 자신이 삼퇴한 성과를 이야기했을까? 왜 그녀가 삼퇴 성과를 말할 때 내 감정에 파동이 생기고 “열등감”을 느꼈을까? 3초 안에 일어난 이런 무의식적인 반응은 무슨 집착심을 비춰주는가?
나는 계속 더 깊이 파고들며 끊임없이 반문하다가 문득 그 속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쟁투심이 숨겨져 있음을 감지했다. 동수는 바로 나의 거울이니, 그녀의 숨겨진 쟁투심은 바로 내게 쟁투심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왜 쟁투심을 갖고 있는가?”
문득 자신이 노동수의 관점이 틀렸고 내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때문에 3초 안에 아무런 사고도 없이 ‘마음’을 쓰지 않고 대답한 것이다! 이는 내게 깊이 숨겨져 있던 쟁투심이 아닌가! 내가 의식한 ‘불선’은 바로 이렇게 깊이 감춰진 쟁투심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수의 쟁투심은 다 나 자신의 쟁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 내 쟁투심이 증폭된 것이다! ! 이것을 깨달은 후, 그날 회의가 끝날 무렵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노동수에게 무례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동수들을 불쾌하게 한 것에 대해 보완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가
내가 숨겨져 있던 이 집착심을 발견했을 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마땅히 어떻게 하고 어떻게 말해야만 앞으로 교류에서 이런 일이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처음에 나는 단지 남자 동수를 좀 배워 표현을 좀 더 완곡하고 부드럽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좀 더 완곡하고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내가 앞으로 좀 더 완곡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어떤 정해진 표현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다음 날 한 동수와 《일상적인 대화 속에 숨겨진 집착심을 통찰–원망하는 마음》이라는 문장을 쓰는 방법에 대해 논의할 때, 그녀는 기(氣)와 기 사이에는 아무런 제약 작용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동수들과 소통할 때 사부님의 설법을 더하면 더욱 힘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문득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기와 기 사이에는 제약작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음을 깨달았다. 원래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말로 교류하는 것 역시 일종 기와 기 사이의 교환이다. 더 나아가 내 생각에는 물질과 물질의 교환이다. 내가 한 말은 바로 한 덩어리 물질이며 내가 그녀의 공간장에 이를 던진 것이다.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고 내게 돌려보냈을 때 바로 이 물질이 다시 내 공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표현되는 것은 아마 내가 한 말을 그녀가 인정하지 않고 그녀가 한 말을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이 바로 쟁투심의 표현이다.
앞서 언급한 그 남자 동수가 말한 내용과 함의는 나와 같았지만 그는 사부님의 설법을 인용했기에 법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표현 방식이 더 완곡하고 부드러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표현 방식에 나의 이런 감춰진 쟁투심이 있는 게 아닐까?
이상에서 깨달은 것에서 더 나아가 나는 자신이 평소 교류할 때 사부님의 법을 인용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습관적으로 사부님의 법에 대해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사용해 동수들과 교류했다. 이런 교류방식에서 내가 한 말은 단지 내가 있는 층차의 이해에 국한될 뿐 법의 힘을 지닐 수 없다. 내가 자신이 있는 층차에서 이해하고 교류한 것은 법의 교류가 아니다. 이 속에는 또 남더러 나를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외에도 이 속에는 또 과시심, 쟁투심 및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음을 증명하려는 잠재적인 질투심 등등이 숨어 있다.
사부님께서는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전법륜》), “만 명 중에서 같은 층차 중에 있는 사람을 찾자면 아마 두 사람 있을 것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같은 층차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자신이 있는 그 층차에서 이해한 법의 내함(內涵)을 말할 때 부동한 층차의 동수에 대해 부동한 이해가 있게 마련인데 상호 작용 중에서 동수의 쟁투심, 과시심 등 일부 마음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모두 내가 집착심을 지니고 법에서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수의 집착심을 드러나게 만들고 증폭시켰던 것이다.
결국 나는 교류에서 오직 사부님의 법을 사용해 교류해야만 교류의 내용과 방식이 비로소 개인의 집착심을 지니지 않을 수 있고 비로소 동수의 집착심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고, 교류에서 사부님 법리(法理)가 부동한 층차에서 부동하게 펼쳐질 수 있다. 이렇게 해야만 부동한 층차의 동수들이 모두 깨닫고 공동으로 제고하며 공동으로 정진하는 목적과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개인 층차의 이해이니, 틀렸다면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