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林雨)
【정견망】
시의 아름다움은 우리 내심 깊은 곳까지 들어가 이미 홍진(紅塵 붉은 먼지, 속세를 가리킴)에 봉폐된 기억과 자신이 이미 눌러놓으려고 했던 소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시인의 내심 깊은 곳까지 도달해 자신의 내심과 서로 통하게 할 수 있다. 우선 전체 시를 감상해보자.
시인의 언어도 풍격이 각기 다른데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이도 있고 은근하게 안으로 수렴하는 이도 있다. 송대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시인 방택(方澤)의 《무창에서 바람에 뱃길이 막혀(武昌阻風)》를 감상해보자.
장강의 봄바람이 객선을 붙잡으니
끝없는 고향 생각 흐르는 물에 가득하구나
그대 봄바람과 함께 종일 한가로이 물가에 서서
날리는 꽃 바라보느라 향수조차 잊어버렸네
江上春風留客舟
無窮歸思滿東流
與君盡日閑臨水
貪看飛花忘卻愁
이 시는 함축적이긴 하지만 또 진솔하고 이해하기 쉽다.
“장강의 봄바람이 객선을 붙잡으니
흐르는 물에는 끝없는 고향 생각 가득하구나”
분명히 바람을 거슬러 가는 길임에도 시인은 이곳에서 오히려 “봄바람”이 객선(客船 나그네가 탄 배)을 붙잡는다고 했다. 또 분명히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건만 시인의 눈에는 자기 마음속 고향을 그리는 정으로 되었다. 《수호전》에도 “술은 취하지 않지만 사람이 스스로 취하고 꽃은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으나 사람마다 스스로 미혹된다”고 했다. 이는 사물이 원래 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부여한 내함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시를 읽으면 쉽게 마음에 들어간다.
“그대 봄바람과 함께 종일 한가로이 물가에 서서
날리는 꽃 바라보느라 향수조차 잊어버렸네”
좋은 벗들과 함께 산수를 즐기는 것은 당연히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날리는 꽃을 바라보느라 향수를 잊을 수 있을까? 독자들조차 고향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을 깊이 느낄 수 있는데 당사자가 어찌 쉽사리 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고인(古人)은 사실 미망에 빠져 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똑똑히 알고자 노력했지만 늘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했다. 만약 시인이 노래한 것이 자신의 고향이라면 그리우면 그래도 쉽게 돌아갈 수 있고 적어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아마도 서초패왕 항우가 강동 부모들을 볼 낯이 없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역주: 항우가 해하전투에서 한신에게 패배하고 강동으로 달아나던중 나루터에서 강만 건너면 권토중래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을 따르던 자제들이 모두 죽은 마당에 차마 그 부모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사람은 대다수 법을 얻기 위해 천상(天上)에서 온 신(神)으로 법을 얻어 자신의 천체(天體)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왔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애초 서약을 완수하지 못하고 자신의 중생을 구도할 수 없다면 그럼 당신이 돌아간다 해도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만이 부끄럽지 않게 자기 천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홍진의 소위 ‘좋다는’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우리의 귀로를 가로막는 밧줄과 같다. 우리의 진정한 소원은 속세의 혼란을 내려놓고 우리의 중생을 구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