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성우(星宇)
【정견망】
지금까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면서 일부 수련 체회(體會 직접 체험해 알게 된 것)를 써서 동수들과 나눴는데 이는 내가 수련하기 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천도(天道)이자 천기(天機)로 사실 바로 천법(天法)이고 또 불법(佛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회에서 공산 붉은 마귀는 왜 이 모든 중국 전통의 수련문화를 파괴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수련이야말로 한 생명이 반본귀진(反本歸真)하는 정수(精髓)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 다시 태어나길 원치 않고 생명을 훼멸하려 하기에 생명이 그저 표면적인 현실만 중시하고 내심을 중시하지 않도록 하려 한다. 때문에 물질 생활은 풍부해졌지만 오히려 진정한 행복감은 사라졌고 무엇이 수련이고, 어떻게 수련하며, 누가 와서 사람에게 수련을 가르치며, 수련은 무엇을 하는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사는 예측하기 어렵고 미망속에서 무기력해졌으며 아울러 인간 세상에서 진정한 정도(正道) 수련을 찾기란 아주 어렵다.
공산 붉은 마귀가 인간 세상의 각종 종교를 탄압할 때 얼마나 많은 종교가 천국을 직면할 수 있는가? 세뇌와 주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고(一葉障目) 자기 보존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마 이것이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이겠지만 수련인은 아니다. 수련인은 신(神)의 전당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인데 어찌 마귀를 강대하게 보고 천지를 작게 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인간 세상은 “생명”이 일종 드러난 상태라고 말한다. 때문에 많은 수련인들이 홍진(紅塵 붉은 먼지 즉 속세)의 환상(幻象)이라 말하며 마음에 둘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생명의 종류는 수없이 많고 생명의 감지(感知)는 천만 가지다. 만물의 영(靈)인 ‘사람’은 천지와 함께 존재하고, 만물과 함께 존재하며, 중생과 함께 존재한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 수련에서 절대적으로 살생할 수 없는 원인이다. 즉 그를 죽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고 일체는 모두 자기 몸에 되돌아온다. 업(業)은 자신이 지은 것으로 자연히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아울러 자살은 또 큰 죄가 되는데 왜 그런가? 왜냐하면 자살은 바로 그 선량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일체는 바로 이렇게 공평하고 원만하며 이것이 바로 불법무변(佛法無邊)이다.
따라서 한 생명은 단지 무조건 불법(佛法)에 동화(同化)해 무조건 심성을 진수(真修)하며,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일을 하지 말아야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위로 올라가고 희망과 행복이 있을 수 있으며 영원한 광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도(道)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오직 갈수록 더 무너질 뿐이며 자멸로 나아가는데 어쩌면 이것이 바로 자생(自生)자멸(自滅)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손 댈 필요도 없다. 인간 세상의 모든 천재인화(天災人禍)는 하늘의 경고이고 모든 예언 역시 경고인데 또한 보응을 드러낸 것으로 그 때가 되면 그럼 기회는 사라진다.
생명에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사람의 눈은 구조가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일부 동물들이 볼 수 있는 것도 사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볼 수 없으면 믿지 않는데 이는 아주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설령 매우 교육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과학의 구두선(口頭禪 실속 없이 입에 발린 말)으로 비과학적인 일을 하고 비과학적인 말을 한다. 진정한 과학은 종종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이 진정한 과학이다.
수련인과 평범한 사람이 세간을 보는 방식은 서로 다른데, 본질적인 구별은 안으로 자신의 문제를 보는가 밖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보는가다. 또 평범한 사람은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추구에서 지니는 감수(感受)가 있다. 사실 ‘명리정’도 생명인바 아울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속에 빠져드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숭배받는 그런 허영심은 마치 마약처럼 온몸에 퍼져 빠져 나오기 어렵다. 물론 이것은 사람 이 층차에서도 하층 생명의 상태로, ‘정(情)’에 빠진 사람은 모두 이렇다. 오직 수련인만이 ‘사람’의 모든 속박과 ‘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이 모든 인과를 끝낼 수 있다.
사실 진정한 수련인이 일단 수련의 길에 들어서면 끝까지 마주하는 것은 줄곧 도(道)를 깨닫는 것과 참회하는 것으로 수련 중 매 하나의 고난, 매 하나의 시비(是非)마다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수련 중에 “체오(體悟 직접 겪어 깨달음)”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자아가 너무 강하고 인류의 현실적인 명리를 너무 중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사람 속에 길을 잃고 사람 속에서 망가진다.
다시 말해 오직 수련만이 생명의 출로(出路)이자 정도(正道)다. ‘사람’은 수련할 기회가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심성을 닦고 심성을 제고함은 형식적으로 흘러선 안되며 사찰에 가서 절을 하고 신에게 업채(業債)를 없애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도(道)를 향하고 중생을 선(善)하게 대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