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객(過客)
【정견망】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 전, 처음에는 심한 허리 통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워서 휴식을 취해야 했고, 나중에 또 식중독으로 극심한 복통을 앓았다. 이런 질병의 고통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긴 것이 아니라, 전생에 맺은 인연이 그 순간 드러난 결과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자신의 전생을 말하면서, 자신처럼 경지가 높아도 반드시 과거 인연의 과보(果報)를 감당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의 허리가 아픈 원인은 전생에 브라만으로 있을 때, 씨름 경기에서 상대방의 척추를 부러뜨린 적이 있기 때문에 받은 업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아주 오래전 그가 다리를 만드는 장인으로 있었는데, 한번은 다리를 건설할 때, 공사 기한에 쫓겨 현장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녹슨 못으로 어느 거북이의 등을 박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거북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끼쳤는지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일을 끝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 사냥꾼일 때 사냥을 위해 음식에 독을 발라 숲에 둔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금세(今世)에 과보가 결과를 맺을 때가 되자 결국 식중독에 걸려 열반에 든 것이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변(無邊)한 지혜와 자비로 중생에게 생과 사, 질병의 고통 윤회의 진상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업력 앞에서는 각자(覺者)라도 두려워하는데, 아무리 큰 신통이 있어도 업력을 두려워한다.
사람이 수련 원만할 때는 업력이 없어야 하는데 조금만 있어도 원만할 수 없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왜 만년(晩年)에 열반하기 전까지 업력이 있을 수 있는가? 불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깨달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시 겨우 보살 경지에 도달해 법(法)을 전하고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나한은 법을 말할 수 없는데 그는 이런 능력이 없다. 사람을 구하려면 적어도 보살 경지가 되어야 한다. 경문에서는 그가 49년간 법을 전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층차가 제고되었고 열반에 들기 직전에야 비로소 여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셨다.
수련계에는 신통(神通)이 업력(業力)을 이길 수 없다는 한마디 말이 전해진다. 사람이 아무리 높이 수련했어도 오직 원만하지 못했다면 곧 업력의 제약을 받게 된다. 사람이 수련 원만할 때는 업력을 해결할 능력이 생기고 또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업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업력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사라지게 하려면 그를 대신해 이 부분의 업력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불교 이야기를 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이 한 문(門) 나의 이 한 층차에서 인식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인데 사실 불교에 대한 사람들의 굳어진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다. 동시에 불교 이야기는 또한 전통문화의 일부분이자 수련인의 이야기다.
대각자(大覺者)가 사람을 구할 때, 모두 제자를 대신해 업을 없애야 하는데 능력이 클수록 없애는 것도 더 많다. 옛날에는 사람의 업력이 아직 그리 크지 않아서 그래도 괜찮았지만, 오늘날에는 안 되는데 지금 사람들의 업력은 놀랄 만큼 크다. 때문에 그를 대신해 소업하려면 누구도 수련할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覺者) 역시 노화하는 등 속인의 상태가 나타나는데 물론 그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스스로 훨씬 젊어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곧 미혹을 타파한다. 과거 깊은 산속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했던 수많은 수련인들은 대주천(大周天)이 통한 후 나이가 곧바로 고정되었고 더는 노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속에서 수련하면서 이렇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래 경지에 도달한 후 열반에 들지 않고 30세의 모습을 회복해서 사람을 구도했다면, 이교도(異敎徒)들 가운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모두 와서 수련할 것이며,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수련하러 올 것인데 그럼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구하기 전 여래가 아니었는가? 이치적으로 말하자면, 여래가 세상에 올 때 아무런 업력도 지니고 오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왜 여전히 전생 업력의 영향을 받는가?
이 문제는 많은 불학(佛學)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불경의 큰 모순 중 하나다. 내가 그 원인을 해석하자면, 그는 당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전에 여러 세(世)에 걸쳐, 반복해서 전생(轉生)하며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야 했고 동시에 또 일부 업력을 지었다. 사람은 바로 이러한 것으로 사람과 접촉하면 반드시 업을 짓게 된다. 그는 직접 천상에서 싯다르타 왕자로 전생한 것이 아니며 이 한 세(世)에 기연(機緣)이 성숙해지자 곧 성불을 선택했고 동시에 또 이전 윤회 속에서 쌓은 업력을 해소해야 했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인데, 나는 그들의 내원이 아주 높아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처님의 내원보다 더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경지에서 직접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아주 긴 과정을 거치며 한 층 한 층 아래로 내려와 최후에 삼계(三界)에 이르렀다. 그런데 삼계 속에도 아주 많은 층의 하늘(天)이 있으니 그가 단번에 삼계에 들어오자마자 인간 세간에 전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 전생한 것 역시 이번 한 세(世)가 아니라 여러 세가 있었다. 이 과정에 그는 아주 많은 업력을 지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수련하려면 모두 순풍에 돛 단 듯 순탄치만은 않다. 업력이 없다면 사람이 수련하기란 아주 빠른데 아무런 마난도 없고 직접 원만할 것이다.
근기가 좋은 사람이 수련하면 아주 빠른데, 며칠 만에 한 층차씩 제고해 반년도 채 안 되어 나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다 근기를 다 사용하고 나면 그 역시 수련하기가 매우 어렵고 아주 느려질 것이다. 아마 몇 년 동안 한 층차도 돌파하지 못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처음 수련하면 수련이 아주 빠르고 상태도 좋다고 여기지만, 나중에는 점점 수련이 어려워지고 여러 해가 지나도 아무런 진보가 없거나 늘 한 층차에 배회하면서 늘 어느 관(關)을 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원인이다.
이는 매우 힘겨운 단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망을 보지 못하면, 자포자기하고, 결국 포기한다. 너무나 애석하다! 사실 그의 경지는 이미 아주 높은데, 단지 그가 알지 못하게 잠겨져 있을 뿐이다. 그가 일단 수련을 포기하면 곧장 속인 층차로 떨어지고, 공(功)도 더는 없게 된다.
그렇게 다년간 그렇게 어려운 것도 다 지나왔건만, 오히려 최후에 포기하는데 이 역시 일종 마(魔)의 교란이다. 그것은 사람더러 일체는 다 가짜라고 느끼게 하는데 신체 소업 과정 중에서 그 자신이 아무런 공도 없다고 여기게 한다.
하지만 공(功)이란 연마해서 나온 것이 아닌가? 수련을 포기했다고 어찌 바로 사라질 수 있는가? 사람이 일단 수련하지 않으면, 그는 심성에서 보자면 곧 속인이라 몸에 더는 초상(超常)적인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전부 거둬들여야 한다.
공(功)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곧 소모될 수 있다. 아울러 공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무한히 방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다 방출하면 곧 없어진다. 다만 그것이 다시 생길 수 있을 뿐인데 휴식하고 나면 또 이전의 위치로 자랄 수 있다. 경문에서는 심성이 얼마나 높으면 공이 얼마나 높다고 하셨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힘과 같아서 역도 선수는 200kg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피곤해서 그의 체력이 떨어지면 힘도 감소한다. 하지만 다음 날 휴식을 취한 후에는 다시 200kg을 들어 올릴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신체 소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연공할 때와 마찬가지인데, 연공 시간이 길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가지(加持)할 덕(德)이 있어야 공으로 연화(演化)할 수 있다.
내가 연공할 때면 손바닥에서 약 10cm 떨어진 곳에서 흰빛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노궁혈에서 쳐낸 에너지다. 손을 몸쪽으로 움직일 때, 몸에서 10센티 이상 떨어지지 않으면 몸의 경락과 치지(氣機)를 가지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중지가 에너지를 방출하는 주요 위치다. 두 손을 맞대면 중지가 자석처럼 서로 끌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튜브처럼 공중에서 서로 소통한다. 에너지가 “획획” 흘러가는데 힘이 대단히 크다.
물론, 나는 절반 열려서 수련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괜찮다. 당신이 오직 심성을 제고하고 법의 요구에 따라 하기만 하면 당신의 공은 자랄 것이다.
마치 제분기와 같은데 당신에게 원료가 없다면 그냥 기계만 돌려서는 안 되며 밀을 넣어야만 밀가루가 나온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가부좌를 가르치고, 정(定) 시간이 길수록 좋다고 한다. 경문에서도 이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그가 닦는 것은 자신이 아니다. 이쪽(주원신)에서 정(定)에 들어 아무것도 몰라야 저쪽에서 다른 사람(부원신)이 수련할 수 있다.
열려서 수련하는 것을 말하자면, 한 가지 설명할 것이 있다. 수련 중에서 사람이 보는 것이 꼭 진상이 아닐 수 있고, 그들이 파악한 것이 꼭 진리가 아닐 수 있다. 나는 단지 나의 이 층차에서 수련 깨달음을 말하는 것으로 무변(無邊)한 불법(佛法) 중에서 깨달아낸 아주 작은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아주 많은 것들은 말할 수 없는데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고 일단 말하기만 하면 틀리며 오직 스스로 깨달을 뿐이다.
사람의 심성은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모순 속에서 제고되어야 한다. 정(定)에 들어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심성을 제고할 수 있겠는가? 정말 가능하다면, 그럼 차라리 잠자는 게 낫다.
일부 사람을 구도하는 각자(覺者)는 자신은 업을 지니지 않고 세상에 내려왔지만 그 역시 각종 번거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자신의 번거로움이 아니라 세인(世人)을 대신해서 감당한 것이다. 가령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비로소 후세 자손들이 기독교를 수련할 기연(機緣)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 사람들의 업력을 미리 감소시켜 주었고 이 때문에 서방인 특히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은 비교적 선진적이고 행복 지수도 높다.
당신이 정신(正神)을 믿으면 그가 당신을 돌보고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을 돌보지 않고 당신에게 준 모든 것을 회수할 것이다.
외국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서방인들은 맹세할 때 흔히 오른손을 들어 세 손가락, 즉 중지, 검지, 약지를 뻗는다. 왜 세 개인가? 이는 삼위일체, 즉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대표한다. 의미는 신(神)에게 맹세하고 신을 증인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나중에 무신론자들이 맹세할 때 이런 동작을 사용할 수 없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에게 맹세한 것일까?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 맹세할 때는 세 손가락이나 다섯 손가락을 써도 되지만 주먹은 치켜들어선 안 된다.
속인에게 있어 업력은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그것이 질병, 번거로움,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심성을 제고하는 것에 불과한데, 사부가 그것을 이용해 사람더러 집착심을 제거하게 돕는다.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부도 업력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당신을 위해 여분의 것을 직접 당신을 대신해서 없애 주진 않을 것이다. 물론 전제 조건은 사부의 공력(功力)이 아주 높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업력을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의 업력은 너무나 복잡하다. 어떤 업력은 사람이 수련하는 상황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것이 존재하게 할 수 있다. 동시에 또 인류사회의 상태와 부합해 여전히 업을 계속 없앨 수 있고 또 사람의 오성(悟性)을 고험할 수 있는데, 또한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바로 그가 원만하는 그 순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업력(業力) 전부를 없앨 수 있다.
사람이 원만하려면 반드시 조금의 업력도 없어야 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대업왕생(帶業往生)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즉 업력을 지니고 불국세계(佛國世界)에 가서 중생이 되는 것이다. 업력이 있는데 어떻게 올라가게 할 수 있는가? 그의 수많은 핵심적인 사람 마음은 모두 닦아 버렸고 남은 요만한 사람 마음은 장래에 반드시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국세계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그는 여전히 이어서 수련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 겪을 고생이 없고 모순이 없으면 제고가 아주 어렵고, 일단 수련하면 몇만 년이 지나야 겨우 조금 진보할 수 있다.
대업왕생하는 많은 이들은 불국세계에서 계속 그의 집착에 집착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생각만 하면 일이 이뤄지기 때문에 그는 이런 능력을 이용해 그의 집착을 실현하기 때문에 수련하기가 더 어렵다.
사람은 반드시 제한된 생명 노정 중에 다그쳐 수련해야만 하며 속세야말로 가장 좋은 수련장(修煉場)이다. 또한 대업왕생에 대한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하는데, 정진하지 못하면 대업왕생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높은 우주공간에서 온 것으로 무량무제(無量無際)한 당신의 중생들이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누구의 세계로 가서 중생이 되려 생각하는가? 당신이 성취하는 것은 무상정각(無上正覺)으로 원만해서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