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真愚)
【정견망】
최근 적지 않은 동수들이 근본(根本) 집착 문제를 교류하고 있으니 나 역시 내 층차에 입각해 자신의 인식을 말해보고자 한다.
(1)
개인적으로 보기에 근본 집착이란 수련인이 대법에 동화(同化)하는 것을 저애하는 근본 장애다. 근본 집착은 아주 깊이 숨겨져 있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자신이 가장 고수하고 가장 건드려지기 싫어하는 것이라 제거하기가 몹시 어렵다. 많은 사람이 근본 집착에 이끌려 법을 얻고 수련하기 때문에 암암리에 이미 근본 집착을 대법 위에 두고, 이 집착의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법을 얻고 수련한다. 때문에 그가 대법에 동화하는 가장 크고 가장 근본적인 장애가 되었다. 근본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법을 공부해도 법을 얻을 수 없고 진수(真修)할 수 없으며 최후에 한바탕 헛된 것이 되거나 또는 구세력에 의해 도태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근본 집착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법을 얻고 수련하는 마음이 매우 순정(純淨)하기 때문에 근본 집착이란 문제가 없다. 어떤 이들은 길고 간고한 수련 과정에서, 대관(大關)·대난(大難) 속에서 이미 근본 집착이 바로잡혔지만, 자신은 아마 인식조차 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인식으로 근본 집착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조급할 필요는 없고 오직 진수(真修)하기만 하면 이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2)
집착(執著)은 표면적인 단어의 뜻과는 다르다. 매 하나의 집착 배후에는 근원(根源)과 내함(內涵)이 있다. 같은 집착이라도 사람마다 근원과 내함이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쟁투심(爭鬪心)은 하나의 집착심이라 표현이 비슷해 보이는데 즉 쟁투하는 것으로 정도의 차이만 있다. 그러나 매 사람의 쟁투심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형성된 원인과 발전 과정 및 배후에 관련된 요소, 관통하는 층차 및 지나온 역사 과정이 다 다르다. 때문에 비록 모두 쟁투심으로 불리지만 매 사람마다 쟁투심의 진실한 형상과 맥락의 뿌리 체계[根系]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참조가 없다. 모(某) 수련인이 쟁투심을 제거한 과정과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오면 통하지 않는다.
(3)
우주 말후(末後) 시기 구우주(舊宇宙)의 일체 생명은 모두 이미 전부 변이되어 불순해졌고 다만 정도가 다를 뿐이다. 층층 아래로 내려오면서 인류 역사의 윤회 과정 중에서 일부 변이 요소는 층층 아래로 대응해 내려와, 전반 역사 윤회 과정을 관통하는 동시에 금생금세(今生今世)로 연장되어 다시 한번 펼쳐지는 한 가닥 방대한 맥락(脈絡) 체계를 형성했다. 즉 이 집착의 뿌리 체계는 이 생명의 체계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것이 사람의 표면에 대응하는데,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집착하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집착하는 사람 마음은 제거하기가 극히 어렵고, 또한 가장 은폐되어 있으며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것이 관통한 생명의 층면(層面)이 너무 깊고, 그것이 지나온 역사적 과정이 너무나 길며, 배후에 관련된 요소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이다.
모든 집착심은 뿌리가 있고 모두 형상과 맥락이 있다. 같은 집착이라도 사람마다 그 형상과 맥락이 모두 완전히 다르다. 어떤 집착은 뿌리가 아주 얕아서 단지 표면에만 형성되어 있다. 이런 집착은 제거하기 쉽고, 식별하기도 쉽다. 하지만 어떤 집착은 뿌리가 아주 깊어서 아래로 더 깊이 파고들면, 그것 배후에 그것과 연계되고 감춰진 심층(深層)의 요소가 있는데 또 이게 끝이 아니라 이 심층 요소를 더 깊이 파보면 이런 요소 배후에 또 숨겨진 더 깊은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는데 층층 이러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집착심 배후의 맥락과 뿌리 체계다.
집착심은 또 반드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에서는 서로 다른 집착심이지만 깊이 파보면 부동한 층면의 심층에서 아마 한데 연계된 한 몸일 수 있는데 즉 공동의 근원을 지닐 수 있다. 그것들은 층층 서로 은폐하고 서로 교차해 서로 강화하며 가상을 만들어 심층의 진정한 근원을 공동으로 감춰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4)
단지 표면적인 집착만 제거해서는 깨끗해질 수 없다. 이는 마치 나무의 가지와 잎과 같아서 뿌리를 파내지 않으면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자라날 것이다.
우리는 안으로 찾음은 바로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늘 밖으로 찾지 않는 것임을 안다. 개인적인 깨달음은 이 ‘안[內]’이란 글자에는 또 심층으로 가고 미시적으로 찾는다는 함의가 있다. 안 자체가 바로 심층이고 미시적이란 뜻이 있다. 동일한 집착이 매 사람의 생명 체계 속에 자라난 뿌리 체계는 다 다르다. 매 사람마다, 매 집착심마다 심층으로 찾고 안으로 찾는 과정은 모두 참조가 없다. 필자의 《수련 노트 5: 겸손을 깨닫다》는 바로 개인의 수련 과정으로 한 차례 안으로 깊이 찾은 과정이다.
(5)
뿌리 체계가 깊은 어떤 집착은 표현이 아주 은폐되어 있고 아주 교활해서, 한 층 또 한 층 감춰져 있어 마치 백골정(白骨精)처럼 변화가 심하다. 대법에서 연련(演煉)해 낸 화안금정(火眼金睛)으로 층층마다 미시적으로 안으로 찾아야만 그것의 원형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의 전모와 진면목을 간파한 후,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만 비로소 그것을 흔들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진수자는 수련하려는 마음이 아주 순정해서 늘 대법을 위해 생명의 일체를 깡그리 버릴[捨盡] 수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학력이 낮고 무식해 보일지라도, 간고한 수련 과정에서 심층의 집착이 이미 무형 중에 대법에 의해 바로잡혔다.
대법을 위해 일체를 깡그리 버릴 수 있음이 근본이며, 일체 집착이 아무리 뿌리 체계가 깊고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장차 모두 깡그리 버릴 수 있다.
초기에 수련할 때, 나는 일이 생기면 늘 안으로 찾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문제와 모순이 생겼을 때, 늘 한 무더기 마음을 찾아서 앞에 놓을 수 있었고 찾은 것도 괜찮다고 느꼈으며 또한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일종 무력감이 있었고 미망(迷妄)에 빠져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마치 이런 집착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근본을 찾지 못하고 정확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련 초기에 내가 안으로 찾은 것을 돌아보면, 비록 많은 마음을 찾았지만, 매 마음마다 다 아주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두루뭉술했다. 매 하나의 마음이 마치 같은 개념이고 마치 사람마다 다 똑같은 개념처럼 보였다. 이런 마음들을 발견했을 때, 마치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것처럼 별로 큰 느낌이 없었다.
나중에 나는 안으로 찾음은 단지 횡적(橫的)으로만 집착을 찾아선 안 되고 단지 하나의 층면(層面)에서만 전개해 찾아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적(縱的)으로도 찾아야 하고 심층(深層)으로 미시적으로 층층마다 찾아야 하는데 그것 역시 뼈를 깎는 과정이다.
먼저, 표면적인 집착을 따라가면서 그것의 근원을 찾고, 이 집착 배후에서 어떤 요소들이 작동하는지 찾으며 배후 요소를 찾는다. 그 다음에 이 요소 배후의 더 깊은 요소가 무엇인지 찾는데 이렇게 한 걸음씩 추적해서 찾아 줄곧 근원까지 추적한다. 이렇게 층층 안으로 찾는 동시에 우리는 또 자신의 일생을 펼쳐 본다. 이 집착이 이번 생에 생성되고 발전한 전체 과정을 추적해 그것이 생긴 원인 및 어떻게 자라났고 그것이 대응하는 표면의 일체 표현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 자아를 기만하는지, 어떻게 자아를 은폐하고 위장하는지, 어떻게 배후에서 자신의 일생을 통제하고 좌우지하는지 등등. 이 전체 과정을 다 걷고 나면 집착이 더는 추상적이고 모호하지 않을 것이며 더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게 되는데 갈수록 명석해지고 갈수록 구체화되며 갈수록 더 미세해진다. 최후에 그것의 전체 면모와 그것의 전반 맥락 뿌리 체계가 모두 눈앞에 현현(顯現)하는데 그것의 진짜 모습[真形]이 드러난다.
하지만 수련이 그 층차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떤 집착은 일시적으로 그것의 뿌리를 찾을 수 없고, 그 층면에서 끊어지는데,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수련 층차가 향상됨에 따라, 어느 날 그 층차를 돌파하게 되면 그것 배후에 숨겨진 심층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며 서서히 그것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진수(真修)와 병행하는 것이다.
(7)
안으로 찾음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근원과 심층으로 찾지 않으면 영원히 표면에 머무를 뿐이며, 이는 거짓 수련의 일종 표현이며, 건성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설령 아무리 많은 마음을 찾아냈다 해도 별 쓸모가 없는데 생명 심층의 그런 변이는 아예 건드리지 못한다.
일체 집착의 근원은 다 사(私)다. 많은 이들이 안으로 찾은 후 얻은 결론이 다 “사심(私心)” 이라 여기며 여기서 끝까지 찾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私)”는 단지 하나의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개념일 뿐 표준답안이 아니다. 대관(大關)·대난(大難) 속에서 자아를 다 버리고 고통스럽게 심층으로 안으로 찾는 과정을 거쳐,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사(私)가 서서히 구체화 되고 그것의 형상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애초 아주 모호한 것에서 서서히 눈앞에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나고 갈수록 세밀해진다. 최후에 그것의 매 하나의 세포, 매 하나의 맥락마저도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나면 그것의 진짜 얼굴[眞容]이 드러난다.
매번 근본을 찾을 때마다 몸에서 진동을 느낄 수 있고 대법의 거대한 에너지와 생명이 심층에서 바로잡힘을 느낄 수 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정확히 찾았음을 아주 똑똑히 알게 되고 그것의 뿌리는 이미 뽑힌 것이다.
(8)
더 심층으로 더 근원에서 찾을수록 과정이 더 고통스럽고 더 힘들고 더 은폐되어 있으며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더 많아진다. 특히 대관(大關)대난(大難)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이란 말로 형용하는 것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이 역시 많은 사람이 진수할 수 없게 하고 심층으로 안으로 찾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주요한 장애다.
집착심은 모두 업력과 연대(連帶)되어 있으며 특히 그런 근원이 아주 깊은 집착심은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기나긴 역사의 윤회 속에서, 그것이 층층 아래로 뻗어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거대한 업력을 지을 수 있다. 이 집착의 근원을 파내고 그것을 건드리려면 그것과 연대된 상응하는 업력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은 극히 고통스럽고 극히 어려울 것이며, 대관과 대난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응하는 관난(關難)은 이 집착 체계를 건드릴 수 있으며, 또한 오직 이렇게 큰 관난만이 그것의 근원을 건드릴 수 있으니 이는 대응하는 것이다. 진수자는 대관(大關)대난(大難)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안으로 찾으며 그것의 근원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의 진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의 뿌리를 파낼 수 있다. 이때 아마 신적(神迹)이 나타날 것이며 거대한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또한, 교활하고 가짜로 수련하는 어떤 이들은 관난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또는 표면만 닦는데 심층으로 안으로 찾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중요한 관(關)은 어쩌면 두 번째 기회가 없을 수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 기연이 한데 모여 이뤄진 것으로 한번 놓치면 곧 영원히 놓치게 된다. 이 관난(關難) 속에서 건드려진 집착의 층면은, 그것을 흔들어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건드리지 못하면 그 생명의 대응하는 층면의 변이가 바로잡힐 수 없다. 이후 설사 원만할 수 있다 해도 아마 이 층차 아래에 불과하거나 또는 자기 생명 체계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집착이 많이 있지만, 매 집착마다 다 아주 깊은 근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착은 아주 얕고 아주 표면적이라 심층으로 깊이 찾을 필요가 없다. 비교적 큰 관난이나 지나가기 어려운 관난을 만나면, 더욱이 끊임없는 교란이 있을 때는 그럼 진정하게 심층으로 안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9)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사관(生死關)을 수련인의 가장 큰 관이라 여긴다. 사실, 수련인에게 있어 생사를 내려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후 귀착할 곳을 알기 때문이다. 속인도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데 많은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하고 생명을 경시한다. 또 어떤 사람은 체면을 목숨보다 중시하는데 차라리 죽을지언정 체면을 지키려 한다. 어떤 이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목숨보다도 더 이익을 중시하는 등등.
어떤 집착은 대단히 커서 배후에 연대(連帶)된 업력과 관련된 층층의 변이 요소가 이 생명의 아주 깊은 층면까지 관통되어 있어서 그것을 흔들면 이미 사람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을 훨씬 뛰어넘는다. 때문에 설사 생사를 내려놓고 생사관을 넘겼다 해도 역시 이 집착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사관보다 더 크고 더 어려운 고험(考驗)이 있는데 바로 생명의 근본에 대한 고험이다. 아마 이렇게 큰 고험이 있어야만 이 집착의 근본을 건드릴 수 있고 이 집착을 흔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진수자(真修者)들이 모두 생사관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관 거대한 난을 겪는데, 나도 일부 교류 문장에서 일부 대륙 동수들의 수련 과정을 본 적이 있는데 보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인류의 육체 또는 정신의 감당에는 한계가 있기에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장 두려운 관은 육체 또는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극한에 도달한 후에도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는 그런 철저한 절망이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그야말로 바닥이 없는 절망이다.
사람의 언어는 아주 무력해서 그 고통과 두려운 정도를 형용할 수조차 없다. 이는 생사관의 고험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이 순간이 또한 가장 위험한 순간이며, 생명의 뿌리에 대한 고험이다. 만약 이 순간에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견정(堅定)한 일념(一念)을 지킬 수 있다면, 장차 생명 중의 일체를 모두 대법 중에서 깡그리 버릴 수 있는데, 이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해낸다면 즉시 천지가 뒤집어지고 신적(神迹)이 나타날 것이며, 무엇이 사은호탕(師恩浩蕩)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 마치 봉황의 열반(涅槃)처럼 생명이 대법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일념(一念)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생명은 훼멸 될 수 있으며 또는 반면(反面)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도태될 수 있다.
어떤 수련인의 수련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 대관(大關) 대난(大難)은 자신이 수련에 큰 누락이 있고, 길을 잘못 걸어서 조성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자신의 집착이 조성한 것으로 진수(真修)하지 못하거나 수련에 정진하지 못하고 수련을 엄숙히 대하지 못해 집착을 방임해서 생긴 큰 누락이다. 이런 대관·대난 속에서도 만약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일념(一念)을 지키고 법에서 일체를 다 버릴 수 있다면 곧 관을 넘어갈 수 있고 신적이 펼쳐질 것이다. 반대로 이 일념을 지키지 못하면 아마 하루아침에 훼멸될 것이다.
이상은 단지 개인 층차의 작은 인식일 뿐이다. 개인이 수련의 길에서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라 꼭 옳은 것은 아니니 단지 교류로 제공할 뿐이다. 여러분이 부디 법을 스승으로 삼기 바란다.
[역주: 원문에는 같은 저자가 쓴 《수련 노트》 1~5편 중문 링크가 걸려 있지만 한글 정견망에서 한글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어서 링크를 생략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