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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고소장을 부칠 때 나타난 신적

중국 대법제자 필성(必成)

【정견망】

나는 2012년 정식으로 대법 수련에 입문한 대법제자다. 올해로 13년째 수련해 왔으니 나름 신수련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수련하면서 줄곧 내 손을 잡고 이끄신 분은 사부님이셨다. 이 기간에 나는 대법 중에서 얻기만 하던 데에서 지금은 이성적으로 수련 중의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에 사부님의 자비하신 가호가 가득 차 있다. 아래에서는 이 기간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사부님께 보고드리려 한다.

2015년 장쩌민 고소 열풍이 일어났고 우리 지역 많은 동수도 첫 번째 시간에 장 고소에 참여했고 모두 큰 수확이 있었다. 모두 장쩌민 고소 이후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아주 많은 패괴(敗壞)한 물질들을 제거하도록 도와주셨음을 느꼈다. 또한 한 차례 구세력에 대한 심각한 부정이자 이 기간 구세력의 대법제자 박해에 대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장 고소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동수들도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부정확한 관념을 갖고 있다.

2017년 초여름, 나는 우리 지역의 노동수 두 명과 함께 산골 지역에 있는 대법제자의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동수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고, 두 노동수와의 교류를 거쳐 산골 지역 동수들도 장 고소에 동참해 구세력의 배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떠날 때 동수들에게 그 지역 다른 동수들에게 연락해, 만약 아직 장 고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와서 고소장 작성을 돕겠다고 했다.

주말에 소장 작성을 돕기 위해 두 노동수 및 나와 아내(동수), 넷이 산골로 차를 몰고 갔다. 가는 길에 많은 신(神)들이 차 지붕을 둘러싸고 우리를 호송하는 것을 보았다. 동수가 사는 산악 지역은 밤이 많이 났는데, 밤나무 앞을 지나가는데 밤의 여신(女神)이 우리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동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몇 명이 소장을 쓰고 있었지만,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는 흩어져서 동수들의 소장 작성을 도왔다.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도 소장 작성을 돕기 위해 배가 나와 불편한 몸으로 노트북을 들었다. 동수들이 박해당한 경험담을 들으면서 당시 사악한 당이 얼마나 사악하게 탄압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또한 동수들이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대법을 실증한 장거(壯擧)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줄곧 정오 무렵까지 소장을 작성했고 대부분 고소장을 완성했다. 그때 한 노동수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 큰 배 좀 봐, 우리 집에 가서 식사를 좀 먹고 잠시 쉬었다 가세요. 오늘 내가 여러분을 위해 꿀떡을 만들었으니 드시고요.”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그 노동수 집으로 함께 갔다. 그의 집은 소박했지만 매우 깔끔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는 집에서 쉬고, 나와 다른 청년 동수가 계속해서 시간을 다그쳐 소장 작성을 했고, 오후가 되어서야 다 작성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고소장들을 당일 우송하기 위해 서둘러 인근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그날 마침 토요일이라 우체국은 4시에 문을 닫았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까지 차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넘었고 우리는 다그쳐 동수들과 함께 출발했다. 하지만 우체국에 도착해 미비한 서류가 있었다.

우체국 직원이 말했다.

“우리는 4시에 퇴근하니 오늘이든 내일이든 서류를 직접 찾아보세요.”

우리는 다른 생각 없이 다시 차를 몰고 돌아갔다. 동수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3시 45분이었는데, 당시 아무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오직 시간을 다그쳐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우리가 자료를 가져온 후 마침 다른 두 동수의 고소장도 완성되었다. 내 생각에 사부님께서 그들도 빠뜨리려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우리는 물건을 챙겨 떠났는데 동수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괜찮아요, 늦지 않았어요,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나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에게 말했다.

“너도 법을 실증하러 왔으니 이번에 반드시 너의 가장 빠른 속도를 내야 한다.”

가는 길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동수들은 함께 발정념을 했고, 나는 정신을 집중해 차를 몰았다. 머릿속에 다른 잡념은 없었고 오직 “반드시 발송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체국에 도착했을 때 시계를 보니 정각 4시였다. 하지만 우체국이 이미 문을 닫은 것을 보고 동수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보니 도로변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우체국 직원임을 확인했다. 그에게 다가가 사정을 말하자 그 직원은 친절하게도 우리를 위해 다시 우체국 문을 열어 수속을 받아주었다. 나와 다른 동수들은 차 안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정념으로 동수를 가지(加持)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고소장을 송달할 수 있게 했다. 동수가 차량으로 돌아와 “이미 우편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이때야 모두 정신이 들었는데 처음 우체국까지 차를 몰고 갈 때는 30분 넘게 걸렸는데 이번에는 겨우 1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신적(神跡)이 나타난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가지해 주신 것임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동수가 말했다. “우리 함께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웁시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길에 계속 진언을 외쳤다. 우리가 동수 집에 돌아가서 경험을 말해주니 동수들도 모두 사부님께서 너무 자비로우심을 느꼈다. 이때 임신 중이던 아내가 “방금 전 동수 집에서 단잠을 자고 꿀떡을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밤의 여신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다시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은 이미 8년이 지났고 아내 뱃속에 있던 아이는 우리 곁에 앉아 함께 법을 배우는 대법 소제자(小弟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를 맞이했던 동수는 사악한 당의 박해를 받아 사망해 육신을 잃었다. 이 동수는 매번 법회에 참석했고 늘 주동적으로 현지 동수들을 일깨워 원고를 제출했으며 줄곧 우리 지역과 연락을 유지했다. 한번 왔다 가려면 2시간 정도 버스를 타야 했지만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그들이 모두 다른 공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가 최후의 이 길을 완주해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파룬따파가 1992년 처음 전해진 이래 인간 세상에서 이미 33년이 지났다. 나는 주불(主佛)과 함께 정법하는 이렇게 영광스런 시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사부님의 손을 꽉 잡을 것이다. 동수들과 비학비수(比學比修)하면서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