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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태극’ 소우주가 인간 세상에서 체현되는 형식의 하나

한가(漢家)

【정견망】

태극(太極)은 도가에서 소우주(小宇宙)를 추상(抽象)한 것으로, 인간 사회에 대응하는 체상(體像)의 하나가 바로 ‘황제(皇帝)’다. 때문에 황제 안에는 음양(陰陽)을 담고 있다. 조정에서 정사를 할 때는 ‘양(陽)’은 ‘인정[仁政 선정(善政)]’으로 체현되고 ‘음(陰)’은 ‘형법(刑法)’으로 체현된다. 따라서 역조(歷朝 역대 조정) 황제들은 모두 선(善)과 악(惡)을 동시에 사용했으며, 이는 음양의 속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조정 관료들에게 체현된 것은 선신(善臣)과 악신(惡臣)의 구별이다. 황제는 황조(皇朝)의 성주괴멸(成住壞滅) 단계에서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 단계에서 각기 다른 체험이나 인상을 갖게 된다.

선과 악은 인간 세상에서 매우 극단적으로 체현된다. 악이 인류에게 주는 고통은 끔찍하지만, 인간 세계를 초월한 고층에서는 이런 끔찍함이 없다. 선과 악은 단지 두 가지 다른 특성을 가진 물질일 뿐이다. 역대 황제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상하 5천 년 중화 역사에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기에는 선과 악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작았다. 악의 측면에서, 가령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전쟁을 벌였을 때, 일반 백성에게 미친 영향은 작았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는 무위의 다스림(無為而治)으로 돌아갔고, 백성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살았으며, 백성에 대한 황권(皇權 황제 권력)의 제약은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가장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하(夏)’부터 중국에 조대(朝代)가 나타났고 인간의 층차는 또 한 층 내려갔다. 따라서 선과 악의 표현도 한 층 더 낮게 체현되었다. 조대(朝代)의 교체가 파급되는 면이 더 넓어졌고 ‘도(道)가 있는 사람이 도(道)가 없는 사람을 정벌’해 무력으로 천하를 다퉜고 거의 모든 민중에게 영향을 미쳤다. 선한 자는 더 선해졌고, 악한 자는 더 악해졌다. 조대가 교체된 후 황제는 인정(仁政)을 위주로 하되 형정(刑政)을 보조로 했다. 비록 민중들이 세금 부담을 지긴 했지만, 그 부담은 아주 작았고, 생활은 그래도 아주 행복했다.

하, 상(商),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 전국), 서한(西漢), 동한(東漢)은 그들의 ‘성, 주, 괴’ 시기에 모두 매우 좋은 시기였다. 이들 조대의 90% 기간에 사람들은 모두 편안하고 상화(祥和)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멸(滅)’의 시기, 겁난 속의 중생이 겪는 고통의 정도 역시 후세 조대보다 훨씬 적었다. 이 시기에는 황제 역시 동시에 겁난 속에 처했고, 그의 고통은 민중보다 더 컸다.

한 조대(朝代)가 400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될 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대의 사람들의 행복한 삶이 포함되어 있을까?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은 겨우 30~40세, 심지어 30세 정도였기 때문에, 한 세대는 불과 십수 년 정도였다. 때문에 아주 많은 세대가 평생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30세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큰 복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업(業)을 짓기 마련인데, 수명이 짧을수록 업을 덜 짓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세계는 매우 고통스럽고 또 미혹 속에 있기 때문에, 일찍 떠나는 것이 복분(福分)이었다.

기본적으로, 하조(夏朝)는 후세 인류가 생존하는 환경의 형태를 확립했다. ‘변경[邊界]’ 개념이 이때 확립되었으며, ‘변경’은 또한 극히 중요한 생존 조건이었다. 예를 들어, 제(帝)는 포괄하는 면이 있고, 왕(王)은 소속이 있으며, 국(國)에는 경계가 있고, 군(郡)도 경계가 있으며, 지구도 경계가 있고 우주도 경계가 있다. 사람은 단지 육지에서만 살 수 있을 뿐, 물에 들어가면 익사하고, 불에 들어가면 타죽는다. 사람을 죽이면 목숨을 갚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변경의 이념이다. 이 전까지 인류의 사상에는 경계가 없었다.

뒤를 이은 상조(商朝)는 인류가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정립했다. 인류는 어떻게 생존하는가? 근본적으로 하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상조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상태는 하늘을 공경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으며, 하늘의 점화(點化)에 따라 생활했다. 상조 말기에는 점복(占卜)이 대량으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이미 정도(正道)를 벗어났다. 이후 주조(周朝)가 건립되어 800년 동안 ‘예(禮) 악(樂)’을 확립했으며, 인류의 내함(內涵)을 풍부하게 했다. 예악은 생명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며, 신체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교화하는 공(功)이 있다.

전국(戰國) 말기, 우주에서 온 부면(負面) 요소가 지구에서 발효되고 부패해 폭발했으며, 당시 전국 칠웅(진을 포함)과 중원 대지 주변을 침투했다. 제자백가, 사악한 마(邪魔)의 잘못된 이론이 중원 대지를 가득 채웠다. 천고일제(千古一帝) 진시황(秦始皇)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는 반격에 나서 육합(六合)을 정복하고 제자백가를 제거했으며, 북쪽으로 장성을 쌓고 남쪽 지역을 공격했다. 진(秦)의 율(律)이 엄격한 것은 당시 패괴(敗壞)한 생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패괴한 생명이 사라지면 더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조(秦朝)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진시황은 중원의 패괴한 생명을 청산했을 뿐만 아니라 저승의 질서도 확립했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이 세상에 둘도 없는 황릉(皇陵)을 건설한 이유 중 하나다. 저승은 진조부터 정식으로 확립되었으며, 이후 큰 조대의 개국 황제는 인간 세상에 건곤[乾坤 즉 황조(皇朝)]를 개척하는 동시에 자기 조대의 저승 제국을 정해야 했다. 모든 것이 정착된 후, 진시황이 붕어했고, 이어 대한(大漢) 천조(天朝)가 등장했다. 대한(大漢)은 후세 인류의 2천 년 문명을 다지기 위해 왔다.

한조(漢朝)는 고대에 ‘천한(天漢)’이라 불렸으며, 인간 세계 영토와 유사하게 천상(天上)에도 스스로 흐르는 강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인체는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물가에서 살아간다. 인간 세계의 거의 모든 문명은 강과 호수 즉 물 옆에 세워졌다.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은 대한천조(大寒天朝) 체내를 밤낮으로 흐르며 중화 자녀들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었다. 한조는 한족이 생존하는 근본으로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 4백 년은 후세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문화를 다지고 보급하기에 충분했다.

더 높은 층차에서 보자면, 서한(西漢)의 수도 장안(長安)이 위치한 관중(關中) 평원은 상고(上古)시기에 강이었다. 추상적인 각도에서 보면 황하의 물 굽어져 내려온 후 관중 평원이 나타났고 서한 왕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한조(漢朝)는 “적(赤)”을 숭상하며 오행에서 화(火)에 속한다고 여겼다. 그렇다, 불(火)이 물(水)을 극복할 수 있으니, 대한천조(大漢天朝) 생명은 모두 물속에 있고, 만약 인간 세상에 드러내려면 곧 불로 물을 이겨 물이 떨어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드러난 황하 강바닥에 대한(大漢)을 세우고 민중들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게 했으니 한족(漢族)의 천하가 곧 출현했다.

이것이 바로 양한(兩漢)의 개국 황제가 하려고 했던 일이다. 한 고조 유방은 붕어한 후 장안 북쪽 높은 언덕에 묻혔는데, 이 언덕은 상고 시기 강변이었고, 서한 왕조의 황제, 후궁, 대신들이 모두 이 강변에 묻혀 물길에 있는 대한(大漢)의 중생을 지키고 있다.

한편 동한 세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대한천조에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밀어놓도록 다져야 했고 인류의 의, 식, 주, 교통, 풍속 및 문화를 완전히 연기했고, 서한 왕조에서 처음 수립된 유가(儒家) 문화의 정통적인 지위를 절정에 달하게 했다. 때문에 후세 역사계에서 동한은 유풍(儒風 유가의 풍속)이 가장 성대하고 풍속이 가장 아름다운 조대로 평가한다. 현대인들은 한복(漢服)을 좋아하는데 한복은 우아하고 표일(飄逸)하면서도 편안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진짜 한복은 무엇인가? 바로 양한(兩漢)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인륜은 부부 및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도(道)다. 세조 광무제 “유수”와 광렬(光烈) 황후 “음려화(陰麗華)”는 후세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혼인 및 세상을 살아가는 도(道)를 연기했다. “벼슬을 하려면 집금오(執金吾)요 아내를 얻으려면 음려화”라는 말이 있다. 관직이 높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면 그만이니 이것이 중용의 도다. 일을 함에 구하지 않음이 바로 천도(天道)이니 이렇게 하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당신을 찾아온다. 또한 아내를 얻으려면 음려화처럼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전아(典雅)하고 현숙(賢淑)하며 효성스럽고 겸손한 여자를 얻어야 한다. 사람이 오직 도(道) 속에 있으면 하늘은 곧 모든 것을 가장 잘 배치해 주신다. 광무황제는 황제가 되길 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이 만약 제위에 오르지 않으시면 한가(漢家)의 사직이 위태롭고 우리들도 공명을 성취할 희망이 없으니 곧 해산하겠습니다.”라는 여러 신하들의 압력으로 부득불 제위(帝位)에 올랐다.

광무제는 또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선심(善心)과 사랑,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직접 보여 주었다. 곽성통(郭聖通) 황후가 너무 소란을 피우자[그녀는 이런 부면(負面) 문화를 연기하기 위해 왔다] 대한의 후궁과 궁인들이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황자(皇子)들을 키우기 어려워졌다. 광무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하지만 그녀를 또 “중산왕(中山王)의 태후”, “패(沛) 태후”로 삼아 아들 유강(劉疆)과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게 했고 가족들도 후하게 대우해 당시 “금혈(金穴)”로 불릴 정도로 많은 금은을 상으로 주었다. 그녀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광무제는 직접 대신들을 이끌고 장례를 치렀다. 폐황후를 황후와 마찬가지로 대하고 심지어 더 잘 대우한 것은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이 역시 세조 유수만이 할 수 있던 일이다.

유수(劉秀), 음려화(陰麗華) 부부는 “빼어나고(秀)” “아름다운데(麗)”, 이는 마치 하늘이 이 왕조를 일부러 배치해 인간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회와 가정의 상태를 보여 준 것처럼 같다. 유수의 묘호를 “세조(世祖)”라 했으니, 정말로 한가(漢家)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상의 하나가 되었다. 반면 유방을 고조(高朝)라 한 것은 또 다른 층차의 체현이다.

또한 동한 왕조의 가장 선명한 특징은 바로 절검(節儉 절약과 검소)이다. 유수는 정벌 전쟁을 시작하면서 “싸우지 않을 수 있으면 싸우지 않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문(文)을 닦고 무(武)를 내려놓아 백성들을 휴식하게 했다. 동한 왕조가 세워진 후 서역의 여러 국가들이 계속해서 동한에 귀의(歸依)하려 했지만 광무제는 모두 거부했다. 여기에는 절검의 요소가 있고 또한 서역은 본래 동한 천체 범위의 요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광무제가 굳이 관할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무제는 농사를 잘 지었고, 애초 군대를 일으킬 때 소를 타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이 얼마나 돈후하고 욕심이나 추구가 없는가? 때문에 후세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켜 소 등에 탄 황제라 불렀다. 때문에 그는 어떻게 농업을 발전시키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광무제의 뒤를 이어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반초(班超)’를 서역에 파견했고, 반초는 겨우 36명을 데리고 서역을 수복했다. 이는 왕망(王莽)이 서한을 멸망시켜 서역이 중원 왕조의 통치에서 분리된 지 65년 만에 동한에 의해 다시 통일된 것이다. 거의 국가적인 비용을 소모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명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처님을 좋아한 것과 관련이 있는데 그에게는 불법(佛法)을 중국에 들여오는 사명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꿈에 서방에 머리 위에 신성한 빛이 있는 존자(尊者)가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그 중 한 사람이 고서의 기록에 근거해 “이는 부처님입니다”라고 했다. 명제는 매우 기뻐하며 곧 사자를 파견해 그 가르침을 청해오게 했고 이렇게 중국에 불법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중화 대지에 도(道), 유(儒), 불(佛)이 모두 제자리를 잡게 된다.

동한은 ‘명장(明章)의 치’[명제(明帝)와 장제(章帝)의 통치 시기] 이후 화제(和帝) 시기에 국력이 절정에 도달했다. 북흉노(北匈奴)는 거기장군 ‘두헌(竇憲)’의 한 차례 전투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는 새외(塞外) 3,000리나 떨어진 연연산(燕然山)에 ‘비석을 새겨’ 뛰어난 공적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남흉노(南匈奴)도 한족(漢族)으로 동화되었다. 이때부터 이전 역대 제왕들의 가장 큰 북방 위협이었던 흉노가 완전히 소멸되었고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흉노는 광무제가 왕조를 세운 이후 동한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남흉노는 자발적으로 동한과 가깝게 지냈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성을 유씨로 고쳤다. 이는 광무제의 현명한 통치와 뛰어난 군사적 업적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화제(和帝)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은 후세 왕조가 영원히 흉노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려였다. 황제는 천명(天命)을 집행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생각하는 기점이 대신들과는 크게 달랐다. 남방에서는 복파(伏波) 장군 마원(馬援) 등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남방 및 교지(交址 월남)를 평정했다.

동한은 절검과 선정(善政)을 통해 민중의 부담을 최대한 줄였고 중국 황제 체제 중에서 민중의 부담이 가장 적은 조대였으며, 관원 수도 가장 적었다. 서한도 초기에는 부담이 더 작았지만, 한무제(漢武帝)의 수십 년 정벌 전쟁으로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漢朝)는 고대(여기서는 제왕 체제를 가리킨다. 주나라 이전 시기는 제왕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이 더 적었고, 상고시대에는 민중의 부담이 거의 없었다)나 현대를 막론하고 세금 부담이나 민중의 부담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또한 이와 대응하는 것은 동한의 극히 강력한 문치무공(文治武工)과 민중이 가장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면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는 동한 체제가 맺은 풍성한 결실이다.

이것은 또 물의 강대함을 체현한다. 물은 겉보기엔 유약해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본원(本源)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물질이다. 동한은 광무제가 62세로 장수(음 황후의 수명도 비슷했으며, 곽 황후의 수명은 40대였지만 이 역시 당시 인류의 평균 수명을 초과한다)를 제외하면, 후대에 즉위한 황제들의 나이가 일반적으로 많지 않았다. 명제(明帝), 장제(章帝), 화제(和帝)는 모두 장년기에 사망했으며, 이는 고대인들의 평균 수명과 유사했다. 그리고 또 몇 명 어린 황제들도 있었다.

동한 황실의 후기는 아주 유약해 보이지만, 그래도 238년(삼국 시대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삼국은 초기에 모두 동한의 황제가 봉한 왕이었고, 나중에 조비가 헌제를 핍박해 양위시킨 후, 유비가 황제가 황제를 칭했지만 이 역시 한조에 속한다. 동한은 195년 헌제에서 끝났다)의 국운을 유지했으며, 중국 역사상 풍속과 문화가 가장 아름다운 조대이자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멸망에 이를 때까지 외적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후인들은 “중국 역사상 늘 약해져서 나라가 망했지만, 오직 한조(漢朝)만은 강해서 멸망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사람의 사상이 사람을 속이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원래 ‘부드러움’이 강대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주 강하다. 한조가 높이 떠받든 유가의 입세(入世) 문화, 도불(道佛)의 출세(出世) 문화 및 이 시기에 만들어낸 인류의 의상, 음식, 주택 등의 문화는 이후 2000년간 중화를 풍요롭게 했으며, 역대 황제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쇠퇴하지 않아 일찍이 중화 자녀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한가(漢家) 천국(天國)의 국풍이 되었다.

동한은 아마 어진 황후가 가장 많은 조대일 것이다. 부드럽고 공손하며, 우아하고 너그러우며, 인자하면서도 겸손했던 광렬황후 음려화 이후, 한 명제의 ‘명덕(明德) 마황후(馬皇后)’는 중국 역사상 황후 덕성의 모범이 되었다. 이외에도 두(竇) 황후, 등(登) 황후 등은 현숙(賢淑)했을 뿐만 아니라 신통이 광대해서, 어린 황제를 도와 조정을 강력하게 수호했다. 그들은 ‘황후이자 아내’의 품덕 표준을 보여 주었다.

광무제는 붕어한 후, 낙양 북쪽 황하 남안(南岸)에 묻혔으며, 능묘 남쪽으로 망산(邙山)을 마주 보고 북쪽으로는 도도히 흘러가는 황하가 있다. 후세에 이를 가리켜 ‘황하를 베개 삼고 산에 발을 뻗은’ 형세라 한다. 이는 모든 제왕의 능묘 중 유일무이한 것이다. 부드러운 황하의 모래사장에 묻혔지만, 황하는 여러 차례 물길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상 황하는 마치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처럼 광무제의 무덤[원래 이름은 ‘원릉(原陵)’, 현지에서는 ‘한릉(漢陵)’이라 부름)을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 이는 수신(水神)의 존중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지형에 묘를 쓴 이유는 아마도 황하의 물길을 열고 산체(山體)가 물길을 침범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광무제 유수의 능묘는 중화민족의 모친인 황하 강변에 직접 서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무궁무진하게 후세 한가(漢家) 자손들을 자양하도록 수호하고 있다.

황제 외에도 각 조정의 유명인 중 어떤 이는 충신(忠臣)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악신(惡臣) 역할을 하는데 또 두 가지 역할을 다 연기한 이도 있다. “한초삼걸(漢初三傑 역주: 한조를 건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3대 공신으로 한신, 소하, 장량을 가리킨다)”중 한 명인 한신(韓信)은 유방을 도와 한실(漢室) 천하를 다졌는데, 이는 정면(正面)이다. 그는 또 부면(負面)적인 것도 고려해야 했는데,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 이는 피동적으로 부면(負面 왜냐하면 원래 이렇게 되지 말았어야 한다) 연기한 것이다. 여치(呂雉 유방의 황후) 역시 한신을 살해함으로써 서한에 재앙이 미치게 했고 이는 말법(末法) 최후 시각에 구세력이 유방이 법을 얻는 것을 가로막는 구실이 되었다.

우주는 정(正)과 부(負)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한신은 내원이 너무 거대해서 두 방면 모두 연기해야 했다. 그에게 나온 성어 “일반천금(一飯千金 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천금으로 갚는다)”은 부면(負面) 문화인데 장기간 그에게 음식을 제공한 정장(亭長)이 오히려 몇 차례 밥을 챙겨준 빨래하는 아주머니만 못했다. 이는 인성(人性)의 약점인데 “작은 도움을 주면 은인이 되지만 큰 도움을 주면 원수가 된다(升米恩,斗米仇).” 그는 이런 인성을 연기해 후인들에게 똑똑히 알게 했다. 누구의 은혜가 크고 누구의 은혜가 작은지? 어떻게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정확한지? 사람이 큰 은혜를 배척하는 사상이 정확한지?

본문은 개인의 얕은 소견으로 타당하지 못한 곳이 있거나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3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