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1999년 중국 공산당의 파룬따파(法輪大法) 박해가 시작되기 전, 나는 다른 대륙 대법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중(大衆)의 일원이었다. 농촌 출신으로 군에 입대해 10년 넘게 복무한 후 지방 정부로 전근했다. 나는 성실하게 일했고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지방 정부에 부임한 이후로는 매년 우수 직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1999년 4·25 사건 이후, 사악한 당은 정부 기관에 근무하는 수련생들을 표적으로 삼아 수사 및 탄압을 시작했다. 특히 7·20 사건 이후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국장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형세를 잘 파악해서 당장 피해를 보지 말아야 하네. 아직은 그래도 교육과 설득 단계지만 알다시피, 머지않아 집에서 몰래 수련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거야. 우리는 모두 농촌 출신인데 군대에서 공무원으로 전직(轉職)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네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겠는가?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의 누군가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치세.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거절해서 결국 해고되었네. 지금 그는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지. 그러니 자네도 잘 생각해 보게. 좀 현실적이어야 해.”
내가 말했다.
“걱정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잘 압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장님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도 후회할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농촌 출신이고 농촌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신과 부처를 믿습니다. 확실히, 현실에는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점, 풍수, 그리고 자기 운세를 알기 위해 막대한 돈을 쓰는 걸까요? 초상(超常)적인 현상은 어디에나 있지만, 공산당 무신론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신과 부처는 정말 존재합니다. 저도 더 나은 삶과 사회적 지위를 원하지만, 수련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던 시절, 특히 내가 실직한 후, 내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묻곤 했다. “당신은 국가 공무원으로서 파룬궁을 수련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연공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생활환경과 좋은 직장을 포기했는데 과연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허황한 것들 때문에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일부 사람들은 부처나 도를 수련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1960년대에 농촌에서 태어났다. 공산당은 줄곧 무신론을 장려하고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미신이라 부르며 금지해 왔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살았고 현실에는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이 존재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답안을 찾아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고향에는 유명한 노(老) 중의(中醫) 여덟 분이 있었다(모두 문화대혁명 때 사망했다). 그들은 뛰어난 의술(醫術)을 지녔지만,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겪었다. 이 몇 분 중의사들은 자신의 일정 범위[일방(一方)] 안에서만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이 범위에서는 그들이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일단 자기 범위을 벗어나면 환자를 보기만 하면 죽었다. 따라서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은(지역이나 위치에 관계 없이) 의사의 범위(일방) 안에 있어야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현대과학의 관점에 따른다면 의술(醫術)이 고명한 의사는 어디서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이 범위를 벗어나면 의료 사고가 나는 걸까? 이런 현상은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살던 지역에 고대에 고위 관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집 주변 웅덩이에 있는 두꺼비는 울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 두면 울었다. 그의 집 주변 웅덩이에 두꺼비를 놓으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또 그가 농사를 짓던 밭에는 가시가 없었지만, 이 땅을 벗어나면 가시가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이 땅이 한때 어떤 고위 관리가 경작했던 땅이며, 수백 년 동안 가시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옛날에 작은 길이 하나 있었는데, 현지인들은 이 길을 문관도[文官道 또는 선생도(先生道)라고 함]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에는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많이 배출했다. 나중에 문화혁명 때 정부에서 정규 도로 건설을 요구하면서 이 작은 길은 철거되어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길이 없어진 후, 마을에서 가르치던 몇몇 저명한 교사들이 거의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어떤 이는 병에 걸리고, 어떤 이는 자살하고, 어떤 이는 판결을 받았다). 또 일부는 나이가 많아서 더는 가르칠 수 없었다. 그 이후 이 마을에는 소수 사립학교 교사만 배출되었고,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공립학교 교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또 무관로(武官路)라는 길이 생겼는데 이 도로가 건설된 후 거의 매년 우리 마을에서 군에 입대한 남성들이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 길도 변경되었고 그 이후로 더 이상 간부로 진급한 군인이 나오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마을에 저수지가 건설되었다. 우기에는 마을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저수지 입구를 통해 흘러들었다. 저수지 입구에는 높고 웅장한 옹벽이 세워진 아주 아름다운 “수파기(水簸箕 물살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키 모양으로 설치한 것. 지방 방언)”가 세워졌다. 그런데 이 수파기가 세워진 후, 마을 저수지 근처에 사는 한 성씨(姓氏) 일가의 청장년 남자들이 몇 달 동안 연쇄적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이 가족이 수파기 양쪽 옹벽을 허물고 나서야 청장년 남자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중단되었다.
1980년대, 우리 마을 길가에 사는 한 가족이 집을 짓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다가와 집주인에게 “당신 집을 그렇게 지으면 안 됩니다. 가장이 다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큰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들보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들보가 떨어져 가장을 쳤다. 가장은 1년 동안 집에서 하반신 마비로 지내다 결국 사망했다
나도 군 복무 시절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다. 부대 정치 부문의 한 간부가 부부 문제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업무 능력도 뛰어나 어느 간부가 그에게 호감을 느껴 사위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음에 드는 여자 동창이 있어 그 간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 후로 그는 요직에서 소외되었다. 그는 일찍이 중대 지도원 대리, 대대 교관 대리 및 부정치위원을 역임했지만, 줄곧 제1책임자는 되지 못했다. 전직(轉職)하려 해도 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나중에 지방 어느 도시의 조직부장이 되어 여러 차례 부대에 찾아와 사정하고 상사를 찾아가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간부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말로는 그의 업무 능력이 너무 뛰어나 절대 해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상부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발탁하려고 하면 그는 문제가 있으니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간단히 말해, 그는 끊임없이 억압당했고, 부대를 떠날 수도 없고 진급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대규모 군 병력 감축 과정에서 병력은 감축될 때에야 겨우 전업(轉業)할 수 있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우리 부대 참모장이 처음 간부로 진급했을 때, 한 고위 지휘관이 그에게 호감을 느껴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 나중에 이 고위 지휘관은 끊임없이 그를 억압하고 진급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간부 진급이 논의될 때마다 출장 중이거나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10여 년 후, 참모장까지 고속 진급했지만, 당시 그의 동료들은 부중대장이나 중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대규모 군 감축이 진행되던 시기에야 다른 고위 장교가 그를 위해 중재하여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이처럼 세상 일은 당연하게 보여도 신(神)의 장악하에 있으며 사람 생각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언급한 간부는 가문의 배경이 아주 좋았지만, 부대에서는 줄곧 억압받았고,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반면 나중에 언급한 참모장은 원래 아무런 배경도 없었지만 고위 지휘관이 억압하려 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는 이상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초등학교 때 어느 날, “마술단”이 우리 마을에 왔다. 그들의 공연 중 하나는 남자 배우가 빨갛게 달궈진 쇠젓가락(시골에서 난로에 쓰는 쇠막대, 길이가 1미터 가량 된다)을 삼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쇠막대(소품이 아니다)를 배우에게 건네주었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광장에서 그가 쇠막대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쇠막대를 꺼냈다. 그가 꺼냈을 때 쇠막대는 여전히 빨갛게 달궈진 상태였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대학 입시 몇 달 전이었다. 꿈에 그 해 시험지를 보았다. 시험을 치르고 시험지를 펼쳤을 때 이 문제들을 꿈에서 본 기억이 났다. 이게 무슨 일일까? 당시 머릿속이 텅 비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많은 문제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후, 시험 결과가 발표되기 며칠 전,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며 내게 말했다.
“너는 X점 차이로 시험에 떨어졌다.”
나는 즉시 정신이 들었다. 며칠 후, 시험 점수를 확인하러 학교에 갔는데, 정말 X점 차이로 떨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기이한 현상들은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나는 대법의 법리에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사실,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수련하기 위해 온 것이다. 현실의 모든 것을 제외하고 세간의 모든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통제하는 고급 생명(신)은 확실히 존재한다. 특히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중공 바이러스)이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 일찍이 대명(大明)의 개국 공신 유백온(劉伯溫)은 이 사건의 발생과 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七人一路走 引誘進了口 三點加一勾 八王二十口”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답을 알겠지만 바로 ‘진선인(眞善忍)’이다. 이는 바로 우주 근본 대법이며, 파룬따파가 심성 수련을 지도하는 표준이다.
전 세계 대법제자들은 모두 현재 사람들에게 진상을 전하고 있으며, 중공의 사악한 본질을 인식하고 중공의 일체 사악한 조직(공산당,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하고,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9자 진언을 진심으로 외우면 중공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고 마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7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