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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점에서 청성하게 깨달은 조조의 시 《구수수(龜雖壽)》 해독

청풍(清風)

【정견망】

신령한 거북 비록 오래 산다지만
언젠가는 죽을 때 있고
안개를 타고 다니는 등사(騰蛇)도
끝내는 흙먼지로 변하누나
늙은 준마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며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게
하늘에 달린 것만은 아니니
수양을 잘하면
오래 살 수 있노라
아 지극한 행운이여
마음껏 뜻한 바를 노래해보세

神龜雖壽 猷有竟時
騰蛇乘霧 終爲土灰
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
盈縮之期 不但在天
養怡之福 可得永年
幸甚至哉 歌以詠志

이 시는 조조(曹操)가 서기 207년 오환(烏桓)과의 북벌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지은 것이다. 당시 그는 53세였고, 북방을 통일하고 패업(霸業)에 성공해 바야흐로 인생의 정점을 맞았다.

이 시에서 가장 널리 낭송되는 구절은

“늙은 준마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며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이다.

사람들은 시인의 호방한 기운과 지치지 않는 추진력을 느낄 수 있는데 때문에 흔히 다른 사람을 격려할 때 이 구절을 인용한다.

하지만 시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시인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생명의 윤회를 초월해 생명의 영원한 청성(淸醒)함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대(漢代)에는 방사(方士)들이 아주 많았고, 연단(煉丹)하고 수도(修道)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주 팽배했다. 사실 조조는 근기(根基)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믿었지만,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존재하는 수도(修道)의 마음과 역사적인 배역 사이의 균형을 이 시로 표현한 것이다.

“신령한 거북 비록 오래 산다지만
언젠가는 죽을 때 있고
안개를 타고 다니는 등사(騰蛇)도
끝내는 흙먼지로 변하누나”

이 시의 서두는 전혀 속(俗)되지 않다. 신령한 거북과 날아다니는 뱀은 둘 다 전설 속의 신물(神物)이지만, 사실 진실로 존재한다. 단지 속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수명은 속인이 보기에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조가 사용한 “언젠가는”과 “끝내는”이란 두 단어는 겉으로 보면 감탄이지만, 실제로는 조조의 원대하고 큰 뜻을 담고 있다. 즉 생명의 영원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이는 속인이 추구하는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祿)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런 글은 상당히 깊고 두터운 근기가 없이는 쓸 수 없는 것이다.

“늙은 준마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며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

늙은 준마는 비록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천리를 치달릴 웅지(雄志)를 품고 있음은 흔히 조조 자신이 만년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큰 포부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사실 이는 피상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의 진정한 내심의 추구는 속인의 소위 패업(霸業)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는 일반적으로 열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노년에도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조조의 원대한 포부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러나 조조는 여기서 이것을 단지 비유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늙어서도 꺼지지 않는 수도(修道)의 마음이다. 속인의 공명(功名)도 끊임없이 추구해야 얻을 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추구는 그보다 훨씬 더 확고해야 한다. 이는 다음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게
하늘에 달린 것만은 아니니
수양을 잘하면
오래 살 수 있노라”

이 글은 드러난 의미만 보자면 사람의 수명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심신(心身)을 다스리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한다면 분명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 글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조조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단련과 양생을 통한 수명연장이 아니라, 수련을 통한 생명의 불멸(不滅)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 지극한 행운이여
마음껏 뜻한 바를 노래해보세”

조조는 이 시를 지을 때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자신의 포부를 명확히 담았다.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낙관주의가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후의 기쁨이다. 이는 첫머리와 조응한다. 조조는 비록 역사적으로 자신이 맡은 배역 때문에 일시적으로 수련할 수 없었지만, 속인들이 인생의 정점이라고 여기는 시점에 생사를 깨달았으니 이는 비할 바 없는 행운이었다. 때문에 그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