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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고향”에서 가장 밝아

원형(源馨)

【정견망】

왜 사람들은 밝은 달을 보면 늘 자신의 고향과 과거를 떠올리는 걸까?

“이슬은 오늘 밤부터 하얘지고
달은 고향에서 밝구나.”

(露從今夜白,月是故鄉明)

(두보 《월야억사제(月夜憶舍弟)》)

“고개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다
머리 숙여 고향을 그리네.”

(舉頭望明月,低頭思故鄉)

(이백 《고요한 밤의 그리움(靜夜思)》)

“봄바람이 또 강남 언덕을 푸르게 하니,
밝은 달은 언제 내가 돌아가는 걸 비춰줄까?”

(春風又綠江南岸,明月何時照我還)

(왕안석 《과주에 배를 대다(泊船瓜洲)》)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뜨니
먼 곳에서도 이때를 같이 하네.”

(海上生明月,天涯共此時)

(장구령 《달을 보며 멀리 그리다(望月懷遠)》)

이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들의 그리움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이 공감하는지, 또 몇 사람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이 밝은 달 배후의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그리워하게 만드는지 깨달을 수 있을까?

백로(白露)가 지나면 곧 중추절(仲秋節 추석)이다. 전통문화에서 중추절은 설과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큰 명절이다. 창가에 서서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가을에 온 가족이 한데 모이는 이 명절은 과연 가을의 쓸쓸하고 처량함을 달래기 위함일까? 아니면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기 위함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가올 추운 겨울을 맞이하기 위함인가? 온 세상이 모두 하나의 달을 보는데, 시인들은 왜 그토록 자신 있게 “달은 고향에서 가장 밝다”고 말하는 걸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나는 또 익숙한 가사가 떠오른다.

“생명은 본래 하늘의 신선이라,
인생의 성패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이 평생은 전생의 인연이라,
법을 얻어 미혹에서 깨어나면 푸른 하늘에 오르네.”

이 노래의 제목은 《꿈에서 깨어(夢醒)》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와 선율, 그리고 노랫소리가 마치 고향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부름처럼 느껴진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일까? 예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관통하는 수많은 문학과 역사의 기록과 전승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명의 진정한 근원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상이 아니며, “타향을 고향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억이 잠겨져 고향을 떠나, 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속세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왔을까? 만약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 생명이 천국에서 왔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지금의 요만한 명리정(名利情)을 두고 다투고 싸울 이유가 있겠는가? 아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명백한 것이고, 행복의 시작일 것이다.

“이슬은 오늘 밤부터 하얘지고 달은 고향에서 밝구나.(露從今夜白,月是故鄉明)” 사계절, 날씨, 만사만물(萬事萬物)에 모두 자연스러운 운행이 있듯이, 생명의 최종 귀착점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우리의 내원이자 고향이며, 또한 우리가 나아갈 명확한 방향이기도 하다.

“고개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다 머리 숙여 고향을 그리네.(舉頭望明月,低頭思故鄉)”란 이백의 시는 삼척동자도 외울 수 있다. 나는 이백이 그때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궁금해진다. 인생과 역사는 모두 한 편의 연극이다. 매 하나의 생명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임무가 있다. 이 연극의 종점은 또 어디에 있을까?

중추가절을 맞아, 부드러운 달빛 아래, 마음을 가라앉히고,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께서 쓰신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한번 읽어보자. 아마도 모든 의문이 여기서 명확해질 것이며, 아마도 이때부터 비로소 이 쓰라린 방랑자의 정서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