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희(雲熙)
【정견망】
봄날 깊은 산에 객이 되어 다시 돌아오니,
속세의 의관이 새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네,
고개 넘으며 여전히 승방이 멀까 시름하다,
숲에 들어서니 사찰 문 열리는 것이 보이네
深山春日客重來
塵世衣冠動鳥猜
過嶺尚愁僧舍遠
入林方見寺門開
우리는 《요재지이(聊齋志異)》를 통해 포송령(蒲松齡)의 이름을 알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필자는 몇 년 전 그의 고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미 심하게 낡아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일 것이다.
이 시 《다시 청운사를 노닐다(再遊青雲寺)》에는 청운사를 두 번 방문했다는 것과 또 몇 세대를 건너뛰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봄날 깊은 산에 객이 되어 다시 돌아오니,
속세의 의관이 새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네,”
산 속 깊이 자리한 사찰을 시인이 봄에 다시 찾아온다. “속세의 의관”이라고 했으니 승복과 대비한 것이다. 고인(古人)은 출가한 후에는 더 이상 속인(俗人)이 아니라 반신(半神)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전생에 청운사에서 승려로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아마 “다시 돌아오니”에 담긴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속세의 의관이 새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네,”라고 한 것은 시인이 새들이 초면이 아님을 암시한다. 즉 새들이 시인이 전생에 누구였는지 알아본다는 뜻이다.
“고개를 넘으면서 여전히 승방이 멀까 시름하다,
숲에 들어서니 사찰 문이 열리는 것이 보이네”
“승방이 멀까 시름함”은 시인의 마음이 조급한 것을 나타낸다. “숲에 들어서니 사찰 문 열리는 것이 보이네”는 사찰에서 시인의 도착을 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벌써 문을 열어 시인을 환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의 눈에는 모든 것에 다 영(靈)이 있다. 새들은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고, 사찰 문은 시인을 위해 열리는데 시인은 또 자신의 전생 일을 기억한다.
시인은 전생을 믿었고 심지어 자신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다. 아마 시인은 전생에 수행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몇 세대 간격을 두고 전생을 다시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다. 만약 사람에게 전생(前生)이 있다면, 전전생(前前生)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 전전전생(前前前生)이 있지 않겠는가? 아마 무궁무진하게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인생일 것이다.
세속의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오늘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3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