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心遠)
【정견망 2026년 01월 02일】
세 봉우리 하나하나 깎은 듯 푸르고,
천 길 높이 솟아 침범할 수 없구나.
곧고 바르게 서로 도우니 의지할 곳 없어도,
천지를 지탱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노라.
三峰一一青如削
卓立千尋不可幹
正直相扶無倚傍
撐持天地與人看
남송의 사인(詞人) 신기질(辛棄疾)은 사(詞)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며, 시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고 사만큼 널리 회자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강랑산화운(江郞山和韻)》이란 시만큼은 기개가 남달라, 의지를 담고 격려하는 시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우뚝 솟은 높은 산을 마주하며 조정에서의 고립된 처지를 떠올렸고, 자신을 산에 비유하며 스스로를 격려한다.
“세 봉우리 하나하나 깎은 듯 푸르고,
천 길 높이 솟아 침범할 수 없구나.”
이 구절은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산색은 창창하고 깎아지른 듯 가파르며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천 길[千尋]에서 고대에는 8척을 1심(尋)이라 하여 매우 높고 깊음을 형용할 때 썼는데, 산봉우리에 오를 수 없고 침범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런 높은 산은 사람들이 우러러볼 뿐 진정으로 가까이 다가가기란 어렵다.
최근 몇 년간 많은 등산 애호가들이 험준한 산에 가서 영상을 촬영하면서, 이러한 산봉우리의 가파름과 고독함을 더욱 직관적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런 곳에서는 흔히 수도인이나 은사(隱士)들의 거처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의지가 확고해서 변치 않는 사람일 것이며, 진정으로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자는 결국 소수에 불과하다.
“곧고 바르게 서로 도우니 의지할 곳 없어도,
천지를 지탱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노라.”
이 구절에서 곧고 바름(正直)이란 두 글자는 산봉우리가 굽힘 없이 우뚝 솟아 서로 지탱하는 모습을 묘사함과 동시에, 광명정대하고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이치를 암시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 봉우리는 단순히 자연의 경치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본보기이며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고 격려하는 존재다.
신기질은 당시 조정에서 소수였던 주전파(主戰派)로 금나라에 대항해 나라를 되찾을 것을 주장했으나, 화친을 주로 하던 당시 조정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많은 이들은 화를 자초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다. 당시 시인은 부름을 받고 입궐했으나 앞날이 불투명하고 화복을 예측할 수 없었으니, 마치 홀로 서 있는 봉우리처럼 사방에 도움을 줄 이가 없었다.
현실 세계는 흔히 이와 같다. 선량하고 정직해 보이는 사람은 흔히 세력이 약해 보이고, 이익을 쫓고 해를 피하는 것이 다수의 선택이 된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이익을 보면 의리를 망각함)는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 때문이 아니더라도 몸을 사려 화를 피하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무원이 반드시 진상(真相)은 아니다. 정의를 수호하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보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직하고 사심 없는 사람은 흔히 신(神)의 보호를 받는다.
가파른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는 것 자체도 음미해 볼 만한 존재다. 단지 사람의 관념과 이론만으로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의 많은 현상은 본래 속인의 경험과 인식을 뛰어넘으며, 무신론은 더더욱 진상에서 벗어나 있다.
보다 높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많은 의혹이 풀릴 것이다. 선과 악, 정(正)과 사(邪)는 아무런 제약 없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사람은 의지할 곳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의지할 곳이 있다. 그러니 어찌 일시적인 어둠과 사악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2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