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초려를 나서 적벽에서 공을 세우다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당시 조조는 북방을 평정하여 중원이 대체로 통일되었고 관중의 제후들도 조조에게 순복했다. 형주를 정벌하고 강동을 차지하는 일이 일과로 떠오르자 무장들을 소집해 남정(南征)을 논의했다.
하후돈이 진언했다. “최근 듣기로 유비가 신야에서 매일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니 필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조기에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조는 이에 하후돈을 도독으로 삼고 이전, 이전, 하후란, 한호를 부장으로 삼아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박망성으로 진격해 신야를 엿보게 했다.
처음 초려를 나서 공을 세우다
유비는 제갈공명을 얻은 뒤 사부의 예로 대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한 것을 보고 신야 백성 3천 명을 모집하여 민병으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진법(陳法)을 가르쳤다.
마침 조조가 하후돈에게 십만 대군을 이끌고 신야로 쳐들어오게 했다. 유비가 제갈량과 상의하자 제갈량은 장수들을 소집하여 명을 내렸다.
제갈량은 관우에게 천 명의 군사를 주어 예산에 매복하게 하고 선두 부대를 보내준 뒤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신속히 공격하게 했다. 장비는 천 명의 군사로 산골짜기에 매복했다가 불이 나면 박망파(博望坡)로 돌진하게 했다. 관평과 유봉은 오백 명의 군사로 박망파 뒤에서 두 길로 나누어 기다리다 적군이 오면 즉시 불을 지르게 했다. 또 조운을 번성에서 불러와 선봉으로 삼되 패하기만 하고 이기지 말라고 하여 적을 박망파 깊숙이 유인하게 했다. 유비는 천 명의 군사로 후원을 맡았다.
장수들이 제갈량의 분부대로 행하니 조조 군사들은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달아났다. 제갈량이 처음 군사를 씀에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대승을 거두니 관우와 장비 등은 오체투지(五體投地)할 정도로 감복했다.
조조 군대가 형주를 습격
건안 13년(208년) 7월, 조조는 친히 약 15~16만 대군을 이끌고 업성에서 남하하여 형주를 공격했다. 유표의 군대는 총 10만 명도 되지 않았고 군사에 익숙지 않은 유표의 지휘 아래 실전 경험도 부족했다. 반면 조조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를 겪은 정예군으로 절대적 우세에 있었다. 조조는 신속한 진공 방침을 세워 엽현(葉縣), 완성(宛城)을 거쳐 번성(樊城)과 양양(襄陽)으로 곧장 향했다. 허를 찔러 형주군의 주력을 일거에 격파하거나 유표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전략이었다.
8월에 유표가 병사했다. 유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유기와 차남 유종이었다. 유표는 유기를 강하태수로 보내고 사후에 유종을 후사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유표가 위독할 때 장남 유기가 강하에서 문안을 왔으나 문밖에서 저지당해 유표를 만나지 못했다. 유표 사후 유기는 장례를 기회로 유종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미 조조의 대군이 국경에 들이닥친 상태였다.
일찍이 관도대전 때 유표의 부하인 한숭, 유선, 괴월 등은 유표에게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권했으나 유표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조조의 대군이 압박해오자 괴월, 부손과 형주에 거주하던 왕찬 등이 유종에게 투항을 권했다. 조조가 천자의 기치를 들고 왔으니 거역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며, 형주 한 주의 땅으로 강력한 조조 군을 막아내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이유였다. 유비를 이용해 조조를 막더라도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설령 유비가 조조를 물리친다 해도 그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므로, 유비에게 제어당하느니 조조에게 일찍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논리였다. 이에 유종은 조조를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조조가 신야에 도착했을 때 유종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때 유비는 번성에 주둔하며 조조 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유종이 항복하려는 사실도 몰랐다. 조조 대군이 완성에 이르러서야 유비는 유종의 항복 소식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조조 군을 막을 힘이 없어 급히 강릉으로 후퇴했다. 강릉은 원래 형주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군수 물자가 비축된 곳이다.
유비는 관우에게 수군 수백 척을 이끌고 한수를 따라 남하하게 하고, 자신은 제갈량,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주력을 이끌고 육로로 퇴각했다. 유종의 부하들과 형주 백성 중 유비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치는 자가 많아 당양에 이르렀을 때는 대열이 10여만 명에 달했고 짐차도 수천 대였다. 이 때문에 행군 속도가 매우 느려 하루에 십여 리밖에 가지 못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대중을 버리고 신속히 강릉을 보존하라고 권했다.
유비가 대답했다.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의하는데 내 어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
조조가 급히 형주를 공격한 원인 중 하나는 유비가 형주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비는 형주에서 수년간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얻었으므로, 만약 유비가 유표를 대신해 형주를 차지한다면 조조에게 큰 골칫거리가 될 터였다.
조조는 강릉에 군수 물자가 있는 것을 알기에 유비가 먼저 차지할까 염려하여 급히 양양으로 달려갔으나 유비는 이미 양양을 지나 강릉으로 향한 뒤였다. 유비가 약 십만 명의 백성을 보호하며 매우 느리게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는 정예 기병 오천 명을 보내 급히 추격하게 했다. 하루 낮밤에 삼백여 리를 달려 당양(當陽)현 장판(長阪)에서 유비를 따라잡았다.
유비는 조조 군을 당해낼 수 없어 군사와 백성을 데리고 달아났고, 장비가 뒤를 막아 겨우 조조 군을 따돌렸다. 그러나 유비는 이미 강릉으로 갈 수 없게 되어 한진으로 방향을 틀어 관우의 수군과 합류했고, 마중 나온 유기의 군사와 함께 하구(夏口 오늘날 한구漢口)에 잠시 주둔했다.
적벽대전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유표가 죽었다는 소식이 강동에 전해지자 노숙은 손권에게 조문을 구실로 형주에 가서 군정을 살피겠다고 청했다. 노숙이 형주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이미 군사를 몰아 남하하고 있었다. 노숙은 당양에서 유비를 만나 하구까지 동행했고, 유비는 제갈량을 노숙과 함께 오나라로 보내 연합하여 조조를 깨뜨릴 일을 상의하게 하는 한편 하구에서 번구로 거처를 옮겼다.
손권은 당시 시상(柴桑 지금의 강서 구강)에 있었는데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 손·유 연합으로 조조를 깨뜨릴 계책을 진술했다.
“유예주(유비)의 군사가 비록 장판에서 패하긴 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가 1만 명이고, 유기가 합류시킨 강하(江夏)의 전사 또한 1만 명을 밑돌지 않습니다. 조조의 무리는 멀리서 와서 피폐해졌으니 유예주를 추격할 때 기병이 하루 낮밤 삼백여 리를 달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강한 활에서 쏜 화살도 마지막에는 얇은 비단조차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법에서도 이를 기피하며 ‘반드시 상장군을 거꾸러뜨린다’고 했습니다. 또한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지 않고, 형주 백성 중 조조에게 붙은 자들은 병세에 겁을 먹은 것일 뿐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장군께서 진실로 맹장에게 명해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유예주와 힘을 합치신다면 조조 군을 반드시 깨뜨릴 수 있습니다. 조조 군이 패하면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형주와 오나라의 형세가 강해지고 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기틀은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은 제갈량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조조는 강릉에 도착하여 손권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근래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죄 있는 자를 벌하려 깃발을 남쪽으로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묶고 투항했소. 이제 수군 80만 명을 훈련시켜 장군과 함께 오나라에서 사냥하려(역주: 항복하지 않으면 전쟁을 치르겠다는 의미) 하오.”
조조의 이번 유표에 대한 남정(南征)은 형주뿐만 아니라 강동까지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조의 편지는 위협적인 의미가 짙었으며 황제의 명을 빌려 손권을 압박했다.
강력한 조조 군 앞에서 장소(張昭)로 대표되는 동오의 대다수 문무 명사들이 동요하며 손권에게 투항을 권했다. 오직 노숙만이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투항론을 주장하자 손권은 고개를 떨군 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손권이 몸을 일으켜 변소에 가자 노숙이 기회를 틈타 손권을 뒤쫓았다. 손권이 노숙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의 손을 잡으며 할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노숙은 방금 전 사람들의 투항론은 실로 실망스러우며 특히 손권에게 불리하다고 말했다. 왜그런가? 동오 사람 누구든 조조에게 투항할 수 있지만 오직 손권만은 안 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투항해도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을 유지하며 부귀를 누릴 수 있으나 손권이 투항하면 천하가 넓어도 안신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손권이 조기에 결단을 내려 투항책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당시 주유는 파양(鄱陽)에 나가 있었는데 노숙은 손권에게 주유를 불러 논의에 참여시키라고 권했다. 손권의 형 손책이 죽기 전 “안의 일은 장소(張昭)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으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주유 역시 조조에 저항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손권에게 조조의 80만 대군은 허장성세일 뿐 실제로는 15만 명 정도일 것이며, 투항한 유표의 군사 7~8만 명도 충성도가 낮아 조조를 위해 목숨 바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5만 명만 있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단언했다.
손권은 주유의 말이 자신의 속마음과 같다며 매우 기뻐했다. 주유, 노숙, 제갈량의 분석이 손권의 의지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손권은 항전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을 뽑아 책상 모서리를 베며 말했다. “장수와 관리 중 다시 조조를 맞이하자고 말하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
이로써 조조에 대항하는 손권·유비 연합 협정이 맺어졌다. 조조는 강릉에서 수로와 육로로 동진하고 손·유 연합군은 번구와 하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두 군대는 적벽에서 마주쳤다.
조조의 병사들은 대부분 북방인이라 남방의 기후와 물에 적응하지 못했고, 교전 전부터 군중에 전염병이 돌았다. 첫 교전에서 조조 군이 불리해지자 강 북쪽으로 물러났다. 주유의 부하 황개는 조조 군이 수전에 익숙지 않아 배들을 서로 연결해 둔 기회를 틈타 화공(火攻)을 제안했다. 주유는 화공과 거짓 투항 계책을 받아들였다.
황개는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글을 보내 날짜를 정했다. 약속된 날에 마침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투함(戰船)을 앞세우고 강 북쪽으로 나아갔다. 조조 군은 황개가 항복하러 오는 줄 알고 모두 나와 구경했다. 조조 군과 2리(약 800m)쯤 거리에서 배에 일제히 불을 붙이니 불길이 거세고 바람이 강해 배가 화살처럼 달려들어 조조의 전선을 태웠고 육상의 병영까지 번졌다. 조조 군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무수했다. 주유가 뒤이어 공격하니 조조 군은 대패했다.
조조는 패잔병을 이끌고 화용도(華容道)를 통해 후퇴했다. 큰 바람이 불고 날씨는 추운데 길은 진흙탕이라 보병들이 풀을 깔아 길을 만들며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적벽대전에서 졌음에도 조조는 형주를 보존하고 싶어 조인과 서황에게 강릉을, 악진에게 양양을 지키게 한 뒤 북쪽으로 돌아갔다.
손·유 연합군은 승세를 몰아 추격에 나섰다. 조인은 강릉에서 1년을 버텼으나 보급이 끊겨 결국 철수했다. 그러나 조조는 여전히 양양을 중심으로 형주 북부의 넓은 땅을 점유했다. 손권은 강릉, 하구, 육구를 차지해 형주 동반부를 가졌다. 유비는 형주 남부의 영릉, 계양, 무릉, 장사 4군을 차지하고 유구(공안)를 주둔지로 삼았다. 후에 손권이 강릉을 유비에게 내어주니 조·유·손 삼가가 형주를 분할하게 되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힘은 충실해졌고 실력이 크게 늘었다. 이후 10년 동안 세력 범위를 형주에서 서천(西川 익주)으로 확장하여 최종적으로 촉한 정권을 세웠고 삼국 정립의 국면을 예비했다.
적벽대전은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한 역사적 사건으로, 시사와 문장뿐만 아니라 민간의 희곡으로도 널리 전해져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특히 제갈량의 지혜가 빛나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조조의 대군 앞에서 동오의 민심이 흔들릴 때 제갈량은 설전(舌戰)으로 오나라 명사들을 굴복시켰다. 또한 주유가 십만 개의 화살이 필요하다고 하자 사흘 안에 이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하고 ‘초선차전(草船借箭)’이란 아름다운 이야기가를 남겼다. 화공에서 가장 중요한 동남풍을 빌려온 것도 제갈량이었다. 제갈량이 동풍을 빌리지 않았다면 손·유 연합군의 적벽 대승은 없었을 것이다.
《삼국연의》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제갈량이 천지를 뒤흔들 재주와 학문을 가졌음을 보여주며 후세의 추앙을 받게 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5/24/n792547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