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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를 관통하는 재학으로 만세에 모범이 된 제갈량 (4)

——유비와 일체가 되어 천고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내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촉의 군주는 오나라를 치러 삼협으로 행차했다가
돌아가신 해에도 영안궁에 계셨네.
화려한 천자의 깃발을 텅 빈 산 속에서 상상하니
대궐은 간 곳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의 절만 남았네.
옛 사당의 삼나무와 소나무에는 황새가 둥지 틀고,
매해 삼복과 납일이면 마을 노인들 부산하네.
무후의 사당도 늘 이웃에 있어
한 몸 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제사를 받네.

蜀主窺吳幸三峽,崩年亦在永安宮。
翠華想像空山裏,玉殿虛無野寺中。
古廟杉松巢水鶴,歲時伏臘走村翁。
武侯祠堂常鄰近,一體君臣祭祀同。
(두보의 시 《영회고적》 제1수)

삼국 전체 역사는 ‘의(義)’라는 한 글자를 연기해 보여주었다. 도원결의는 영웅들이 맺은 형제의 의리였으니, 일단 결의를 맺으면 마땅히 화복(禍福 재앙과 복)을 같이하고 생사를 함께해야 한다. 관운장이 화용도에서 조조를 의리로 보내준 것은 친구 사이의 의리를 보여준 것이다.

조조는 일찍이 관우에게 큰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했을 때, 제갈량은 이미 그가 반드시 화용도를 지날 것을 계산하고 병마를 매복시켜 차단하게 했다. 제갈량은 천하가 셋으로 나뉘려면 반드시 조조에게 살길을 열어주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관운장은 의리를 가장 중시하기에 적임자였으나, 제갈량은 일부러 관우를 외면했다. 관우가 참다못해 자원하여 이 임무를 맡겠다고 나섰다. 제갈량은 조조가 관우를 두텁게 대접했기에 관우가 조조를 놓아줄 수도 있다며 그가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관우는 이미 은혜를 갚았으니 이번에 만나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다. 제갈량은 그와 군령장을 썼다. 관우는 조조를 놓아주면 군법에 따라 처벌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조조를 통과시켜 주었으니, 이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 행동이었다.

삼국 이야기에서 특히 감동적인 것은 유비와 제갈량 사이의 간담상조(肝膽相照)로, 군신 간의 의리를 연기해 낸 대목이다. 앞서 인용한 두보의 시 ‘영회고적(詠懷古蹟)’ 칠언율시는 유비와 제갈량이 군신(君臣)이 한 몸이 되어 같은 제사를 받는 모습을 짚어주었다.

사천성 성도(成都) 남문대교 밖 서쪽에 위치한 무후사(武侯祠)는 서기 223년에 세워졌으며 제갈량을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이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이는 단지 제갈량 한 사람만이 아니다. 사당의 큰 부분은 유비가 붕어한 후 안장된 혜릉(惠陵)이다. 이는 중국 수천 년 역사상 유일하게 군왕과 승상을 합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무후사가 애초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유비가 안장된 후 그를 위해 지은 것은 소열묘(昭烈廟)였고, 무후사는 소열묘 옆에 있었다. 그러다 명조(明朝) 초기에 전쟁으로 파손된 무후사를 중건하면서 소열묘에 합쳐 지금의 무후사가 되었다.

한 나라의 군주와 승상을 한곳에 모셔 제사 지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삼고초려, 적벽대전, 백제성 탁고(托孤) 등의 사건을 거치며 군신이 서로 마음을 얻은 만고의 아름다운 일화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삼고초려는 어진 인재를 갈구하던 밝은 주군이 융중의 초가집으로 농사지으며 은거하던 젊은 선비를 몇 번이고 멀리 찾아간 일이다. 그 정성에 감복하여 관중과 악의에 비기던 이 젊은 선비는 자신의 모든 정력과 심혈을 쏟아부었다.

유비의 제업(帝業)을 이루기 위해 제갈량은 직접 동오로 가서 선비들과 설전을 벌이고 손권을 설득했으며, 재주와 학문을 발휘해 초선차전과 동남풍 빌리기를 행하여 조조의 수십만 대군을 일거에 격파했다. 이로써 삼국정립의 국면을 처음 형성했으니 실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한 것이었다.

백제성 탁고는 병이 위독해진 군주 유비가 임종 직전에 가장 신뢰하는 고굉(股肱)의 신하를 불러 고생스럽게 세운 촉한 왕조를 공로가 큰 승상에게 기탁한 일이다. 신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울고 군주도 눈물을 흘리니, 이런 장면은 아마 유비와 제갈량이라는 이 군신 사이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무후사 안에는 유비, 제갈량과 그들의 후손 두 명의 소상(塑像)은 있지만, 유비의 후계자이자 위나라에 투항한 후주 유선(劉禪)의 소상은 없다. 여기서 중국 문화가 충의(忠義)를 무엇보다 크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 전심전력을 다해 후주 유선을 보필했다. 안으로는 정무(政務)를 정돈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닦았으며, 남정북벌(南征北伐)로 내란을 평정하고 공격을 수비로 삼아 기산으로 여러 차례 나갔으나 결국 진군 도중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그의 후손들도 제갈량의 명성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수십 년 후 종회와 등애가 군사를 이끌고 촉나라로 쳐들어왔을 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면죽에서 전사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비와 제갈량의 군신간의 의리는 역대 왕조의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백성의 인정을 받았다. 그들 사이의 의리는 이미 세속에서 왕을 칭하고 제를 칭하는 그런 최고 영예를 초월했다. 이런 신뢰 속에서 제위(帝位)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의 탁 트인 마음과 간담상조야말로 군신의 도에서 최고 모범이 되어 두보에 의해 ‘일체군신(一體君臣)’이라 칭송받게 된 것이다.

제갈량이 융중에 은거할 때 일찍이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봉황은 천 길 높이 비상하나,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선비는 한 지방에 엎드려 있으나, 주인이 아니면 의탁하지 않네.
논밭에서 몸소 농사짓는 것 즐거우니, 나는 내 초가집을 사랑하노라.
잠시 거문고와 책에 의지해 기개를 기르며, 하늘의 때를 기다리노라.

鳳翱翔於千仞兮,非梧不棲;
士伏處於一方兮,非主不依。
樂躬耕於隴畝兮,吾愛吾廬;
聊寄傲於琴書兮,以待天時。

제갈량은 뜻이 고상해서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재주가 있었음에도, ‘한 지방에 엎드려’ 자신이 보필할 만한 명주(明主)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결국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오자 제갈량은 유비의 성의를 보고 이분이 바로 자신이 기다려온 명주임을 알았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고 스승의 예로 대접했다. 군주가 사람을 어떻게 쓰는가는 중국 문화가 특별히 주목하는 큰 문제다.

증자는 “스승으로 모시는 자는 왕업을 이루고, 친구로 대하는 자는 패업을 이루며,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자는 망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전 중국 역사의 경험을 총괄한 것이다. 고대의 커다란 성취를 이룬 많은 군주는 자신을 보필하는 대신을 스승의 예로 대했다.

사마휘는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말을 듣고 “원직(서서)이 가고 싶으면 그냥 갈 것이지, 어찌하여 또 그 사람을 끌어내어 심혈을 쏟게 하는가?”라고 했다. 또 “와룡이 주인을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했으니 안타깝구나!”라고도 했다.

사마휘의 말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당시 천하가 삼국으로 나뉘었으니 이것이 천시(天時)다. 그러나 이 삼분된 천하에 제갈량이 쏟은 심혈이 들어 있다. 만약 오나라와 연합해 조조에 대항하여 적벽대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동오는 조조에게 투항했을 것이고 유비도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을 것이니 천하삼분의 국면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이 노숙을 따라 강동으로 달려가 선비들과 설전을 벌이고 손권을 설득하며 동남풍을 빌려 조조의 진영을 화공으로 친 것들은 적벽대전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이는 모두 공명의 노력과 심혈이었다.

유비는 일대 성세(盛世)를 개창할 명군의 덕과 재능을 완전히 갖추었으나, 세 나라로 천하가 삼분한다는 천시에 갇혀 뜻을 펼치기 어려웠고 오직 촉 땅에 입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서 비록 온 힘을 다했으나 결국 삼분의 국면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그들 군신은 모두 사람은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한 셈이다. 사마휘가 “와룡이 주인은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했다”라고 한 말은 절반만 맞춘 것이다. 사실 명군인 유비 또한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사람이 그린 유비 채색 초상. (공유 영역)

백제성 탁고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서천(西天)으로 나아갔고, 서천을 취한 뒤 제갈량은 촉으로 들어가 국정을 도왔으며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지키게 했다.

형주는 남군, 장사, 영릉, 계양, 무릉의 다섯 군이 있었는데 그중 남군은 유비가 동오에서 빌린 것이었다. 유비가 서천을 얻은 뒤 관우를 보내 조조의 양번(襄樊) 지역을 공격하게 하자, 손권은 여몽을 보내 허점을 틈타 기습했고 이로 인해 형주의 남군, 무릉, 영릉 세 군이 함락되었다.

관우는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굴복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관우가 동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는 복수심이 간절하여 제갈량의 권고도 듣지 않은 채 전국의 병마를 일으켜 오나라를 토벌하러 나섰으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 제갈량은 위나라 군사가 빈틈을 타서 성도를 기습할 것을 대비해 유비의 출정에 동행하지 않았다.

오나라 대장 육손(陸遜)은 촉군이 무더위를 피하려고 수풀이 우거진 곳에 진영을 친 것을 보고, 촉군의 칠백 리 연결된 병영을 불태워버렸다. 유비는 대패하여 백제성으로 후퇴했고 성안 영안궁에서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정사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장무 3년 봄, 선주가 영안에서 병이 위독해지자 성도에 있는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라고 한다. 즉 유비는 자신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밤낮으로 사람을 달려 성도로 보내 제갈량을 청해 뒷일을 부탁한 것이다.

제갈량은 태자 유선에게 성도를 지키게 하고 유비의 다른 두 아들 유영(劉永), 유리(劉理)를 데리고 백제성으로 와서 영안궁으로 들어가 유비를 알현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곁에 앉히고 손으로 그의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승상의 보필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천운으로 제업(帝業)을 이루었소. 뜻밖에 내 식견이 얕아 승상의 간언을 채택하지 못하고 스스로 패배를 불러왔구려. 후회와 한이 병이 되어 죽음이 눈앞에 닥쳤소. 후계자 유선이 나약하니 대사를 부탁하지 않을 수 없소.” 유비는 말을 마친 뒤 눈물을 쏟았다.

제갈량도 울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유비는 좌우의 장수와 관리들을 살펴보다가 마속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자리를 피하게 했다.

마속이 나간 뒤 유비가 제갈량에게 물었다.

“승상이 보기에 마속이라는 사람의 재능이 어떻소?”

제갈량이 대답했다.

“이 사람 또한 당세의 영재(英才)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이 사람은 말이 실제보다 과하니 중용할 수 없소. 승상은 그를 신중히 살펴야 하오.”

말을 마친 유비는 모든 장수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붓으로 유언장을 써서 제갈량에게 건네며 탄식하듯 말했다.

“내 본래 그대들과 함께 조비를 멸하려 했으나 불행히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소. 번거롭겠지만 승상이 내 유언장을 태자 유선에게 전달해 주고, 앞으로 모든 일은 승상의 지도를 바라오.”

제갈량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부디 편히 쉬십시오. 신 등이 반드시 전력을 다해 태자를 보좌하겠습니다.”

유비는 좌우 사람들에게 제갈량을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갈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니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겠소.”

제갈량이 “무슨 분부이십니까”라고 묻자 유비가 말했다.

“그대의 재간은 조비보다 열 배나 나으니 반드시 대업(大業)을 이룰 것이오. 만약 유선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약 아니 된다면 그대가 유선을 대신해 스스로 황제가 되시오.”

제갈량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울며 땅에 절하며 말했다.

“신하로서 저는 반드시 온 마음과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 바쳐 유선을 보좌하며, 죽을 때까지몸을 굽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鞠躬盡瘁 死而後已).”

유비는 다시 제갈량을 곁에 앉히고 유영과 유리를 앞으로 불러 분부했다.

“너희는 명심하거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삼 형제는 아버지를 대하듯 승상을 대하고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제갈량 앞에서 절하게 한 뒤 장관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국가 대사를 승상에게 위탁했고 태자 유선에게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승상을 대하라고 했소. 그대들 또한 똑같이 게을리 하지 말고 나의 부탁을 저버리지 마시오.”

또 조운에게 분부했다.

“내가 그대와 환난 중에 만나 지금까지 함께해왔는데 이곳에서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소. 그대는 나와 오랜 친구라는 점을 생각해서 밤낮으로 내 아들들을 보살펴주고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오.”

조운이 울면서 절하며 말했다.

“반드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유비는 다시 장수와 관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가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니 각자 노력하고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하기를 바라오.” 이 말을 마친 뒤 유비는 향년 63세로 붕어했다.

군신 간의 간담상조, 만고의 모범이 되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매우 기뻐하며 “나에게 공명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다”라고 표현했다.

진수 또한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기탁하면서도 마음속에 두 마음이 없었으니, 진실로 군신 간의 지극한 공으로 고금의 성스러운 귀감이다”라고 평했다.

《자치통감》 주석가 호삼성도 “예로부터 후사를 부탁한 군주 중에 소열제(유비)만큼 명백하고 통달한 이가 없었다”라고 했다.

조익(趙翼) 역시 유비의 탁고를 극찬하며 “천년 뒤에도 여전히 그 간담에서 나온 본래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어찌 진실한 성정이 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신뢰는 항상 큰일을 그에게 맡기는 데서 나타났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익주로 진출할 때 제갈량을 데려가지 않고 법정과 방통을 주요 모사로 데려갔다. 서천(익주)을 빼앗는 동안 그 후방은 바로 형주였다. 유비의 근거지였던 형주는 당시 근간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기에, 익주로 나아가려면 가장 유능하고 믿음직한 문무 관원을 남겨 지키게 해야만 형주의 만전을 기할 수 있었다.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취하는 데는 많은 변수가 있었고, 일단 형주에 문제가 생기면 유비는 다시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가 될 것이었다. 형주를 굳게 지키기 위해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을 남겨두었으니, 이런 심복들이 있어야만 유비가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통이 낙현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 뒤에야 형주 정세가 안정되고 성도 함락이 급해지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을 불러들여 일거에 성도를 얻고 익주 전체를 점령함으로써 삼국정립의 기초를 다졌다.

유비가 성도를 공략한 후 제갈량을 고굉(股肱)으로 삼고 법정을 모주(謀主)로, 관우, 장비, 마초를 조아(爪牙)로 삼았는데, “선주가 출정하면 제갈량은 항상 성도를 지키며 식량과 군사를 넉넉히 공급했다”라고 한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얼마나 신뢰하고 중용했는지를 보여주며, 대후방 전체를 제갈량에게 맡겼음을 뜻한다.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유비를 열두 차례나 언급했는데, 매번 이 명군의 지우(知遇)에 대한 깊은 그리움의 어조로 서술했다. 삼고초려 이래로 제갈량은 유비를 보좌하여 발붙일 곳 없던 처지에서 일방의 제업을 세우기까지 했고, 유비를 황제의 자리에 올렸다. 제갈량 자신도 일개 포의(布衣)에서 권력을 쥔 승상이 되었으니, 두 사람이 간담상조하며 고락을 함께한 것은 바로 군신의 지극한 공심이며 고금의 성스러운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유비와 제갈량의 이러한 군신 관계는 그들에게 천하제일의 군신(君臣)이라는 미명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한 것이 마치 물과 물고기 같았으니, 이는 군신 간의 마땅한 도리를 보여주며 만고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5/27/n793801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