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견망】
4. 보국암(報國庵): 한양(漢陽) 취미가(翠微街) 관할 구역 동남쪽 끝에 있는 보국항(報國巷)은 악비의 정충보국 장거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악비 부자가 살해되었다는 비보가 한양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비통해하며 취미봉 동남쪽 약 1리 지점의 언덕 위에 성금을 모아 보국암을 세웠다. 겉으로는 부처를 모시는 암자라 했으나 실제로는 악비를 제사 지내기 위함이었다. 이 암자는 붉은 사암으로 벽을 쌓았고 정당 하나와 편당 둘로 구성된 총 3칸 집으로 약 200제곱미터 규모였다. 암자가 완공되었을 때 혼군인 고종이 아직 재위 중이었고 간신 진회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암자 안에 악비의 상을 세우지 못하고 편액도 걸지 못한 채 오직 보국암이라는 이름만 써 붙였다.
융흥(隆興) 원년(서기 1163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악비의 억울함을 씻어주었다. 이때 한양의 보국암은 악비당(岳飛堂)으로 확장되었고, 당 안에는 악비의 상이 세워졌으며 악비가 생전에 쓴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를 새긴 편액을 정전에 걸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 정충보국 네 글자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악가군(岳家軍)이 한수(漢水) 북안으로 도망치는 금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한양 백성들이 앞다투어 계책을 내고 뗏목과 나무 뗏목을 만드는 것을 도와 한수를 돌파하게 함으로써 금군을 추격해 섬멸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에 악비가 감사의 뜻으로 ‘정충보국’ 네 글자를 써서 선물했다고 한다.
원대(元代) 이후 1949년 이후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악비당을 보국암이라 불렀다. 1950년대 초까지도 암자에는 노승 세 명이 머물렀다. 옛 보국암은 결국 1958년 중공의 대약진 운동 시기에 파괴되었다.
민국 시절부터 문화대혁명 전까지 한양 민중들은 악비를 기념하기 위해 이 암자 동북쪽의 민가 골목길을 보국암이라 불렀다. 1967년 이 골목은 유물8촌(唯物八村)으로 바뀌었다가, 1972년 다시 악비를 기념하여 보국항이라는 이름을 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병장각(兵藏閣): 사료에 따르면 소흥 4년(서기 1134년) 봄, 금군이 대거 남하하여 중원을 침범했다. 악비는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금군과 그 괴뢰 정권이 점령한 양양, 신양 등 6군을 수복할 것을 건의했다. 그해 5월 악비는 남송 조정으로부터 한양군 제치사(制置使)로 임명되어 형호(荊湖) 지역으로 진격해 영주(郢州 지금의 종상)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이어 군사를 둘로 나누어 수주(隨州)를 공격하고 양양을 취했으며 당주(唐州)와 등주(鄧州) 및 신양군을 빼앗았다. 중원을 수복한 악가군은 악주(지금의 무창)로 회군하여 한양에 주둔했다.
악가군은 부모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군기가 엄격해 백성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심을 얻었고 전투력이 매우 강했기에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그들이 깊은 밤 한양에 도착했을 때 성안의 백성들이 놀랄까 봐 사령부와 병영을 한양성 서남쪽 약 2리 밖의 황야에 설치했다. 이후 악가군은 이곳에서 약 10개월 동안 머물며 정비했다.
오늘날 한양 난강로 서쪽 구간과 귀원사로(歸元寺路 취미횡로翠微橫路) 남단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당시 악비의 주둔지로 후세 사람들이 병장각이라 불렀다. 옛날 이곳에는 숲과 대나무, 무덤과 언덕이 있고 사방에 인적이 없었다. 각(閣) 안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한겨울에 연못물이 꽁꽁 얼어붙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병장각을 발음이 비슷한 빙당각(冰塘角)이라 부르기도 했다.
6. 돈갑촌(頓甲村)과 마장호(馬場湖): 병장각 서쪽에는 당시 악가군이 갑옷과 병기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보관하다와 놓아두다를 한양 방언으로 ‘돈(頓)’이라 했기에, 그 창고 근처의 마을을 후세 사람들이 돈갑이라 불렀다. 오늘날 오리돈가(五裏墩街)와 강제가(江堤街)가 맞닿은 곳에 있는 등갑촌(鄧甲村, 돈頓과 등鄧은 한양 방언으로 발음이 같음)이 바로 이곳이다.
돈(등)갑촌 서남쪽에는 호수가 있는데 옛 이름은 한양동호(漢陽東湖)이다. 이 호수는 옛날 여러 물줄기와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숫가에는 풀이 무성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악비와 부하 장수들이 이 호숫가에서 병마를 훈련하고 말을 길렀기에 마장호 혹은 마창호(馬滄湖)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오리돈가와 강제가 경계에는 북쪽으로 한양대도, 남쪽으로 하마호(下馬湖)에 이르는 약 2킬로미터 길이의 도로가 있는데 또는 마창호로(馬滄湖路)라 한다.
1990년대 이후 마장호 동남쪽 수역의 일부가 매립되어 집이 들어섰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길이의 마앵로(馬鸚路)가 건설되었다.
7. 취미고정(翠微古井)과 취미고지(翠微古池): 한양 취미봉 아래 귀원사 일대에는 악비와 관련된 지명들이 있었다.
이 사찰 안의 취미고정과 취미고지는 당시 악가군 군마들의 식수처였다고 전해지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귀원사 경내를 거니는 유람객들은 이 고정과 고지를 직접 볼 수 있다.
8. 득득처(得得處): 오늘날 한양 귀원사 동남쪽 약 400미터 지점의 옛 이름은 득득처이다. 현재 북경도서관과 호북성박물관에 각각 소장된 《청 선통 연간 무한성진합도(武漢城鎮合圖)》에는 이 득득처가 표시되어 있다. “득득”이란 준마가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의미하며, “득득처”는 악비가 당시 말을 타고 밤에 돌아오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소흥 5년(서기 1135년) 5월, 악비는 명을 받들어 다시 북벌에 나서 양양에 주둔했다. 한양을 떠나기 전 그는 이곳의 산수를 무척 아쉬워하여 보름달 빛을 받으며 고삐를 늦추고 취미봉에서 우공기(禹功磯)까지 가며 은빛 같은 대강(大江)을 바라보았다. 또 대별산(大別山 지금의 귀산龜山)에서 월호(月湖), 매자산(梅子山)을 거쳐 봉서산(鳳棲山 지금의 봉황산)에 이르기까지 한양의 아름다운 강산을 마주하며, “처음부터 다시 옛 산하를 되찾겠다”는 자신의 장한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생각하니 이 젊은 원수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파도가 일었다. 군막으로 돌아와 촛불 아래 붓을 들고 읊조리며 글을 썼다.
한 해 동안 먼지 묻은 갑옷 입고,
다가닥 꽃 찾아 취미봉에 올랐네.
좋은 산수 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는데,
말발굽 소리 재촉하며 달빛 아래 돌아가네.
經年塵土滿征衣
得得尋芳上翠微。
好山好水看不足
馬蹄催趁月明歸。
——악비 《등치주취미정시(登池州翠微亭詩)》
득득처와 그 주변은 청대부터 1949년 초까지 귀원사 승려들에 의해 밭으로 일구어져 곡식과 채소가 재배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평전남촌(平田南村)이 세워졌고, 80년대 후반에는 평전소구(平田小區 동부)가 건설되었다.
우공기(禹功磯)는 대우(大禹)가 치수에 성공한 것을 기념하는 장소로 전해지며, 그 터에는 현재 정천각(睛川閣)이 세워져 있다.
9. 최자만(催子灣 아들을 재촉하는 만)의 전설: 오늘날 오리돈가 오기리(五麒裏) 커뮤니티 북쪽에는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남송 이래 최자만이라 불렸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양 민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악비가 한양에 주둔할 때 하루는 이곳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한 노파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 연유를 물었다. 노파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 홀로 키운 아들이 장가들 돈이 없어 혼자 하남으로 장사를 떠났는데 그 뒤로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악비는 노파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들이 돌아왔을 때 돈을 벌지 못했다면 군영으로 저를 찾아오게 하십시오”라고 위로했다.
며칠 후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이 악비를 찾아왔다. 악비가 은자 한 보따리를 주자 그는 크게 감사하며 말하기를, 하남에 있을 때 금군에게 잡혀 며칠간 묶여 있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했다. 악비는 그 말을 듣고 “그 길을 잘 알 터이니 지금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나를 위해 다녀오겠느냐?”라고 물었고 아들은 즉시 응낙했다. 그는 은자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맞이했으나 다시 하남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날이 갈수록 노파는 초조해져 아들에게 길을 떠나라고 거듭 재촉했다. 어머니의 재촉에 못 이겨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와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 후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으나 죽기 전 사람을 시켜 하남 금군의 정보를 보내왔고, 악가군은 이 정보 덕분에 몇 차례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 덕분에 이름 없던 작은 마을은 최자만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게 되었다.
10. 악비가(岳飛街): 청말 민국 초기에 형성된 거리이다. 서남쪽으로 한구 황흥로(漢口黃興路)에서 시작해 역전로를 거쳐 동북쪽으로 중산대도(中山大道)와 이어진다. 옛날 한구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을 때 프랑스 당국에 의해 샤피 장군가 혹은 샤피가(샤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전쟁을 치른 프랑스의 명장)로 명명되었다. 당시 이 거리는 프랑스 병영과 공부국(工部局), 순포방(巡捕房) 등이 주둔해 경계가 삼엄했다. 항전에서 승리한 후 프랑스 조계지를 회수하면서 외래 식민 침략의 흔적이 담긴 이름을 지우고 남송의 항금 명장 악비의 이름을 따서 새로 명명한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105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