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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음이 진기(真機)

섬섬(纖纖)

【정견망】

이 몸을 그리워하지도 말고, 이 몸을 싫어하지도 말라.
이 몸이 어찌 그리워할 가치가 있겠는가, 만겁 번뇌의 뿌리인 것을.
이 몸이 어찌 싫어할 가치가 있겠는가, 한 줌 허공의 먼지인 것을.
그리워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어야, 비로소 소요하는 사람이라네.

亦莫戀此身,亦莫厭此身。
此身何足戀,萬劫煩惱根。
此身何足厭,一聚虛空塵。
無戀亦無厭,始是逍遙人。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는 자가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했다. 조상이 살던 곳은 태원(太原)이며 증조부 때 하규(下邽)로 옮겨 거주했다. 하남 신정(新鄭)에서 태어났으며 당대(唐代)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원진(元稹)과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제창하여 세간에서 ‘원백(元白)’이라 불렸고, 유우석(劉禹錫)과 병칭되어 ‘유백(劉白)’이라고도 불렸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여 ‘시왕(詩王)’이라 일컬었다. 저서로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장한가》, 《비파행》, 《매탄옹》 등이 있는데 모두 세상에 전해지는 명작이다.

이 작품 《소요영(逍遙詠)–소요하며 읊다》은 비록 길이는 짧지만 시인이 선(禪)을 닦고 인생 경계를 체득한 깊은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시 전체가 겉으로는 담담하고 반복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층층이 깊어지니, 이는 내심의 진실한 이치를 깨달은 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이 몸을 그리워하지도 말고, 이 몸을 싫어하지도 말라.”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육신에 집착하여 그것을 아끼고 보호하며 잃을까 두려워한다. 반면 어떤 수련인은 일정 경계에 도달한 후, 또 다른 극단으로 가서 육신에 대해 염오(厭惡 몹시 싫어함)하는 마음을 내기 쉽다. 그러나 시인의 이해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리워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음”이었다. 이러한 양극단을 초탈한 경계는 자연히 한 층 더 높다.

사람몸(人身)은 신(神)이 만드신 것으로 반드시 그 존재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결코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련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담담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른바 ‘담담히 본다’는 것은 사실 생사와 득실(得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 몸이 어찌 그리워할 가치가 있겠는가, 만겁 번뇌의 뿌리인 것을.
이 몸이 어찌 싫어할 가치가 있겠는가, 한 줌 허공의 먼지인 것을.”

시인이 보기에 인간세상의 허다한 번뇌는 모두 육신으로 인해 일어난다.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며, 기병(氣病 스트레스 질환), 질병, 노쇠, 정욕, 명리(名利)는 하나같이 이 신체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더 높은 층차에서 본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허환(虛幻)하고 짧은 가상(假相)일 뿐이니, 사람 몸 역시 자연히 ‘한 줌 허공의 먼지’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은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표상 속에 침몰하지 않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많은 고인(高人)들은 인간 세상이 꿈과 같고 만사가 환상과 같다고 여겼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이 아니라, 사람이 고난과 미혹 속에서도 선량함과 본성을 지킬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워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어야, 비로소 소요하는 사람이라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본래 육신을 떠날 수 없으므로, 한결같이 싫어하여 버리는 것 역시 의미가 없다. 시인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사실 ‘내려놓음(放下)’이라는 두 글자다. 즉 빠져들지도 않고 맞서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생활하면서도 인간 세상의 모든 득실과 영욕(榮辱 영광과 치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소요(逍遙)’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며 소극적으로 세상을 피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내심의 당당함과 자재(自在)함이다. 사람이 세간에서 살아가먄서 여전히 사람의 행위 방식에 부합하면서도, 명리나 정욕에 끌려가지 않고 고락(苦樂)과 득실에 속박되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한 초탈이라 할 수 있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에서 말씀하셨다.

“그럼 왜 창세주는 뭇 신에게 이렇게 저열한 환경에서 인류를 만들라고 하였는가? 왜냐하면 여기가 우주의 가장 낮은 층, 가장 고생스러운 곳이기 때문인데, 고생스러워야 비로소 수련할 수 있고 고생스러워야 비로소 죄업을 없앨 수 있어서다. 고생 속에서 사람이 여전히 선량함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은혜에 감사할 줄 알며 좋은 사람이 된다면, 이것이 바로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다. 아울러 구도는 아래에서 위로 하는 과정이어서, 반드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로 보건대 인간 세상의 고통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제고되고 구도 받을 기회다. 사람이 마난 중에서도 여전히 선량함을 유지하고, 미혹된 길에서도 여전히 정념을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귀중한 것이다.

이렇게 다시 백거이의 《소요영》을 돌아보면 시인의 비범함을 더욱 체감할 수 있다. 그 시대에 그는 이미 사람 몸이 비록 고통스러워도 싫어해서는 안 되며, 인간 세상이 비록 환상이지만 수행하는 곳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본래 법을 얻기 위해 왔다. 사람 몸이 있어야만 수련 원만할 수 있으며, 사람 몸에 집착하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으로 도를 얻을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