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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16): “자로가 자신의 봉록으로 백성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배후 이야기

왕사미

【정견망】

한비(韓非)는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사상가다. 그의 정치 논문인 《한비자·외저설 우상》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계손(季孫)이 노나라 재상이 되어 자로(子路)를 구읍(邱邑)의 장관에 임용했다[1]. 노나라에서 5월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긴 도랑을 파게 했는데, 공사 기간에 “자로가 자신의 봉록인 곡식으로 죽과 밥을 만들었다(子路以其私秩粟爲漿飯).” 즉, 자로가 자신의 봉급으로 받은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도랑을 파는 사람들을 오부(五父)라는 길로 초대해 먹게 한 것이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자공(子貢)을 보내 그 밥을 쏟아버리고 밥을 담은 그릇을 부수게 하며 “이 백성들은 노나라 군주에 속한 이들인데 네가 어찌하여 그들에게 밥을 먹이느냐?”라고 질책했다.

자로가 크게 노해 주먹을 쥐고 팔을 드러낸 채 들어와 따져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을 미워하십니까? 스승님께 배운 것이 바로 인의입니다. 인의란 천하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함께 소유하고 이익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제 봉록으로 백성들을 먹이려는데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자로가 이해한 인의는 “천하와 더불어 그 가진 바를 함께하고 그 이익을 같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공자가 가르친 인(仁)의 요체가 아닌가?

하지만 공자는 자로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

공자는 “자로야, 참으로 거칠구나! 나는 네가 깨달은 줄 알았더니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네가 이토록 예(禮)를 모르는구나. 네가 백성을 봉양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해서다. 예법에 규정하기를, 천자는 천하를 사랑하고, 제후는 나라 안을 사랑하며, 대부(大夫)는 관직에 맡은 바 관할을 사랑하고, 선비는 자기 가족을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해야 할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참월(僭越)이라 한다. 지금 노나라 군주가 통치하는 백성에 대해 네가 마음대로 사랑을 베푸는 것은 네 위치를 넘어서는 것이니, 이 또한 담대하고 망령된 짓이 아니겠느냐!”

공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손의 사자가 도착해 “내가 백성을 동원해 부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제자를 시켜 일꾼들에게 밥을 먹이게 하니 이는 내 백성을 빼앗으려는 것입니까?”라고 꾸짖었다.

《논어·안연》에는 인(仁)에 대한 공자의 해석이 실려 있다.

【번지(樊遲)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중용》에서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의(義)란 마땅함(宜)이다. 어진 이를 존중하는 것이 크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의 내함은 선(善)에 기반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의란 인이 드러난 것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준칙이자 척도이다. 합당하고 정리(情理)에 부합해야 하며 인과 예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인의”와 “예의(禮義)”는 유가 윤리 사상의 핵심 범주다. “인의”가 내면의 심태를 중정(中正)하고 중화(中和)하게 유지하는 데 치중한다면, “예의”는 외적인 행위가 규범과 윤리에 부합하는지에 치중한다.

자로는 인의란 천하와 이익을 함께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자신의 봉급으로 도랑을 파는 백성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인의라는 기점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일을 함에 있어 경계나 분수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여 중정(中正)에서 벗어나 극단적으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선인가?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논어·이인》)”라고 했다.

여기에는 인의의 함의와 의리(義利)의 구분이 체현되어 있다. 즉 도의(道義)를 기점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이익(利益)을 기점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가치 지향 및 분수와 척도의 문제다.

나중에 계손이 사람을 보내 문책한 것은 예를 넘어서는 규범과 경계를 넘는 행위가 사람의 부정적인 반응을 촉발할 수 있음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 사람에게는 본래 선악(善惡) 양면이 있다. 예의에 부합하는 중화(中和)의 선은 사람의 선한 면을 싹트게 할 수 있지만, 예의 질서를 참월하는 것은 사람의 악한 면의 요소를 건드려 쟁탈과 권모 등 사악한 생각을 낳게 한다. 이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분열되고 이 때문에 악을 지어 업력(業力)을 증가시킴으로써 인간 세상의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난맥상이 나타나게 된다.

법가 사상가 한비는 글에서 자로가 군주의 백성에게 제멋대로 사랑을 베푼 것을 두고 “신하의 자격으로 군주의 술(術)을 빌렸다”라고 평가했다. 백성을 구휼하고 사랑하는 것은 “임금의 술(人主之術)”이므로 신하가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한비는 법가 사상의 핵심인 법(法), 술(術), 세(勢)의 각도에서 인식했으며 통치를 유지하는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본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통치 유지를 위한 “군주의 술”로 보았을 뿐, 내면의 선(善)에 기반해 인의가 발현된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지 않았다. 한비는 제 경공(景公)이 권세로 전상(田常)이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얻으려는 월권행위를 금지하지 않았기에 훗날 전씨(田氏)가 제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언급했다[2].

전씨가 강씨의 제나라를 차지한 사건은 춘추시대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며 예붕악괴(禮崩樂壞)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간주된다. 《사기·전경중완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전리자(田釐子) 걸(乞)이 제 경공을 받들어 대부를 지낼 때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 때는 작은 되로 거두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돌려줄 때는 큰 되로 주어 남몰래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나 경공은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씨는 제나라의 민심을 크게 얻었고 전씨 일족은 날로 강성해졌으며 백성들은 모두 전씨를 흠모하게 되었다.

안자(晏子)가 여러 차례 경공에게 간언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안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진나라 대부 숙향(叔向)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예기·예운》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예(禮)’라는 것은 ‘의(義)’가 실제로 구현된 모습이다. ‘의(義)’라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마땅한 일(藝)의 분수이며, ‘인(仁)’을 알맞게 조절하는 절도이다. (행해야 할) 일에 합치되고 ‘인’에 부합하도록 연마하여, 이것을 얻는 사람은 강건해진다. ‘인(仁)’이라는 것은 ‘의(義)’의 근본이며, 순리(順)의 본체이니, 이것을 얻는 사람은 존엄해진다.”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진선(真善)에 기반한 인(仁)이 근원이고, 의(義)는 인이 적절한 절도로 나타난 것이어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기·중니연거(仲尼燕居)》에는 자공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 실려 있다.

“예로다, 예여! 예라는 것은 중용(中)을 잡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즉, 예는 의의 외적인 표현 형식이기에 본래 때에 따라 마땅함을 조절할 수 있으나 경지가 다른 사람들이 이를 해내지 못할까 염려하여 예를 통해 중용을 지키는 경계로 삼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仁)에서 의(義)로, 다시 의에서 예(禮)에 이르는 과정은 서로 다른 경지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참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예를 고리타분한 강제적인 속박으로 여겨 극단으로 치닫는다면 이는 수준 낮은 행위에 속한다.

인류 사회의 도덕 준칙이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인심이 옛날과 다르고, 시기별로 사람의 내면 경지와 심태 및 이해력은 점차 무형에서 유형으로, 중화에서 격양(激揚)으로 나아갔다. 예를 들어 공자의 평화로운 인(仁)에 비하면 맹자(孟子)의 “사생취의(舍生取義)”는 격양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도덕이 회복되느냐 하락하느냐 하는 핵심 문제는 내면의 중정(中正), 중화(中和) 및 위로 도달할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갈 것인지 가치 지향에 달려 있다. 또한 외적인 행위 방식이 합당한지 아니면 치우치고 극단적인지에 달려 있다. 내면으로부터 전통 가치로 회귀하고 도덕을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미래로 나아가는 바른길이다.

주석:

[1] 《孔子家語·辯政第十四》亦有:“子路治蒲三年,孔子過之。” 但子路爲郈令卻史無記載。《說苑·臣術》:, 【子路爲蒲令,備水災,與民春修溝瀆,爲人煩苦,故予人一簞食,一壺漿,孔子聞之,使子貢複之,子路忿然不悅,往見夫子曰:“由也以暴雨將至,恐有水災,故與人修溝瀆以備之,而民多匱於食,故與人一簞食一壺漿,而夫子使賜止之,何也?夫子止由之行仁也,夫子以仁教而禁其行仁也,由也不受。”子曰:“爾以民爲餓,何不告於君,發倉廩以給食之;而以爾私饋之,是汝不明君之惠,見汝之德義也,速已則可矣,否則爾之受罪不久矣。”子路心服而退也。】

[2] 田常,即田成子,媯姓,田氏,名恒因避漢文帝劉恒之諱,故《史記》改稱田常。 戰國時田氏篡齊,世稱“田齊”。周初,齊國原爲薑姓所封。春秋初業,田氏始祖陳完自陳遷齊,子孫世爲齊卿,終篡其政,周安王時始列爲諸侯,是爲田齊。《史記·田敬仲完世家》載述:“田厘子乞事齊景公爲大夫,其收賦稅於民以小鬥受之,其(粟)[稟]予民以大鬥,行陰德於民,而景公弗禁。由此田氏得齊眾心,宗族益強,民思田氏。晏子數諫景公,景公弗聽。已而使於晉,與叔向私語曰:“齊國之政卒歸於田氏矣。”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