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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13

【강희대제】 성세 하의 서양 경관 (하)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중국의 학사(學士)와 서양 선교사들의 지혜를 모아 강희제는 거작 《율력연원(律曆淵源)》을 주관하여 완성했으며, 가장 뛰어난 국가 지도를 제작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역법(曆法)은 고대 농경 사회의 국가적 근간일 뿐만 아니라 한 왕조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 역법은 조정의 전문 관리가 수정하고 황제가 흠정(欽定)해 조서라는 엄숙한 형식으로 천하에 공포했다. 정삭(正朔)을 정하고 역법을 반포하는 것은 흔히 국가의 일통(一統)과 질서의 확립을 선포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때문에 중국 역법은 ‘황력(皇曆 황제의 역)’이라 불리며 역대 황제의 중시를 받았다. 강희제 역시 대신들에게 “천문 역법에 대해 짐은 평소 마음을 두어 왔노라”[1]고 말한 바 있다. 선교사들의 수정과 중서(中西 중국과 서양) 역법 논쟁을 거쳐 청조는 마침내 새로운 황력을 확립했으나, 강희제는 여전히 새 역법의 정확성에 주목했다. 강희 50년(1711년), 강희제는 직접 기구로 측정하여 서양 역법 역시 하지(夏至) 계산에서 오차가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강희제는 대신들에게 서양 역법이 대체로 정확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면 미세한 시분(時分) 도수에서 편차가 생긴다고 일러주었다. 가령 그해 하지에 흠천감은 오시(午時 11~13시) 삼각(三刻)이라 보고했으나, 그가 정밀히 측정한 결과 정확한 시간은 오시 삼각 9분이었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역법의 오차는 점점 커질 것이었다. 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던 강희제는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문명 청사진을 설계했다.

일대대전(一代大典)

“최고의 학술 수준을 갖춘 전적을 편찬하여 천하를 교화하고 만세(萬世)의 본보기로 삼으리라.” ——강희제

매일 몽양재(蒙養齋)에서 편찬한 초고는 강희제의 친람과 수정을 거친 후에야 정식 원고로 정해질 수 있었다. 사진은 1699년 독서하는 강희제 초상(45세). (공유 영역)

창춘원(暢春園)은 강희제가 강남의 산수를 본떠 건립한 황실 정원이다. 완공 후 강희제는 매년 절반 가까운 시간을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만년에 가장 애용했던 이궁(離宮)이었다. 역법 수정의 필요성을 느낀 강희제는 이곳 몽양재(蒙養齋)에 산학관(算學館)을 설치하고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 모아 천문 역법을 연구하게 했으며, 자연과학에 능한 선교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양재에는 전국의 가장 우수한 전문가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역서(曆書)를 편찬할 뿐만 아니라 악률(樂律 음악 이론), 산학(算學 수학) 등 여러 분야를 다루었기에 이곳은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강희제는 그들의 업무를 매우 중시하여 특별히 세 명의 황자(皇子)와 몇몇 대신을 참여시켜 연구 성과를 책으로 엮게 했다. 매일 몽양재에서 편찬한 초고는 강희제의 친람과 수정을 거쳐야만 확정될 수 있었다.

강희 53년(1714년), 100권에 달하는 거작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당시 중서 학술의 최고 수준을 대표한다. 이 전집은 역법을 논한 《역상고성(曆象考成)》, 산법을 논한 《수리정온(數理精蘊)》, 음악의 이치를 논한 《율려정의(律呂正義)》 세 부의 전문 서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양의 산학, 천문학, 성률학 등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전통 역법과 악론(樂論)의 정수를 집대성했다. 강희제는 이를 합쳐 《율력연원(律曆淵源)》이라 명명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강희제는 자신이 평생 배운 바를 응결시켜 《강희기하격물편(康熙幾暇格物篇)》을 저술했다. 이름 그대로 강희제가 수많은 정무를 처리한 여가 시간에 생활 속에서 사고하고 실천한 과학적 문제를 기록한 백과사전식 논문집이다.

이 문집은 93편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물리학, 천문학, 의약학, 고생물학 등 여러 분야를 논술했으며, 과학적 검증을 중시했다. 이는 중국 고대 황제의 손에서 나온 유일한 과학 기술 저작이다. 이는 성세(盛世)의 천자가 탁월한 정무적 업적 외에도 과학 연구 분야에서 엄격히 진리를 구하는 학문적 태도와 성취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강희제는 젊은 시절 풍택원(豐澤園)의 황실 논을 순시하다 우연히 다른 벼들보다 높이 솟은 한 포기의 벼를 보았는데 종자의 품질이 매우 뛰어났다. 그는 이를 수확하여 이듬해 파종 실험을 진행했고, 이 벼가 조생종일 뿐만 아니라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산된 쌀은 “색이 약간 붉고 알이 길며 향기가 나고 맛이 풍부해” 특별히 ‘어도미(禦稻米)’[2]라 이름 지었다. 40년간 강희제가 먹은 것이 바로 이 쌀이었으며, 관외(關外)와 강남에 보급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공을 세웠다.

또한 ‘정남침(定南針)’이란 항목에서 강희제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위치가 정남쪽이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오차가 제각기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령 강희 30년(1691년) 나침반은 경성에서 3도 편차를 보였고 성경(盛京 청조 발상지인 심양)에서는 정남향이었으나, 강희 50년 이후 경성의 오차는 2.5도로 변했다. 다른 성(省)에서도 가리키는 방향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치우치는 등 상황이 달랐다. 강희제의 결론은 실지 측정을 기초로 도출된 것이며 후세에 귀중한 고대 실측 자료를 남겼다.

국가 지도

“천지 육합을 강역으로 삼고 사해팔방을 경계로 하니 폭원(幅員 폭의 경계)이 광활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진정 전례 없는 지도의 명작이로다.” ——강희 조(朝) 구경(九卿)

《강희황여전람도》, 산동반도, 요동반도와 한반도가 보인다. (공유 영역)

서양의 자연과학을 장악한 후 강희제는 새로운 지식을 운용하여 더욱 웅대한 도권(圖卷)을 그려낼 준비를 했다. 강희 시대의 과학 기술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는데, 과학 저작인 《율력연원》 외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국가 지도를 제작한 일이다.

고대에 지도를 여도(輿圖)라 불렀는데, 청조 이전의 지도는 모두 평면도여서 지세의 높이를 나타낼 수 없었고 실지 계산 시 오차가 발생했다. 이에 강희제는 즉위 때부터 여도의 정확성에 주목했다. 그는 만년에 회상하기를 “짐은 어려서부터 국가의 지리에 관심을 가졌다. 고금의 유명한 산천은 아무리 멀고 황폐한 곳에 있더라도 짐은 반드시 도첩을 상세히 고찰하고 의견을 널리 물어 기필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3]라고 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여러 차례 곤륜산과 서역의 먼 곳까지 사절을 파견해 큰 강의 발원지를 직접 조사하게 하고 이를 여도에 추가했다.

서양의 정확한 산법과 정밀한 기구를 접한 강희제는 순행할 때마다 선교사들을 대동하여 지리적 위치 측정과 여도 제작 업무를 맡겼다. 강희 13년(1674년), 남회인은 우선 《곤여전도(坤輿全圖)》를 완성하여 초기 이마두의 세계 지도를 보완했다. 이것은 세계 지도로서, 중화 왕조는 처음으로 두 개의 반구 형태를 띤 세계 지도를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남회인은 상하 권의 《곤여도설(坤輿圖說)》을 저술하여 지도에 주석을 달고 지구의 형상, 자연 현상, 5대양 6대주의 분포 및 각국의 풍토와 인정(人情)을 소개했다.

여러 차례 순행과 군사 행동을 통한 지리 조사를 거쳐 시기가 성숙해졌다. 강희제는 46년(1707년) 조서를 내려 선교사 뇌효사(雷孝思), 백진 등과 중국의 학자, 관리들에게 전국적인 대규모 실지 측량 활동을 전개하게 하고, 더욱 상세하고 정확한 청 왕조의 지도를 제작하게 했다.

관리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신주(神州) 구석구석을 누볐다. 기존의 토지 측량법과 서양식 천문 측정법, 삼각 측량법을 결합하여 끈기 있게 작업을 이어갔다. 중서 엘리트의 역량을 집중하여 이 지도는 11년 후인 강희 57년(1718년)에 마침내 세상에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희황여전람도(康熙皇輿全覽圖)》다.

이 지도집은 동판으로 인쇄되었으며 사다리꼴 도법을 채택했다. 축척은 약 1:140만으로, 동북으로는 사할린, 동남으로는 대만, 북으로는 바이칼호, 남으로는 해남, 서북으로는 이리하, 서남으로는 열성(列城 인도 카슈미르의 레) 서쪽에 이르는 중화 판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중국 최초로 경도와 위도를 사용해 제작된 지도로, 총도(總圖)와 각 성의 상세 분도(分圖)로 나뉜다. 관문, 해안 초소, 강변 방어선, 마을 보루, 파수대, 역참, 나루터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명확히 표시되어 있어 “먼 곳이라 하여 빠뜨리지 않고 세세한 것까지 모두 실었다”[4]라고 할 만하다.

후세 학자들은 이 지도가 당시 아시아 최고의 지도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을 통틀어도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불후의 걸작이라고 찬사했다.

기독교 선교의 흥망

“서양 선교사들은 중화 문화를 앙모해 만 리 항해를 거쳐 왔다. 이제 그들은 역법을 수정하고 전쟁용 화포를 제조하며 러시아와의 협상에 임하는 등 대청을 위해 성심으로 봉사하여 공로가 매우 크다.” ——강희제 용교령(容教令)

만 리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온 선교사들은 중화에 서양 문화를 전파하는 사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 목적은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양의 기독교 강희 조에 어떻게 발전했으며, 과학 기술처럼 강희제의 흥미를 끌었을까?

중서 역법 논쟁 이전에는 이마두의 선교 전략 덕분에 선교사들이 중화 전통과 유가 사상을 존중하여 민중과 잘 융화되었고, 탕약망 등이 궁정에서 봉직한 영향으로 천주교는 한때 중화에서 순조롭게 전파되었다. 강희 3년(1664년),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총 82명, 교회는 150여 곳, 신도는 20여만 명에 달했다.

탕약망의 ‘역옥(曆獄)’ 사건 이후 선교 사업은 위축되었다. 강희제는 친정 후 탕약망의 억울함을 씻어주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지는 않았다. 강희 8년(1669년), 강희제는 조서를 내려 “남회인 등이 평소처럼 교를 믿는 것은 허락하나, 각 성시에서 다시 교회를 세우고 신도를 모집하는 것은 우려되니 선교 활동은 여전히 엄금한다”[5]라고 했다.

탕약망과 순치제, 독일 뮌헨 박물관 소장. (출처 《청사도전(清史圖典)》, 공유 영역)

하지만 강희제는 선교사들의 재능을 아껴 그들을 대담하게 등용하고 서양 과학 기술을 겸허히 배웠다. 선교사들은 서양 과학을 가르치는 외에 천자를 충심으로 보필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화포 주조에 능해 삼번의 난 평정을 도왔고, 어떤 이는 라틴어에 정통하여 만청과 러시아 간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을 도와 청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걸출한 공헌을 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강희제도 천주교에 대해 일정 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31년(1692년), 강희제는 천주교의 중국 전도를 허용하는 용교령(容教令)을 내려 선교 사업이 정점에 이르게 했다. 조칙에서 강희제는 선교사들의 오랜 공적을 찬양하며, 그들이 선교에 전념할 뿐 어떠한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고 사교(邪敎)로 대중을 현혹하지도 않았으므로 선교의 자유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는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백 년 만에 중국 황제가 처음으로 조서의 형식으로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제천(祭天 하늘 제사), 제공(祭孔 공자 제사), 제조(祭祖 조상 제사)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천주교 교리와 양립할 수 있는지가 기독교 내부에서 큰 쟁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대규모 전례 논쟁이 촉발되었다.

강희 44년(1705년), 로마 교황이 파견한 사절 투르농(鐸羅)이 중국에 들어와 남경에서 중국 신자들의 제사 습속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강희제는 이에 매우 분노하여 투르농을 마카오로 압송해 가두게 했으며, ‘이마두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선교사는 본국으로 추방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중화 전통을 존중하는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희제는 그들에게 중국에 장기 체류하며 선교할 수 있는 증표인 ‘신표(信票)’를 발부했다. 강희 46년(1707년), 강희제는 명확한 금교령(禁教令)을 반포했다. 60년(1721년) 강희제는 다시 선포했다. “앞으로 서양인이 중국에서 선교할 필요가 없으니 금지하는 것이 가하다. 번거로운 일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6] 이로부터 조정의 백 년에 걸친 금교 정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희제는 서양 기예(技藝)에 정통한 선교사들을 중용하고 예우하여 서양 문화가 청조에서 계속해서 빛을 발하게 했다. 선교사들을 대하는 강희제의 태도는 그의 광활한 흉금과 명석한 안목을 다시 보여주었다.

주석:
[1] 《康熙朝實錄》卷247:康熙五十五年十月辛未條。
[2] 出自《康熙幾暇格物篇》。
[3] 《康熙朝實錄》卷289:康熙五十九年十一月辛巳條。
[4] 《康熙朝實錄》卷282:康熙五十八年二月乙卯條。
[5] 《康熙朝實錄》卷5:康熙八年五月辛未條。
[6] 出自《康熙與羅馬使節關系文書》。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8/n121445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