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소선중흥(昭宣中興)
무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유불릉(劉弗陵)이 즉위하니 곧 소제(昭帝)다. 소제의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이 없었으므로, 대신들은 무제의 증손이자 전 태자 거(據)의 손자인 병(病)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곧 선제(宣帝)다.
비록 한 왕조가 무제 시기에 전성기에 도달했으나, 무제 성세(盛世)의 이면에는 일정한 사회적 위기가 잠복해 있었다.
무제가 후기의 쇠락과 혼란에 미친 영향은 《한서•하후승전(夏侯勝傳)》에 기재되어 있다.
“무제는 비록 사방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한 공로가 있으나, 군사와 백성을 많이 죽이고 백성의 재력과 국력을 고갈시켰으며, 사치와 방탕함이 법도가 없어 천하가 허비되고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죽은 자가 절반에 달했다. 황충(蝗蟲)이 크게 일고 황무지가 수천 리에 달해 혹은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쌓인 것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백성에게 베푼 덕택이 없으니 (무제의) 사당을 세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즉, 소제 때의 대신 하후승이 무제가 변경을 평정하고 개척한 공로는 있으나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상하게 하여 백성들을 삶의 터전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여겼다.
소제와 선제는 이미 무제 시기의 폐단을 인식했으므로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정책을 취했다. 소제는 재위 기간에 현량한 인재를 선발하고 백성의 고통에 매우 마음을 썼으며, 몇 차례 조서를 내려 백성의 토지세와 부세(賦稅)를 감면하고 조서를 내려 황실에서 사용하는 말의 수를 줄였다. 반고(班固)는 그를 현명한 군주로 여겼으며, 이에 따라 사후에 ‘소제’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제는 즉위 후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소제의 정책을 계속 실행했다. 동시에 몇 차례 명령을 내려 빈민을 구제했다. 선제 4년째 되던 해 지진과 산사태가 발생하자 선제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지난 9월 임신일에 지진이 일어나니 짐이 매우 두려워하노라. 짐의 과실을 간할 수 있는 자와 현량방정(賢良方正)하고 직언(直言)으로 극간(極諫)하는 선비들은 짐의 미치지 못함을 바로잡되 관리들을 꺼리지 말라. 짐이 덕이 없어 먼 곳의 사람들을 귀순시키지 못했기에 변경의 군사 주둔과 수비가 아직 쉬지 못했다. 이제 다시 군대를 정돈하고 무겁게 주둔시켜 백성들을 오랫동안 수고롭게 하니, 이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다. 거기장군(車騎將軍)과 우장군의 주둔군을 철수하라.“
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종묘의 연못 중 아직 군주가 거동하지 않은 곳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라. 군국의 궁과 관은 다시 수리하거나 짓지 말라. 유랑하던 백성 중 돌아온 자에게는 공전을 빌려주고 종자와 양식을 대여해 주며 당분간 부역을 면제하라.”
선제는 또한 관리들의 다스림과 형옥(刑獄)을 특별히 중시해 일부 혹리(酷吏)들의 관직을 해임했다.
대외 방면에서 소제와 선제 두 황제는 군사를 적게 일으키고 최대한 공고히 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서역에 대한 한조의 위세는 이 시기에 무제 때보다 더 공고해졌다. 선제 신작(神爵) 2년(기원전 60년)에 한조는 서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천산북로(天山北路)를 완전히 통제하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했다.
서역도호부의 관할 범위는 옥문관, 양관(陽關) 서쪽의 천산 남북에서부터 지금의 발카시호, 페르가나 분지와 파미르 고원 지역을 포함한다. 초기에는 관할 국가가 36개국이었으나 이후 50개국으로 늘어났으며 치소는 오루성(烏壘城 지금의 신강 윤태현 동쪽)에 두었다. 서역도호부는 한조의 군사 주둔 구역이자 특수한 행정 구역이었다. 한편으로 이는 내지(內地)의 정식 행정 구역과 달라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지 않고 여전히 원래의 국가를 보존해, 한조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내부 사무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병력과 인구 등 기본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다른 한편으로 도호(都護)는 조정을 대표해 이들 국가의 외교와 군사권을 장악하여, 그들의 군대를 동원하고 외교적인 태도를 결정할 수 있었으며 필요할 때는 그들의 군주를 직접 폐위하거나 세우고 심지어 어떤 국가를 없앨 수도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서역도호부 역시 한조 영역의 일부분이었다.
소제, 선제 시기에 일부 지역은 부득이 축소되었다. 예컨대 소제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년)에는 한반도에 설치했던 임둔(臨屯)과 진번(真番) 2군을 철회하여 그 관할 영역의 일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일부분은 낙랑군에 병합했다.
원봉(元鳳) 5년(기원전 76년)에 이르러서는 또 현도군의 동부를 포기하고 치소도 한반도에서 지금의 요녕 신빈현(新賓縣) 서쪽으로 옮겼다. 같은 해에 또 해남도에 있던 담이군(儋耳郡)을 주애군(珠崖郡)에 병합했으나 훗날 원제(元帝) 초원(初元) 3년(기원전 46년)에 다시 부득이하게 주애군을 철회하고 행정 기구를 전부 내륙으로 이전했다. 기원전 67년 선제는 문산군(汶山郡)을 철회했다. 이렇게 일부 국부적인 축소를 제외하고 서한의 강토는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서한 말년까지 줄곧 유지되었다.
소제와 선제 치세, 즉 기원전 86년에서 전 49년 사이에는 정치가 맑고 투명하고 경제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대외 관계도 무제 시기의 강성함을 계속 공고히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역사상 ‘소선중흥(昭宣中興)’이라 부른다.
쇠락으로 향하는 서한 왕조
선제가 죽은 후 아들 원제(元帝)가 즉위했다. 그 뒤를 이은 이는 성제(成帝)와 애제(哀帝)다.
서한 왕조는 비록 소선중흥을 거쳤으나 쇠락의 징후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고는 “한은 원제와 성제 때 쇠락했고 애제와 평제 때 망가졌다”(《한서•영행열전》) 고 보았다. 그 원인은 통치자들의 끝없는 사치라는 인화(人禍 사람이 자초한 화)도 있었고 천재(天災 하늘이 내리는 재앙)도 있었다.
서한 말년의 천재인화가 더해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해졌다. 원제와 성제 연간에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제) 초원(初元) 원년, 관동에 올해 곡식이 익지 않아 백성들이 많이 곤핍했다”,
“9월, 관동의 군국(郡國) 열한 곳에 큰 홍수가 나고 기근이 들어 일부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으니, 이웃 군의 돈과 곡식을 옮겨 서로 구제했다.”
“초원 2년 6월, 관동에 기근이 들어 제나라 땅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해마다 재해가 잇따라 백성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다.”
“영광 2년 봄 2월, 백성들이 크게 곤궁하여 도로에 흘러 흩어지니 도적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요사이 연이어 수확하지 못해 사방이 모두 곤궁하다. 백성들이 농사일에 수고로우나 효과가 없고 굶주림에 곤궁하니 서로 구제할 길이 없다.” (《한서•원제기》)
건시(建始) 3년 9월, “군국이 수재를 입어 휩쓸려 죽은 백성이 많게는 천 명에 달했다.” (《한서•성제기》)
원제는 비록 사람됨이 공손하고 검약하며 너그러워 백성의 곤궁함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일부 사치스러운 제도를 시정하고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하는 일을 행했으나, 대신과 환관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져 많은 조치들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기원전 33년 원제가 죽은 후 아들 성제가 즉위했다.
성제는 주색에 빠져 방탕함이 끝이 없었고 성격 또한 우유부단하여 권력이 점차 외척 왕(王)씨의 수중에 떨어졌다. 기원전 7년 성제가 죽고 애제가 섰다. 애제 때 한실(漢室)의 쇠락 징후는 더욱 명백해졌다. 대신 포선(鮑宣)이 올린 상소에서는 백성에게 일곱 가지 망함은 있으되 한 가지 얻음도 없고, 일곱 가지 죽음은 있으되 한 가지 삶도 없다고 말했다.
“무릇 백성에게 일곱 가지 망함이 있으니,
음양이 조화롭지 못해 수재나 한재가 있는 것이 첫 번째 망함이요,
현관(縣官)이 부역과 조세를 무겁게 책망하는 것이 두 번째 망함이요,
탐관오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거두어들이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망함이요,
호강대성(豪强大姓)들이 끝없이 잠식하는 것이 네 번째 망함이요,
가혹한 관리들이 요역을 시켜 농사 시기를 잃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 망함이요,
부락의 북소리가 울려 남녀가 가로막아서는 것이 여섯 번째 망함이요,
도적들이 겁탈하고 약탈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 일곱 번째 망함입니다.
그나마 일곱 가지 망함은 오히려 괜찮으나 또 일곱 가지 죽음이 있으니,
혹독한 관리가 때려죽이는 것이 첫 번째 죽음이요,
옥사를 가혹하게 다스리는 것이 두 번째 죽음이요,
억울하게 무고한 자를 모함하는 것이 세 번째 죽음이요,
도적들이 횡행하는 것이 네 번째 죽음이요,
원수끼리 서로 잔해하는 것이 다섯 번째 죽음이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것이 여섯 번째 죽음이요,
돌림병이 도는 것이 일곱 번째 죽음입니다.
백성에게 일곱 가지 망함은 있으되 한 가지 얻음이 없으니 나라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로 어려우며, 백성에게 일곱 가지 죽음은 있으되 한 가지 삶이 없으니 형벌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통치자들은 사치가 끝이 없었다. 성제는 일찍이 대대적으로 능묘를 수축했다. 애제는 단지 태후가 죽었다는 이유로 5만 명을 동원해 무덤을 만들게 하여 천하를 허비하게 했다. 황실의 수공업에 드는 비용만 “삼공관(三工官)의 관비가 5천만이었고 마구간에서는 말 만 마리를 길렀는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마구간의 말들은 곡식을 먹었으며, 제후의 처첩이 혹은 수백 명에 달하고 부유한 관리와 백성 중 가수를 양성하는 이가 수십 명에 달했다. 호강들의 토지 겸병 또한 매우 심각하여 그들은 이러한 수단을 통해 스스로 백만, 천만의 부호가 되었다. 예컨대 애제의 총신 동현(董賢)이 죽은 후 가산을 매각해 환산한 금액이 무려 43억 냥에 달했다. 상인들 또한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 일곱 가지 죽음과 일곱 가지 망함의 간고하고 곤궁함 속에서 발버둥 치던 백성들은 도처에서 핍박을 못 이겨 봉기와 폭동의 길로 나아갔다. 성제 때에만 산동, 하남, 사천 등지에서 수차례 봉기가 폭발했다. 이는 도적이 그치지 않고 도적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시대였다.
애제는 비록 무제와 선제를 본받아 황권을 강화할 마음은 있었으나, 총애하는 아첨꾼 동현을 승상으로 임용하는 동시에 외척 정(丁)씨를 임용하여 외척 왕씨와 대항하게 했다. 그 결과 조정의 정사는 매우 어지러워졌다.
원제 때부터 재앙과 이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비록 몇몇 황제들이 일부 국부적인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태평성대의 출현과 바꾸려 시도했으나, 그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극도로 사치하고 방탕했으며 제후와 호강들 또한 “노비를 많이 두고 전택(田宅)을 한도 없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해마다 유리걸식하고 성곽을 떠나 도로에서 서로 베고 쓰러지는 일이 날로 심해졌다. 서한 왕조가 멸망할 날이 이미 머지않았다.
한 멸망 예언 및 서한의 멸망
《한서•오행지》에 “애제 건평(建平) 4년 4월, 산양(山陽)의 호릉(湖陵)에 핏비가 내렸는데 너비가 3척이요 길이가 5척이었으며 큰 것은 돈만 하고 작은 것은 삼씨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피는 적색으로 한가(漢家)의 화덕(火德)을 대표하니, 천하에 피가 내린 것은 애제가 2년 후에 죽고 왕망이 한 왕조를 통제할 것을 예시한 것이었다.
기원전 1년 애제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망은 기회를 틈타 원제의 손자인 평제(平帝)를 맞이해 세웠다. 이어 애제 때의 외척 정씨와 승상 동현을 죽였다. 얼마 후 평제가 죽자 왕망은 선제의 어린 증손 유자 영(孺子嬰)을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거섭(居攝)’이 되었다. 서기 8년 왕망은 유자 영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으로 고치니 이로써 서한이 멸망했다.
신실(新室)의 흥망(8년—23년)
왕망은 자가 거군(巨君)으로 신황조의 창립자이며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그의 선조는 전국 시대의 제나라 전(田)씨였으나 훗날 고조에게 멸망당한 후 제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왕가(王家 왕실 가문이란 뜻)’라 불렀으므로 왕을 성씨로 삼았다.
문제와 경제 때 왕씨는 동평릉(東平陵)에 처했으나 무제 때 위군(魏郡) 원성(元城) 위속리(委粟利)로 이주했다. 왕망의 조부 왕금(王禁)은 젊어서 장안에서 법률을 배워 정위사(廷尉史)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장안에 살았다. 왕금의 차녀 정군(政君)이 원제의 황후가 되어 성제를 낳았다. 성제 때 원후(元后 왕정군)의 여러 형제들이 대개 관직을 맡고 후로 봉해졌다. 왕망은 원후의 조카인데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사촌 형제들처럼 주색잡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젊어서부터 유가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몸을 부지런히 하고 널리 배웠으며 의복을 유생처럼 입었다. 훗날 친척 왕봉(王鳳)의 추천을 받아 황문랑(黃門郎)이 되었으니 왕망은 이때부터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기원전 8년 왕망이 38세 때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했다. 왕망이 대사마가 된 지 불과 1년 만에 성제가 세상을 떠나고 애제가 즉위하니(기원전 7년), 외척 정씨와 부(傅)씨가 권세를 잡아 왕망은 이에 퇴위하고 신도(新都 지금의 하남 신야)에 피해 거주했다.
애제가 원수(元壽) 2년(기원전 1년)에 세상을 떠나고 9세의 평제가 즉위하자 원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 태후가 어린 황제 대신 조정에 나와 정사를 주관)하며 왕망을 대사마로 삼았다. 왕망은 원수 2년에 다시 대사마가 된 때부터 몸이 죽을 때까지 정권을 장악한 지가 24년에 달했다.
왕망이 보좌하여 정치를 한 첫 6, 7년 동안(기원전 1년―6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주살하고 최종적으로 대권을 가로챘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망은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 황후로 삼았다.
왕망은 또한 원후를 통해 황제의 모친인 위희(衛姬) 및 황제의 외삼촌 위보(衛寶), 위현(衛玄) 등을 경사(京師 장안성) 밖으로 배척했다. 그의 아들 왕우(王宇)는 평제가 자란 후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위보와 편지를 통하며 그에게 장안으로 돌아올 방도를 마련하도록 가르쳤다. 왕망은 동의하지 않았다. 왕우는 처남인 여관(呂寬) 등과 사적으로 상의하여 미신적인 수단을 써서 조정의 정권을 위씨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여관이 밤에 왕망의 집 문에 피를 뿌리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자살했다. 왕망은 아들 왕우를 죽이도록 상소하고 위씨를 주멸했다.
얼마 후 왕망은 평제를 해치고 선제의 증손 중에서 가장 어린 자영(子嬰)을 골랐는데 나이가 겨우 2세였다. 점을 쳐서 보좌하기에 가장 길하다고 핑계를 댔으나 실제로는 통제하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어 왕망은 천자의 제도와 똑같이 섭정했으며 이듬해 연호를 ‘거섭’으로 고쳤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왕망은 자영을 황태자로 삼고 ‘유자(孺子)’라 불렀다.
거섭 원년(6년) 4월, 유씨 종실 수백 명이 일어나 왕망에게 반대하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천하의 왕망 반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거섭 2년(7년) 9월, 동군(東郡)태수 적의(翟義)가 봉기하여 왕망을 토벌하니 호응하는 자가 10여 만 명에 달해 장안을 향했다. 왕망은 두려워 밥을 먹지 못하고 주야로 유자영을 안고 기도했으며, 지금 권력을 잡고 있으나 장래에는 반드시 정권을 자영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설명하는 책서를 작성했다. 동시에 군대를 보내 적의를 진압하게 하니 몇 달 만에 승전보가 전해졌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천자가 될 시기가 이미 도래했다고 여겼다. 이에 왕망은 진짜 천자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정하고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으로 고쳤다. 이어 유자영을 안정공(安定公)으로 봉하고 곧바로 그를 유폐시켰다.
왕망은 황제가 된 후 이미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니, 예컨대 토지 국유화를 선언하고 큰 상업을 국유로 거두어들이며 물가를 평형하게 하는 등이었으나, 당시의 혼란스러운 국면 아래에서 단 한 가지도 실시될 수 없었다. 새로운 법은 서지 못했으나 서한 때의 옛 법은 도리어 파괴되었다. 게다가 호강과 관리들의 강탈과 약탈로 천하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17년부터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한실 종친들도 분분히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중 실력이 비교적 강한 것은 유현(劉玄)과 유수(劉秀)의 군대였다. 23년 왕망은 장안의 반란자들에게 살해당했고 신실(新室)은 이로써 멸망했다. 새로운 한실(漢室)의 큰 연극 한 막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