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220년)
심연
【정견망】
과학기술
* 천문학
동한 시기의 천문학 발전은 새로운 높이에 도달했다. 동한의 저명한 과학자 장형(張衡)은 혼천의(渾天儀)와 지동의(地動儀)를 발명했으며, 《영헌(靈憲)》과 《산망론(算罔論)》을 저술했다.
장형의 후풍지동의(候風地動儀)는 고금을 진동시킨 위대한 발명이며, 이것은 세계 최초의 지진계다. 양가(陽嘉) 원년(132년)에 주조되었다. 《후한서・장형전》에 후풍지동의에 관한 간략한 기재가 남아 있다.
지동의는 내부 구조가 정교하다. 기기 내부 바닥 중앙에는 거꾸로 선 관성 진동추가 세워져 있는데, 그 작용은 현대 지진계의 추와 같다. 도주(都柱 위는 두껍고 아래는 가는 구리기둥)를 둘러싸고 기기 본체와 연결된 여덟 그룹의 레버 기계인 ‘팔도(八道)’가 설치되어 있다. ‘팔도’는 그 위에 있는 여덟 마리 용의 머리 상악과 결합해 각각 동, 서, 남, 북, 동남, 동북, 서북, 서남의 여덟 방위를 대표한다. 지진이 발생해 지진파가 전달되면 ‘도주’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용머리의 레버를 건드리게 되고, 해당 방위의 용입이 벌어져 구리 공이 두꺼비 입속으로 떨어지며 소리를 내어 사람들에게 지진이 일어날 방향을 알려준다. 즉 “한 용이 기틀을 발동하면 다른 일곱 용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방향을 찾아 곧 지진이 발생한 곳을 안다”라고 했다.
장형은 원초(元初) 3년(117년)에 누수전혼천의(漏水轉渾天儀 물을 떨어뜨려 돌아가는 혼천의)를 발명하고 제조했다. 그것은 혼천설을 시연하는 일종의 기기다. 이 기기는 구형으로 정밀한 구리로 주조되었으며, 직경이 4척 남짓으로 천구(天球)를 대표한다. 하늘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할 수 있으며, 위에는 28수, 중외성관(中外星官) 및 황도(黃道), 적도, 남극, 북극, 24절기, 항현권(恒顯圈), 항은권(恒隱圈) 등이 새겨져 있다. 장형은 기어 시스템을 이용해 혼상(渾象)과 누호(漏壺)를 연결하고, 누호에서 떨어지는 물을 동력으로 삼아 기어를 작동시켰다.
혼상은 그 구동에 따라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이렇게 하면 혼상은 밤낮 멈추지 않고 자동으로 회전하게 되었다. 적당한 기어 개수와 잇수를 선택함으로써 혼상이 하루 낮밤에 지구 자전 속도와 일치하도록 하여, 항성의 출몰과 중천 등 하늘의 주일(周日)운동을 시연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관측함으로써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절기의 각종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서륜형협(瑞輪螢莢)’이라는 부속 기구도 있었는데, 일종의 기계 달력으로 음력 날짜와 달의 망삭 변화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혼천의는 물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장형의 물시계 기술이 아주 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장형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국에는 수운의상(水運儀象)을 제조하는 전통이 탄생했다. 20세기 하반기 원자시계가 발명되고 채택되기 전까지 시간의 계량은 모두 지구의 자전, 즉 천구의 회전을 기초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형의 발명은 사실상 후세 기계 시계의 원시적 시조가 되었다.
《영헌》은 한 편의 뛰어난 천문학 저작이다. 그것은 당시의 천문학 지식을 정요하게 개괄하고 중대하게 발전시켰다. 당시 중국에는 몇 가지 우주 구조 이론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說)이 가장 유행했다. 장형은 혼천설을 주장했다. 《영헌》의 시작 부분에서 “옛날 선왕께서 장차 하늘 길(天路)을 걸으시며…… 먼저 혼체(渾體 역주: 혼이란 둥글다는 뜻으로 혼체는 구체를 의미한다)에서 법도를 정하셨다”라고 하여, 하늘이 구체임을 명시했다. 하늘이라는 구는 동에서 서로 끊임없이 회전하고, 땅이라는 반구는 하늘 내부에서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장형은 또 하늘이 전체 물질세계의 변두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영헌》에서는 “이곳을 지나서 가는 것은 혹 알지 못한다. 혹 알지 못하는 것을 우주(宇宙)라 이른다. 우(宇)의 표면은 끝이 없고 주(宙)의 끝은 무궁하다”라고 했다. 하늘 한계 너머에 또 무한히 광활한 우주 세계가 있지만, 다만 사람들이 아직 그곳을 알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영헌》에서 장형은 우주의 연화(演化) 및 일월과 오성(五星)에 대한 견해도 언급했다. 그는 삭망(朔望) 현상이 달과 태양 사이의 상대적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과 월식이 형성되는 원인을 명확히 지적했으며, 행성 운동의 법칙에 대해 자신만의 추측을 내놓았다. 즉 그는 이미 세 개의 외행성 속도가 태양(실제로는 지구)보다 느리고, 두 개의 내행성은 태양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행성) 운행이 느려지는 것은 동쪽에서 보인다”는 것을 관측했는데, 즉 세 외행성은 모두 먼저 아침에 동쪽 지평선 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4세기나 앞선 것이다. 장형은 또 운석을 관찰했으며, 항성에 대한 관측과 명명(命名)을 종합[이전 사람들이 정한 성관(星官)] 및 계수(計數) 작업을 진행했다. 장형이 정한 성관 체계는 심지어 훗날 삼국 시대 진탁(陳卓)이 석씨(石氏), 감씨(甘氏), 무함(巫咸) 삼가의 성관을 종합해 만든 성관 체계보다도 방대했다. 후자는 성관이 283관(官), 별의 수가 1464성(星)에 불과했다.
[역주: 성관에서 성은 개별 별을 가리키고 관이란 관직이란 뜻으로 일종의 별자리를 말한다.]
역법(曆法)에서는 동한 장제(章帝) 때부터 《사분력(四分曆)》을 채택하여 서한 때 사용하던 《태초력(太初曆)》의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사분력》은 천문 데이터와 계산 방법 등 방면에서 많은 개선이 있었다. 동한 말기 유홍(劉洪)의 《건상력(乾象曆)》에서는 정삭(定朔) 개념이 나타났다. 정삭 개념의 발생은 중국 역법 역사상 하나의 큰 진보였다.
[역주: 정삭이란 태양과 달의 실제 타원 궤도 운동과 속도 변화(빨라졌다 느려지는 현상)를 모두 반영하여, 실제 합삭이 일어나는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해 초하루를 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전까지는 기계적으로 초하루를 정해 계산하긴 쉽지만 실제 천문현상과 어긋나는 문제가 있었다.]
* 사직업(絲織業)
동한의 견직물은 종류가 허다하고 문양이 복잡했다. 동한의 양부(楊孚)는 《이물지(異物志)》에서 남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파초 잎 등 야생 식물 섬유를 이용해 고품질의 직물을 짰다고 기재했다. 동한 허신의 《설문해자》 ‘糸'(糸은 곧 실이다) 부에는 248자나 되는 글자가 있어, 당시 직염 공예의 발달을 충분히 알 수 있다.
* 주동업(鑄銅業)–구리제조업
동한 시기의 주동업에도 발전이 있었다. 관부는 많은 중요한 구리 광산 지역에 야동장(冶銅場 구리제련장)이나 주동(鑄銅) 공방을 설치하여 황실이나 관부에서 사용하는 동기(銅器)를 제작했다. 개인적으로 야동업을 경영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의 주동업은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가장 유명한 지역으로는 광한(廣漢), 촉군(蜀郡), 주제(朱提) 등이 있었다. 제품으로는 박산로(博山爐), 동경(銅鏡 구리 거울) 등이 있었는데 주로 생활용품이었다. 어떤 것은 제작이 정교하고 문양이 세밀했으며, 도금을 하거나 금이나 은을 상감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심지어 “주제조(朱提造)”, “당랑(堂狼 지금의 운남 동천東川)조”, “청령(青蛉 지금의 대요大姚)조” 등의 명문이 있어 생산한 곳을 명시했고, 문양은 쌍어(雙魚), 양, 정(鼎) 등의 도안이 있거나 축복과 길상, 부귀를 기원하는 말을 주조하기도 했다.
* 기계업
31년, 동한에서는 이미 수배(水排 수력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로 바람을 일으켜 무쇠를 제련했다. 수배는 누운 형태(또는 선 형태)의 수차(水車)로 가죽 주머니를 구동해 바람을 일으키는 기계 장치로, 이는 기계 공학 역사상의 중요한 창조이며 유럽의 유사한 기계보다 약 1200년 앞선 것이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과학자 장형은 오늘날의 모형 비행기와 유사하게 날 수 있는 나무 새를 제조하기도 했다. 《광박물지(廣博物志)》에서 인용한 《문사전(文士傳)》에 이르기를 “장형이 일찍이 나무 새를 만들고 깃털을 가짜로 달았으며, 배 속에 기틀을 베풀어 놓으니 몇 리(里)를 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기계 비행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장형은 또 세 개의 바퀴가 달린 기계를 만들었는데, 《부자(傅子)》에 이르기를 “장형은 세 바퀴가 홀로 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장형은 자신이 만든 《응간(應間)》에서도 “세 바퀴를 스스로 돌게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 손문청(孫文青)의 《장형연보(張衡年譜)》에서 송 왕응린(王應麟)의 말을 인용하여 기리고차(記裏鼓車)라고 여겼다. 기리고차의 특징은 수레가 주행한 이정표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인데, ‘홀로 돌아간다’, ‘스스로 돌아간다’고 강조한 것과는 아무래도 다른 일인 듯하다. 어쩌면 이것은 풍차나 수차 방아에 더 가까울 수 있는데, 그것들은 자연의 풍력이나 수력을 빌려 구동되기 때문에 여전히 ‘자전(自轉)’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186년, 동한에서는 이미 ‘번차'(翻車 용골수차)를 사용해 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용골수차는 중요한 관개(灌漑) 도구 중 하나다.
* 교통도구
121년에 완성된 동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는 “……일설에는 외바퀴 수레라고 한다……”라는 기재가 있다. 사천 성도 양자산(揚子山) 2호묘에서 출토된 동한 화상벽돌에는 외바퀴 수레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동한 때 사람들이 이미 외바퀴 수레를 사용했음을 나타내며 외바퀴 수레는 고대의 중요한 운송 도구 중 하나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전국 시대 말기부터 서한 초기에 중국은 이미 구리와 철로 주조한 기어를 사용했으며, 동한 초년에는 빗니기어도 있었다.
조선업에서도 비교적 큰 규모와 높은 기술 수준을 가졌다. 서한 때 이미 너비 6-8미터, 길이 30미터, 적재량 50-60톤의 목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늦어도 동한에는 배의 키가 이미 발명되었다. 광주 동한묘에서 출토된 도자기 배 모형에는 키가 있다. 키의 발명은 조선 기술상의 중요한 진보이며, 유럽은 1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배의 키가 있었다.
* 제지술
제지술의 개량자는 동한 화제 때 중상시(中常侍) 채륜(蔡倫)이다. 채륜은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헝겊, 그물을 이용해 꺾고, 찧고, 뜨고, 말리는 등 일련의 공예 가공을 거쳐 종이를 만들어 영원(永元) 17년(105년)에 화제(和帝)에게 바쳤다. 그가 만든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 부른다. 그러나 동한과 삼국 시기에는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서사 재료는 여전히 죽간과 견백(絹帛)이 위주였다. 진조(晉朝)에 이르러 제지술이 장강 유역으로 전해졌는데, 그곳에는 풍부한 제지 원료가 있었고 비교적 좋은 종이도 생산되어 비로소 보편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 의학
동한의 저명한 의학가 장중경(張仲景)은 동한 말기 온역(瘟疫 돌림병)이 유행하여 초래된 거대한 위험에 느낀 바가 있어, 전인들의 기초를 총괄하고 자신의 임상 경험을 결합하여 동한 말기에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을 저술했다. 이 두 부의 의학 전문 서적이 가진 중대한 공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법방약(理法方藥)과 변증논치(辨證論治)를 운용하는 치료 원칙을 제시했고, 특히 육경변증(六經辨證)의 학설을 제시했다. 이는 열성병의 발병 초기, 중기, 말기의 각종 임상 표현과 서로 다른 치료의 반응 및 결과에 따라 변태양병(辨太陽病), 변양명병(辨陽明病), 변소양병(辨少陽病), 변태음병(辨太陰病), 변소음병(辨少陰病), 변궐음병맥증병치(辨厥陰病脈證並治), 아울러 “평맥(平脈)법”, “변맥법(辨脈法)”, “상한례(傷寒例)”, 변곽란병(辨霍亂病), 변음양역차후로복맥증병치(辨陰陽易差後勞複脈證並治)를 두었다.
둘째, 방제학을 발전시켜 총 363여 방을 두었는데, 배방이 매우 엄밀하고 약재가 정련되며 치료 효과가 현저하여 그 방제는 “경방(經方)”으로 추대되고 “중방(衆方)의 조상”이라 불린다.
셋째, 병인과 발병학에서 경락이 사기를 받아 장부로 들어간다는 논점과 혈어(血瘀), 방실(房室), 외상(外傷)의 삼인(三因)학설을 제시했다. 이는 중의(中醫) 이론과 실천 경험을 끊임없이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수준으로 제고시켰으며, 후세 사람들은 장중경을 “의성(醫聖)”이라 불렀다.
《상한론》은 한 편의 획기적인 임상 의학 거저(巨著)로 인정받고 있으며, 후세에 여러 가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동한의 또 다른 저명한 의학가 화타(華佗 141-208년)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침구 각 과에 정통했으며 특히 외과에 뛰어났다. 그는 마취제를 창안하여 환자를 마취시킨 후 수술을 시행했다. 이는 중국 의학이 2세기 때 마취 방법과 외과 수술에서 이미 상당한 성취를 가졌음을 나타낸다. 세계 의학 역사상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기럭에 따르면 그는 세 가지 수술을 할 수 있었다.
① 개복해서 상처 부위를 절개하는 시술, ② 뼈까지 긁어내 독을 없애는 기술, ③ 뇌외과 등 수술이다. 그는 또 오금희(五禽戲)를 창시하여 체육 단련을 강조함으로써 체질을 증강시켰다. “인체는 노동을 해야 하니…… 혈맥이 유통되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문지도리가 끝내 썩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여겼다.
* 건축
양한 시기의 건축은 날로 완벽해졌으며, 중국 2000년 이래 민족 건축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되어 지금까지 한 대의 목조 건축은 한 채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적 중 이 시기 건축에 관한 기재가 매우 풍부하고 당시 건축 방면의 자료도 매우 상세하며, 이 외에도 출토된 대량의 한 대 화상벽돌, 화상석과 명기(明器 무덤에 부장하는 기물)는 실제 건축의 형상, 실내 배치 및 건축 군락의 배치 등 방면에서 형상적이고 구체적인 보충을 해준다.
한 대의 도시 건축은 장안성을 대표로 한다. 고조 유방 때부터 장안성 건설의 서막을 열었고 평제 때 이르기까지 미앙궁(未央宮), 동궐, 북궐,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 장안성벽, 백량대(柏梁臺), 장궁(章宮), 태액지(太液池), 장락궁 북쪽, 명광궁(明光宮), 명당(明堂), 벽옹(辟雍)을 선후로 건립했다. 동한 광무제 때 서한의 11릉과 장안 궁실을 수축했다.
한 장안성 3대 궁 중 하나인 장락궁(長樂宮)은 성 동남쪽에 위치하여 둘레가 9킬로미터, 면적이 5제곱킬로미터로 한 장안성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했으며, 궁 내에는 전전(前殿), 선덕전(宣德殿) 등 총 14개의 궁전 대각(臺閣)이 있었다. 미앙궁(未央宮)은 성 서남쪽에 위치하여 시종 한대(漢代)의 정치 중심이었으며 사서에서는 서궁(西宮)이라 칭했다. 그 둘레는 9킬로미터, 면적은 5제곱킬로미터로 성 면적의 7분의 1을 차지했고, 궁 내에는 총 40여 개의 궁전 대각이 있어 매우 장려하고 웅위했다. 건장궁(建章宮)은 일군의 궁전들로 주위가 10여 킬로미터에 달해 “천문만호(千門萬戶)”라 불렸다. 한 장안성은 거대한 규모와 정연한 배치로 도성 발전의 역사에 등재되었으며, 한대(漢代) 이후 비록 몇 개의 소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긴 했으나 장안성은 성한(盛漢) 시기의 광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동한 초기 광무제 유수(劉秀)가 낙양에 도읍을 정한 후, 주대(周代) 성주(成周)성의 기초 위에 더 큰 규모의 도성을 수축하고 확장했으니, 이때부터 이 도시는 동한,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시기 전국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서 3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사학계에서는 이를 대략 “한위낙양고성(漢魏洛陽故城)”이라 일컫는다.
한대(漢代)는 목조 건축을 위주로 했다. 한대의 궁실은 대부분 대사형제(台榭形制 토대 위에 건물을 짓는 형식)였으므로 반드시 누각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가 있어야 했으며, 심지어 성 내외도 비각(飛閣)으로 서로 왕래했다.
목구조 누각(樓閣)의 출현은 중국 목구조 건축 체계가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표지 중 하나다. 동한 중후기의 무덤에서는 많은 화상벽돌, 도자기 누각과 성곽, 수레, 배 모형이 출토되었다. 명기(明器) 중에는 흔히 3, 4층에 달하는 방형(方形) 누각이 있는데, 층마다 공포로 처마를 받치고 그 위에 평좌(平坐)를 두어 누각을 여러 층으로 나누었다. 이와 같이 지붕 처마 위에 난간을 더하는 방법은 전국 시대 청동기에서도 이미 보였는데, 한대(漢代) 목구조에 운용되어 차양, 비가림과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는 요구를 만족시켰다. 각 층의 난간 처마와 평좌가 리듬감 있게 튀어나오고 물러나며 외관을 안정적이면서도 변화가 있게 만들고, 허실과 명암의 대비를 낳아 중국 누각의 특수한 풍격을 창조했다.
일찍이 양한 시기에 이미 ‘궐(闕)’이 출현했다. ‘궐’이란 중국 고대에 성문, 궁전, 사묘(祠廟), 능묘(陵墓) 앞에 관직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나무나 돌로 조각해 쌓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양옆에 각각 하나씩 있어 “쌍궐”이라 칭했고, 하나의 큰 궐 옆에 다시 하나의 작은 궐을 세운 것도 있어 “자모궐(子母闕)”이라 칭했다. 고대에는 ‘결(缺)’ 자와 ‘궐(闕)’ 자가 통용되었으며, 두 궐 사이의 빈 공간을 도로로 삼았다. 궐의 용도는 대문(大門)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성궐(城闕)은 올라가 멀리 바라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궐’을 ‘관(關)’이라 부르기도 했다.
현존하는 한궐은 모두 묘궐(墓闕)이다. 고이궐(高頤闕)은 사천성 아안(雅安)시 성동 한비촌(城東漢碑村)에 위치하며, 현존하는 30기의 한대 석궐 중 비교적 완전한 것 중 하나다. 동한 때 건립되었으며, 동한 익주태수(益州太守) 고이 및 그 동생 고실(高實)의 쌍묘궐의 일부분이다. 고이궐은 붉은색의 단단한 사암 돌로 쌓아 만들었으며, 자궐이 있는 중첨사아식(重簷四阿式) 모방 목조 건축으로 그중 상하 처마 사이의 간격이 매우 긴밀하다. 궐 상부는 기와 형태이며, 용마루 정중앙에는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는 듯 입에 조수(組綬 고대 옥패에 옥을 묶을 때 쓰던 비단 띠)를 문 수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궐 몸체는 돌기단 위에 놓여 있고, 표면에는 기둥과 문미가 새겨져 있으며, 기둥 위에는 두 층의 공포가 있어 처마 벽을 지탱하고 있다. 처마 벽에는 인물과 수레와 말, 날짐승과 길짐승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양한 때의 건축은 이미 우진각, 팔작, 맞배, 모 모음(攢尖)의 네 가지 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우진각은 용마루가 짧고 지붕면, 용마루와 처마선이 평직하며 지붕 용마루 중앙에는 흔히 봉황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상의 것들로 인해 한대 건축의 고박하고 간결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형상이 형성되었다. 대량의 동한 벽화, 화상석, 도자기 집, 석사(石祠) 등을 통해 당시 북방 및 사천 등지의 건축은 대부분 대량식(台梁式 들보식) 가구를 사용했고 간혹 하중을 받는 흙벽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방에서는 관통식(穿鬥架 기둥 인방식) 가구를 사용했고 공포는 이미 대형 건축에서 처마를 내밀 때 흔히 쓰는 부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고대 목가구 건축에서 흔히 쓰는 대량, 관통, 정간(井幹 우물 정자 모양으로 짜서 올라가는 방식)의 세 가지 기본 가구 형식은 이때 이미 형성되었다.
한대의 난간은 와령(臥欞 가로로 건너지르는) 난간, 자촉주(子蜀柱) 난간이 있었고, 주춧돌의 재질은 분별하기 어려우며 양식이 간단했다. 기단은 벽돌이나 벽돌과 돌을 혼합하는 방법으로 쌓아 만들었다. 문은 판문이었고 또 석목문도 있었다. 창의 문양은 직령창(直欞窗), 사격창(斜格窗)과 쇄문창(鎖紋窗)이 있었고 또 천창(天窗)도 있었다. 천장은 부두형 천장과 투사 천장이 있었다. 기둥은 원기둥, 팔각기둥, 사각기둥 등이 있었는데, 어떤 기둥 몸체 표면에는 대나무 문양이나 오목볼록한 홈이 새겨져 있었다. 사각기둥은 기둥 몸체가 굵고 짧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졌고 위에는 노두를 놓았다. 사각형 쌍기둥은 가옥의 모퉁이마다 흔히 면마다 사각기둥을 하나씩 써서 각자 한 방면의 보 가구를 지탱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후대로 갈수록 점차 감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