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280년)
심연(心緣)
【정견망】
한실(漢室)이란 이 연극의 막이 곧 내리려는 순간, 또 하나의 파란만장한 대작이 서막을 열었으니, 이것이 바로 영웅들이 무수히 배출된 삼국시대(三國時代)이다. 당시 제갈(諸葛)이라는 복성에 이름이 량(亮)인 한 영웅 인물이 세상에 나오기 전 천하의 대계(大計)를 논할 때, 이미 천하가 셋으로 나뉠(三分天下) 결말을 정확히 예언했다.
역사의 흐름은 과연 그의 예상과 같았으며,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라는 법칙을 줄곧 검증해 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풍류 인물들이 이 이미 예비된 큰 무대 위에서 마음껏 지모(智謀)를 보여주고, ‘충의(忠義), 인의(仁義), 신의(信義)’를 아낌없이 연기하며 후세에 널리 회자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예컨대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삼고초려(三顧茅廬), 관도대전(官渡之戰),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적벽대전(赤壁之戰), 칠종칠금(七擒七縱) 등이다. 비록 순식간에 삼국의 “시비와 성패는 돌이켜보니 부질없어라”가 되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일들을 모두 웃음 섞인 이야기 속에 부쳐두게” 만들었지만, 천고에 영원히 인멸되지 않는 것은 “멀리 삼국의 일을 바라보니 판 전체가 온통 충의(忠義)로다”라는 점이다.
삼국은 기원후 220년 조위(曹魏)가 한을 대체하면서 시작되어, 265년 진(晉)이 위를 대체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흔히 190년 동탁(董卓)이 한 헌제(漢獻帝)를 협박해 낙양(洛陽)을 떠난 시점을 삼국의 시작으로 삼고, 280년 진이 오(吳)를 멸망시킨 시점을 하한으로 삼는다. 본 편에서 채택한 연도는 위가 정식으로 한을 대체한 때부터 시작해 오가 멸망할 때까지로 잡았다. 위(魏) 이전은 군웅들이 각축하던 시기다.
동한(東漢) 말년의 천하 형세
동한 말년에는 외척과 환관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인해 정치가 매우 어둡고 부패했다. 189년 4월, 한 영제(漢靈帝)가 병으로 죽고 소제(少帝)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하태후(何太后)가 수렴청정을 하고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 시기에 천하는 이미 큰 혼란에 빠져 군웅(群雄)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사회 하층(도축업자) 출신의 하진은 하층 호강(豪強)인 동탁(董卓)에 의지해 환관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환관들이 먼저 사변을 일으켜 하진을 살해했다. 하진의 부하 장수들이 다시 궁궐로 쳐들어가 2,000여 명의 환관을 죽였다. 그리고 하진의 부름에 응해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온 병주목(並州牧) 동탁은 유변의 동생 유협(劉協)을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한 헌제(漢獻帝)다. 동탁은 이때부터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서 천하에 횡포를 부렸고, 동한은 이름만 남는 신세가 되었다.
한 황실의 많은 구신(舊臣)들이 동탁의 악행을 미워해 각지의 주군(州郡)의 수령들이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분분히 거사했고 지방의 호강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동한 말년 혼전의 서막이 정식으로 열렸다. 원소(袁紹)는 ‘4세 5공(四世五公, 4대에 걸쳐 삼공에 오름)’, ‘문생과 고리가 천하에 가득한’ 명문 세가(世家) 출신이었고, 환관 집단을 소멸하는 데 힘을 보탰기 때문에 동탁을 토벌할 때 맹주(盟主)로 추대되어 세 방향에서 낙양을 포위했다. 동탁은 포위를 피하고자 한 헌제를 협박해 낙양에서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192년 4월,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계책을 내어 여포(呂布)와 함께 동탁을 죽이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곧이어 동탁의 부하 장수인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다시 왕윤을 죽이면서 관중(關中)이 큰 혼란에 빠졌다.
동탁이 죽은 후 각 세력 간에 격렬한 혼전이 전개되었다. 한 차례의 혼전(混戰)과 겸병을 거쳐 199년에 이르자, 세력이 가장 큰 중원 지역의 원소가 기주(冀州), 청주(青州), 병주(幷州)를 차지하고 조조(曹操)가 연주(兗州), 예주(豫州)를 차지한 것 외에, 전국의 큰 할거 세력은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을 점거하고, 유표(劉表)가 형주(荊州)를 차지하고, 유장(劉璋)이 익주(益州)를 점거하고, 한수(韓遂)와 마등(馬騰)이 양주(涼州)를 차지했으며, 도겸(陶謙)·유비(劉備)·여포가 차례로 서주(徐州)를 차지했고, 원술(袁術)이 양주(揚州)의 회남(淮南)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 둥지를 트는 등 6~7개 세력만 남게 되었다. 이 세력들 사이에 다시 새로운 각축이 시작되었다.
웅재(雄才) 조조, 북방을 평정하다
할거 세력 간의 혼전 속에서 북방의 원소는 유주(幽州)와 청주의 공손찬(公孫瓚)을 소멸하고 유주, 기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완전히 차지해 북방 최대의 할거 세력이 되었다. 북방에서 그와 각축을 벌일 수 있는 자는 조조뿐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위인이 우유부단하여 조조의 웅재대략(雄才大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고, 결국 조조와의 각축에서 패배했다.
*조조의 신분과 재능
조조는 자가 맹덕(孟德)이며, 지금의 안휘성 박현(亳縣)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조숭(曹嵩)은 동한의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으며, 나중에 관직이 삼공의 하나인 태위(太尉)에 이르렀다.
조조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기민하고 계책을 잘 썼으나, 임협(任俠)을 좋아하고 방탕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양국(梁國)의 교현(橋玄)과 남양(南陽)의 하옹(何顒)만이 조조에게 이상(異相 기이한 관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니 명세지재(命世之才 천명을 받은 뛰어난 인물)가 아니면 이 사회를 구할 수 없을 것이며 천하를 편안하게 할 사람은 아마 자네뿐이네.”라고 말했다.
조조는 스무 살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郎)이 되었고, 낙양 북부위(北部尉)를 맡았다. 낙양 북부위를 맡았을 때 조조는 권귀(權貴)와 호강(豪强)을 두려워하지 않고 금령을 위반한 자들을 일률적으로 오색봉(五色棒)으로 때려죽여, 경성을 진동시키고 호강들이 자취를 감추게 하니 감히 금령을 다시 범하는 자가 없었다. 이후 조조는 영천(潁川)의 황건군(黃巾軍)을 진압한 공로로 제남상(濟南相)으로 승진했다. 그가 부임한 후 권귀에 아부하고 장물을 탐하며 법을 어긴 현급 관리 8명을 파면했고, 또 명령을 내려 사당을 헐고 제사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제남의 사회 풍조가 크게 바뀌었다. 얼마 후 조조는 동군 태수(東郡太守)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탁이 찬역(簒逆)한 후 천하의 군웅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조조는 동탁에 의해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임명되어 경성으로 부름을 받았고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조조는 동탁이 반드시 실패할 것임을 알았기에 고향인 진류(陳留)로 도망쳐 가산을 다 털어 군사를 모집하고 동탁 토벌에 참여했다. 당시 다른 세력들은 동탁의 군대가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가서 공격하지 못했다.
조조는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폭란을 처단하려 대의가 이미 모였거늘, 제군들은 무엇을 의심합니까? 만약 동탁이 산동(山東)에서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왕실을 배경으로 관중과 낙양의 험준함에 의거해 동쪽을 향해 천하에 임한다면, 비록 무도함으로써 행할지라도 오히려 우환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협박해 천도하니 해내(海內)가 진동하고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는바, 이는 하늘이 그를 멸하려는 때입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탁을 공격하러 갔으나 패전하고 산조(酸棗)로 퇴각해 지켰다. 조조는 원소 등에게 신속히 진군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원소는 채택하지 않았다.
이후 조조는 1,000여 명의 잔병을 모아 제북(濟北)에서 청주 황건군 30만 명의 항복을 받아냈고, “그중 정예한 자들을 거두어 청주병(青州兵)이라 불렀다”. 조조의 세력이 장대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동탁은 대신 왕윤에 의해 주살되었다.
196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여남(汝南)과 영천으로 들어가 황건군의 잔당을 진압했다. 같은 해 한 헌제가 장안에서 어렵게 낙양으로 탈출했으나 가난하고 힘이 약해 자립할 수 없었으므로 조조를 낙양으로 불러 호위하게 했다.
조조는 낙양에 온 후 헌제에게 허창(許昌)으로 천도할 것을 권유했고, 마침내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조조는 먼저 정치적으로 우세를 점했다. 다음으로 조조는 경제적으로도 조치를 취해 식량 생산을 촉진했다. 연이은 전란으로 많은 전답이 황무지가 되었다. 조조는 “나라를 안정시키는 기술은 군대를 강하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데 있다. 진(秦)나라 사람은 농사에 힘써 천하를 겸병했고 효무제(孝武帝)는 둔전(屯田)으로써 서역을 안정시켰으니, 이는 선대(先代)의 좋은 본보기이다”라고 생각했다. 이에 먼저 민둔(民屯)과 군둔(軍屯)을 실시했다.
여기서 이른바 ‘민둔’이란 집을 떠나 떠도는 농민을 모집해 황무지를 이용해 둔전하는 것이다. 민둔을 관리하는 최고 기관은 대사농(大司農)이었고, 군(郡) 단위에는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이나 전농교위(典農校尉)를 두었으며, 현(縣) 단위에는 둔전도위(屯田都尉)가 있어 민둔 생산을 직접 지휘했다. 민둔 생산을 직접 지휘하는 자는 둔사마(屯司馬)로 한 둔의 생산자는 대략 50명이었다. 둔전 농민은 주군(州郡)에 속하지 않고 전농의 관할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농부민(典農部民)’ 혹은 ‘둔전객(屯田客)’이라 불렸다. 정부 규정에 따르면 둔전객 중 관청의 소를 사용하는 자는 수확물의 6할을 국가에 바쳤고 소를 쓰지 않는 자는 5할을 바쳤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낙양, 영천, 하내(河內), 남양, 홍농(弘農), 상당(上黨) 등 많은 곳에 민둔 조직이 설치되었다.
민둔이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조는 다시 명령을 내려 군둔을 실시했다. 군둔의 생산자는 주로 병사와 그들의 가족[이른바 ‘사가(士家)’)]이었다. 군둔의 기본 단위는 영(營)이었으며 영당 60명이었다.
이외에도 조조는 수리(水利)를 크게 일으키고 벼 재배를 장려하여 중원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켰으며 군량 문제도 초보적으로 해결했다.
셋째, 인재 등용 면에서 조조는 현명한 인재를 널리 받아들였고 인재를 포용하는 큰 도량을 가졌다. 예컨대 유비가 조조에게 투항해 왔을 때 조조 수하의 모신(謀臣) 정욱(程昱)이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어 오랫동안 사람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니 그를 죽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조조는 “지금은 영웅을 거둘 때이니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마음을 잃는 것은 불가하오”라고 말했다.
넷째, 군기(軍紀)를 정돈했다. 조조는 수하 군사들에게 백성들을 침범하지 못하게 명령했고 명을 어기는 자는 처벌했다. 조조는 몸소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조조의 말이 놀라 백성들의 논밭을 짓밟자, 조조는 머리카락을 대신 잘라 스스로를 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중원에서 기본적으로 발판을 굳혔고, 원소와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 되었다.
* 관도대전: 조조 북방 통일의 전환점
속담에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야심만만하고 세력이 크게 불어난 조조는 북방을 통일하기 위해 자연히 공격 대상을 원소로 지목했다. 조조 수하의 장수들은 원소의 실력이 두터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조조는 “원소는 위인이 뜻은 크나 지혜가 작고, 얼굴빛은 엄하나 담력은 얇으며, 시기심이 많으나 위엄은 적고, 군사는 많으나 군령이 불명하며, 장수는 교만하고 정령은 한결같지 않으니, 토지가 비록 넓고 식량이 비록 풍족할지라도 정녕 나에게 받쳐질 물건이 될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조조의 재능이 이로써 드러난다. 200년, 원소와 조조는 관도(官渡, 지금의 하남 중모中牟 동북)에서 결정적인 대전을 벌였다.
관도대전은 양측의 병력이 현저히 차이가 났다. 원소는 대군 10만 명과 군마 만 필을 가졌으나 조조는 대략 1~2만 명뿐이었다. 원소는 기주, 병주, 청주, 유주의 4개 주를 차지했으나 조조는 연주, 예주의 2주만 차지했다 군대와 물자의 수량 및 후방 역량 면에서 원소는 조조를 훨씬 능가했다.
그러나 조조의 우세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원소보다 민심을 얻었다. 원소는 백성을 대함이 비교적 가혹했으나 조조는 생산 발전에 주의하고 인민에 대한 착취를 경감했다.
둘째, 군대의 전투력이 강했다. 원소는 법령이 엄하지 않아 사기가 진작되지 않았으나 조조는 상벌이 엄명하여 상하가 마음을 같이했다.
셋째, 용인술에서 원소는 친한 사람만 임용했으나 조조는 오직 재능만 보고 천거했다. 이외에도 조조의 비범한 지모(智謀)는 원소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관도대전은 조조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지모를 충분히 보여준 전투였다 처음에 원소가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 선봉이 백마(白馬, 하남 활현滑縣 동쪽)를 포위하자, 조조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을 사용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이어 조조는 자발적으로 관도로 퇴각해 지키며 소수의 군대로 원소의 10만 대군을 저지한 지 반년이 넘었다. 나중에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가 조조에게 투항하며 원소가 군량을 쌓아둔 지점을 알려주었다. 조조가 정병 5,000명을 거느리고 원소 군의 군량 기지를 불태웠다. 원소 군은 군심이 동요하여 전선이 무너졌고 원소는 겨우 800명의 친병만 데리고 하북으로 도망쳤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단숨에 원소의 주력을 소멸하여 북방을 통일하는 기초를 다졌다. 반면 원소는 이 한 차례 전쟁으로 실력이 크게 깎여 2년이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원소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尚)은 자리를 다투며 서로 내분을 일으켰다 조조가 이 기회를 이용해 업성(鄴城)을 공격해 차지하고 원담을 죽여 유주, 기주, 청주, 병주의 4개 주를 차지했다. 원상은 오환왕(烏桓王) 답돈(蹋頓)에게 투항했다.
207년,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노룡새(盧龍塞)로 출정하여 답돈과 원씨 연합군을 대파했다 원상은 다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요동 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조조는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했다.
북방 통일 후의 부국강병 책략
조조는 북방을 통일한 후 일련의 부국강병 책략을 채택했다. 먼저 예의를 일으킬 것을 제창했다.
202년, 조조는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라 군인이 된 장수들 중 전사하여 후대가 끊긴 자들은 그들의 친척을 찾아 후손으로 삼고 전답을 나누어주며, 관청에서 쟁기와 소를 배급하고 학교를 세워 이 영웅들의 후대를 교육하라. 사당을 세워 살아있는 후손들이 조상을 제사 지낼 곳이 있게 하라 죽은 자의 후대를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다면 내가 죽은 후 먼저 간 장수들을 만나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듬해 가을, 조조는 또 명령을 내렸다.
“천하가 혼란에 휩싸인 15년에 어린 자제들이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나는 몹시 안타깝다. 이제부터 군국(郡國)에 명령해 문학을 닦는데 힘쓰도록 하라. 500호가 넘는 현에는 교관(校官)을 설치하고 현에서 뛰어난 인재를 뽑아 가르치게 하라. 이렇게 하면 선왕의 도가 끊어지지 않아 천하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각 군현(郡縣)은 조조의 명령에 따라 교육을 크게 일으켰다. 교육이 흥하니 인재가 일어났고 인재가 일어나니 모든 폐해진 일이 흥했다. 조조의 교육 계획은 위, 촉, 오 삼국의 건립에 인재의 기초를 다져주었다. 다음으로 그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선발했다. 조조는 사람을 쓰는 방면에서 문벌 출신을 중시하지 않는 선발 조치를 더욱 진전시켜 제안했다.
그는 《구현령(求賢令)》에서 “오직 재능만 보고 천거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舉)”라는 용인 원칙을 명확히 제시했다. 조조는 심지어 부하들에게 “오염되고 모욕적인 이름이 있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행동이 있더라도, 혹은 인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더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부리는 기술이 있는 자가 있다면 각자 아는 바를 천거하여 빠뜨림이 없게 하라”고 요구했다.
‘유재시거’의 방침 아래 조조는 “우금(于禁), 악진(樂進)을 군대 진영 사이에서 발탁했고 장료(張遼), 서황(徐晃)을 사로잡은 포로 안에서 취했으니 이들이 모두 천명을 도와 공을 세워 명장이 되었다. 그 외에 미미한 데서 발탁되어 지방 수령에 오른 자는 이루 다 셀 수 없다.”
조조는 ‘치국용병의 술’이 있는 사람을 중용했을 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중용했다. 문관 곽가(郭嘉), 만총(滿寵) 등이 모두 조조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유명한 ‘건안칠자(建安七子)’와 재녀 채문희(蔡文姬)는 모두 조조의 막료였다. 심지어 마음이 유비에게 가 있던 관우(關羽)에 대해서도 조조는 갑절로 아꼈으며 그가 부하 장수들을 벨지라도 원망을 품지 않았다. 많은 재능 있는 선비들이 조조에게 임용되었기 때문에 조조 시기의 정치는 비교적 맑고 깨끗했다.
셋째, 경제를 계속 발전시켰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한 후 사회 질서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많은 유민들이 분분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귀향한 유민들은 일부분은 둔전 농민이 되고 일부분은 호강의 부곡(部曲)이나 전객(佃客)이 된 외에, 더 많은부분은 각지의 자경농(自耕農)이 되었다. 이 자경농들은 자신의 토지와 경제가 있었고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신체의 자유가 더 많았기 때문에 생산 적극성이 비교적 높았다.
조조는 원소의 영지를 점령한 후 백성들이 호강에게 압박받는 고통을 거울삼아 그해의 부세를 취소하도록 명령했다. 204년, 조조는 자경농에 대한 토지세와 가구당 현물 징수령(田租戶調令)을 반포했다 “토지세는 1무당 4승을 거두고 가구당 비단 2필, 솜 2근을 내게 하라.” 이처럼 가구(戶)를 기준으로 면과 견을 징수하는 호조제(戶調制)가 이때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그 징수 방법은 먼저 민가(民家)의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호등(戶等)을 정한 후 호등의 높고 낮음에 따라 많고 적음이 다른 솜과 비단을 배정하는 것인데, 평균적으로 가구당 합하여 비단 2필, 솜 2근이 나왔다. 이 제도는 총체적으로 보자면 동한의 제도보다 다소 진보한 것이었다. 조조는 토지세 호조령을 반포할 때 지방관들이 다시는 가혹한 세금을 함부로 징수하지 못하도록 했고, “강한 백성이 숨기는 바가 있고 약한 백성이 세금을 겸하여 부담하는 것”을 엄금하니 이것이 자경농의 생산을 안정시키는 데 모두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조는 수리 관개 공사를 계속 일으켰다. 예컨대 합비(合肥)에 작피(芍陂), 여피(茹陂), 칠문(七門), 오당(吳塘) 등의 여러 보(堰)를 쌓았는데 그중 칠문보는 1,500경의 논에 물을 댈 수 있었고 작피는 수만 경의 논까지 댈 수 있었다. 관중(關中)에 성국거(成國渠)를 파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3,000여 경의 논에 물을 댄 것 등등이 있다. 하북에 고량하(高粱河)를 소통시키고 여릉알(戾陵遏)을 만들며 차상거(車箱渠)를 파서 400~500리 사이의 만 여 경의 토지를 관개했다. 이 수리 공사들은 북방 농업의 회복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조조가 집권한 기간 농업 생산량이 다소 제고되었다. 비옥한 둔전 토지 위에서 “백전(白田, 가문 땅)은 10여 곡(斛)까지 거두었고 수전(水田 물을 댄 논)은 수십 곡을 거두었다.” 농업이 호전됨에 따라 북방의 수공업도 일부 방면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예컨대 방직업은 양읍(襄邑)의 비단, 조가(朝歌)의 얇은 비단, 청하(清河)의 깁, 상당과 대군(代郡)의 삼베가 모두 생산을 회복하여 유명한 제품이 되었다. 또 제철 수공업은 한기(韓暨)가 제철 기술을 개량하여, 힘이 많이 들고 효율이 낮았던 마배(馬排, 말 동력을 이용한 풀무)와 인배(人排)를 수배(水排, 수력을 이용한 풀무)로 바꾸어 생산 효율을 세 배나 제고시켰다.
북방을 통일하고 실력이 배가된 조조는 전국을 통일할 패업(霸業)을 완수하기 위해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칼날은 먼저 형주를 점령한 유표와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에게 향했다. 이때 조조는 한 헌제에 의해 승상(丞相)에 봉해져 권세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