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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4 금련천에서 인재를 모으고 군사를 지휘해 대리 정벌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만약 “천하에 큰 뜻을 펼치려 한” 쿠빌라이가 막북(漠北)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시절에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많은 명유(名儒)들과의 대담 및 그들의 강의와 질의응답을 통해 유가(儒家) 문화를 이해하고, 어떻게 제왕이 되며,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는지 이해해, ‘유학으로 천하를 다스린다(以儒治天下)’는 생각을 초보적으로 가졌다고 한다면, 금련천(金蓮川) 시기 그의 주변에 형성된 ‘금련천 막부(金蓮川幕府)’는 그가 향후 실천 속에서 ‘한법을 실행(行漢法)’하는 주장을 더욱 강화하게 만들었다. 사서에서는 쿠빌라이에 대해 “성품과 도량이 우아하고 넓으며, 안목이 열려 밝고, 유술(儒術)을 좋아하고, 한인의 의관(衣冠)을 좋아하며, 예절과 양보를 숭상했다”고 전한다.

금련천 막부

막북에서 금련천으로 온 쿠빌라이의 주변에는 막북 시절부터의 몽골인 지지자들과 징소된 한족(漢族) 막료 및 유학자들 외에도, 나중에 징소된 각 민족의 유능한 인재들과 쿠빌라이 곁에서 숙위(宿衛)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이 명유(名儒)와 능사(能士)들이 금련천에 모여 ‘금련천 막부’를 형성했다. 그들은 번부(藩府)를 드나들고 세속을 분주히 뛰어다녔는데, 마치 그 한 송이 한 송이의 금련화(金蓮花)가 서로 이어져 활짝 피어나며 마음속의 재능을 발산하듯, 일대 제왕의 위업을 성취하기 위해 저마다의 역량을 발휘했다. 따라서 이 집단에 대해 우리는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크게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몽골 군사 집단, 술수가(術數家) 집단, 명유 집단, 종려(宗侶, 종교인) 집단, 그리고 왕부(王府) 숙위 집단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유가 사상에 정통하고 동조했으며, 그들이 쿠빌라이에게 건의한 나라를 다스리고 정사를 펴는 이치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중 몇몇 인물은 이미 제2장에서 소개했으므로, 이제 다른 주요 인물들을 소개한다.

◎ 몽골 군사 집단

이들은 대장 바투루[霸突魯]를 우두머리로 하는 몽골 귀족들이다. 칭기스칸 시기, 칭기스칸의 세 동생인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오치긴에게 소속된 왕족들은 영지가 몽골 고원 동쪽의 흥안령(興安嶺) 일대에 있었기에 ‘좌익제왕(左翼諸王)’ 또는 ‘동방삼왕족(東方三王族)’이라 불렸다. 이와 상대되는 ‘우익제왕(右翼諸王)’ 또는 ‘서방삼왕족(西方三王族)’은 칭기스칸의 세 적자인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소속의 왕족을 지칭하며, 그들의 영지는 몽골 고원 서쪽에 있었다.

동방삼왕족의 아래에는 세력을 가졌던 ‘오투하(五投下)’라 불리는 다섯 군사 집단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칭기스칸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인 무칼리 가문 자라이르[札剌兒] 씨족과 칭기스칸의 정처 보르테[孛兒帖]의 가문 옹기라트[弘吉剌] 씨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투루는 무칼리의 손자이며, 쿠빌라이의 정부인 차바이[察必] 역시 옹기라트 씨족 출신이다. 이 다섯 군사 집단은 쿠빌라이를 지지하고 그를 위해 힘을 다했으니, 그들의 우두머리는 군사와 정무에서 쿠빌라이에게 강력한 조력을 제공했으며,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图为柏林国家图书馆所藏的波斯细密画册Diez Albums中的蒙古兵征战场景。(公有领域)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페르시아 세밀화첩 ‘Diez Albums’ 중의 몽골군 정벌 장면. (공유영역)

◎ 술수가 집단

대표적인 인물은 석자총(즉 유병충)이며, 이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 제2장에서 이미 일부 소개한 바 있고, 여기와 향후 편장에서도 다시 언급할 것이다.

뭉케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총은 쿠빌라이에 의해 카라코룸으로 소환되었고, 그는 치국의 도리에 대해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칭기스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취하셨으나(馬上取天下)”,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으니(不可以馬上治)”, 쿠빌라이는 마땅히 옛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것을 본받아 뭉케 대칸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안팎으로 질서가 있어야 하니, 안으로는 재상(宰相)을 임명하여 백관을 이끌고 내정을 다스리게 하고, 밖으로는 대장(大將)을 임명하여 삼군을 통솔함으로써 국토를 안정시켜 안팎이 서로 도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천하가 넓고 안팎의 국사가 많아 소수의 인원으로는 두루 보살피기 어려우므로, 개국공신의 자손들을 골라 경부(京府)와 주현(州縣)에 나누어 보내 구관(舊官)들이 왕법을 준수하는지 감독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관리를 파견해 검찰하게 하여, 잘 다스린 자는 승진시키고 못 한 자는 좌천시켜야 하며, 현령(縣官)을 신중히 골라야 한다고 했다.

세금과 부세에 대해서는 호구(戶口)에 따라 새로이 확정해야 하고, 백관에 대해서는 감독을 실시하고 백성에 대해서는 교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자는 마땅히 나라를 집으로 삼고 백성을 자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라와 백성은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습니다”라는 논점을 제기했다.

옛 제도에 따라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과거 제도를 실시해 선비를 뽑아야 하며, 개국공신의 자손들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게 하여 그중 재능 있는 자를 발탁해 임용해야 한다고 했다. 공자(孔子)는 ‘백왕의 스승(百王之師)’이므로 각지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하고, 그 지역의 명유들을 찾아내어 그들로 하여금 전통 예법에 따라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천하가 넓고 먼 것은 비록 칭기스 대칸의 위엄과 복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역시 천지신명의 보우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통용되는 요력(遼曆)은 부정확하니 새 역법을 제정하여 반포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착수하여 《금사(金史)》를 편찬함으로써 일대(一代) 군신의 업적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사람 때문에 그 말을 버리지 말고 말 때문에 그 사람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不以人廢言,也不以言廢人), 황제 주변의 간신(諫臣)들이 감히 곧은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세밀하게 책략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현명한 군주는 군주(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여 어진 이가 자리에 있게 하고 능력 있는 이가 직무를 맡게 해야 한다고 했다. 사사로이 감옥을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고, 등을 채찍으로 치는 형을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기강이 위에서 바로 서고 법도가 아래에서 행해진다면, 천하는 수고롭지 않아도 다스려질 것이며, 관리는 많을 필요가 없고 오직 청렴하고 유능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렸다고 했다.

쿠빌라이는 자총의 이러한 건의들을 매우 칭찬했고, 훗날 잇달아 채택하였다. 주군(州郡)에서 공자 제례(석전대제)를 회복하고 전조의 의궤를 따르게 한 것, 사람을 보내 명가와 명유를 찾아내고 언로를 크게 열며 옛 예법을 따라 천지신명과 신기(神祇)를 받들어 제사 지냄으로써 천지의 기운을 화창하게 하고 천시(天時)의 운행을 순조롭게 한 것 등이 그러했다.

석자총은 상소에서 공자는 ‘백왕의 스승’이니 마땅히 각지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고 명유를 찾으라고 했다. 그림은 명대 구영(仇英)이 그리고 문징명이 글을 쓴 《공자성적도》 중 〈누누설성도(累累說聖圖)〉. (공유영역)

이 집단의 다른 인물들인 왕순(王恂)과 장문겸(張文謙) 등도 모두 자총이 추천한 인물들로, 술수에 정통한 그들 역시 유가의 대의(大義)에 깊이 통달해 있었다.

왕순은 중산(中山) 당현(唐縣)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왕량(王良)은 천문과 율력에 정통했다. 왕순은 천품이 총명하고 깨달음이 빨라 세 세에 이미 글자를 알았는데, 어머니 유(劉) 씨가 《천자문》을 가르치자 한 번 보고 곧바로 외웠다. 여섯 살에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열세 살에는 《구장산술(九章算術)》을 배워 그 조예가 매우 깊었다. 1249년, 자총이 북상하다가 중산을 지나던 중 왕순을 보고 매우 감탄하여 아꼈다. 자총이 남쪽으로 돌아온 후 왕순은 곧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1253년, 자총이 그를 쿠빌라이에게 추천하자 쿠빌라이는 그를 불러 만 뒤, 훗날의 태자인 진금(真金)의 도반(伴讀)으로 삼게 했다. 그는 진금에게 산술(算術)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치국의 도리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산수는 육예(六藝)의 하나일 뿐이며,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으뜸가는 대사입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가 원조(元朝)를 건립한 후, 본조(本朝)에서 사용하던 역법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여겨 왕순에게 수정을 명했다. 왕순은 다시 허형(許衡)을 천거했고, 그들은 양공의(楊恭懿), 곽수경(郭守敬) 등과 함께 40여 가(家)의 역서를 참고하며 밤낮으로 천상을 관측하고 정밀한 추산을 하여 새로운 역법인 《수시력(授時曆)》을 창제했다.

장문겸은 형주(邢州) 사하(沙河)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기억력이 강했으며 자총과 동문수학하여 역시 ‘술수를 깊이 연구’했다. 자총의 추천으로 쿠빌라이는 1247년에 그를 소견하고 왕부(王府)의 서기(書記)를 맡겼으며, 그는 점차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형주 지역의 문제도 그와 자총이 함께 쿠빌라이에게 어진 관리를 임용하도록 건의하여 비로소 해결된 것이었다. 이 일 이후로 쿠빌라이는 유생들을 더욱 중용하여 정무에 참여하게 했다.

◎ 명유 집단

대표적인 인물은 주로 두묵, 요추, 허형, 왕악, 조벽, 학경(郝經) 등이며, 기타 인물로는 서세륭(徐世隆), 이치(李冶), 유숙(劉肅), 원호문(元好問) 등이 있다. 두묵, 요추, 왕악, 조벽은 앞서 대략 소개된 바 있으며, 쿠빌라이가 이들을 각별히 신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왕악이 추천한 금조(金朝) 학자 서세륭과 이치를 살펴보자. 서세륭은 진주(陳州) 서화(西華, 지금의 하남성 서화현) 사람이다. 스무 살인 금 정대(正大) 4년 진사에 급제해 조정에서 그를 현령으로 임명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아직 나이가 젊고 배운 바가 많지 않으니 서둘러 관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땅히 책을 더 읽어 지식을 더해야 하니 서른 세에 관직에 나가도 늦지 않다”고 했다. 이에 서세륭은 관직을 사양하고 계속 학문에 힘썼다.

123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그는 어머니와 함께 황하를 북쪽으로 건넜는데, 엄실(嚴實)이 그를 초빙해 동평(東平)의 서기관으로 삼았다. 서세륭은 엄실에게 빈곤한 서생들을 거두어 기르도록 권유했고, 이로 인해 많은 명사들이 투항해 왔다. 사서에 따르면, 그는 체구가 크고 흉금이 넓으며 낙천적이고 자상했으며, 전대(前代) 역조(歷朝)의 제도에 익숙했고 특히 법률에 정통하여 억울한 판결을 잘 가려내어 결단했다고 한다.

뭉케가 즉위한 후, 그를 불러 연경로(燕京路)의 과세관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1252년, 쿠빌라이는 일월산(日月山)에서 서세륭을 불러 만나고 운남을 정벌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서세륭은 “맹자(孟子)께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통일할 수 있다(不嗜殺人者能一之)’고 하셨습니다. 군주가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천하를 통일할 수 있거늘, 하물며 저 조그만 서남쪽 모퉁이 땅이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서세륭은 엄실에게 가난한 서생들을 거두어 기르도록 권유했고 많은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림은 청대 원요가 그린 《산수누각도(山水樓閣圖)》 부분. (공유영역)

이치는 진정(真定) 난성(欒城) 사람이다. 금나라 때 진사에 합격하여 고릉현(高陵縣) 주부로 조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다시 지균주(知鈞州)로 개임되었는데, 균주가 몽골군에게 함락된 후 황하를 북으로 건너 흔주(忻州)와 곽주(崞州) 사이를 유랑했다. 쿠빌라이는 그가 현능하다는 명성을 듣고 그를 번저(藩邸)로 초빙했다.

쿠빌라이는 먼저 그에게 당조의 위징과 송조의 조빈(曹彬)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치는 “위징은 충심으로 곧게 말하여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조의 간신(諫臣 간언하는 신하) 중 으뜸입니다. 조빈은 강남(江南)을 칠 때 망령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 방숙(方叔), 조호(召虎)와 필적할 만하며, 한대의 한신(韓信), 팽월(彭越), 위청(衛青), 곽거병(霍去病) 등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인재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이치는 “천하에는 본래 현재(賢才)가 부족하지 않으니, 구하면 얻을 것이요 버리면 잃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는 쿠빌라이가 이미 수많은 유생을 초빙했음을 지적하면서도 “사해(四海)의 넓음에 어찌 이 몇 사람뿐이겠습니까, 대왕께서 성심으로 널리 구하신다면 조정으로 모여들 것입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가 또 어떻게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지 묻자, 이치의 대답은 “제도가 있으면 다스려지고, 실제를 구하면 다스려지며,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면 다스려집니다”라며, “치국의 도리는 법률 제도를 수립하는 것과 기강을 정돈하는 두 가지 조항에 있습니다. 기강은 군신의 관계를 유지하고, 법률은 상벌을 분별합니다. 위로 대소 관리부터 아래로 평민 백성까지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리사욕으로 공익을 해친다면 이것이 바로 법도가 없는 것입니다. 공이 있는 자가 상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모욕을 당하고, 죄가 있는 자가 벌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애를 받는다면 이것이 법도가 없는 것입니다. 법도와 기강이 파괴되면 천하가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요행입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이치는 “혹은 간사한 자가 군주의 곁에 있거나, 혹은 궁중의 부녀자가 권세를 전횡하거나, 혹은 참소와 사악한 말이 있거나 형벌이 부당하거나, 혹은 갑자기 정벌을 일으키려 할 때이니, 다섯 가지 중 반드시 하나에는 해당합니다. 상천(上天)이 군주를 사랑함이 자식을 사랑함과 같으므로 지진으로써 경고를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군주가 되어 “만약 간사함을 분별하고 부녀자가 권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며, 참소와 사악함을 물리치고 형벌을 가볍게 하며 함부로 군사를 쓰지 않아 위로는 천심에 순응하고 아래로는 민의에 부합한다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크게 칭찬하고 채택하였다.

쿠빌라이의 곁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학경이다. 학경의 조적(祖籍)은 노주(路州)이며 나중에 택주(澤州)로 이주했다. 금나라 말기, 온 가족이 하남(河南) 노산으로 피난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아홉 세였으나 사람들이 ‘기재(奇才)’라 불렀다. 금나라가 망한 후 학경의 온 가족은 다시 순천(順天)으로 이주했다. 학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땔나무를 하고 쌀을 사서 연명했으며 밤에는 고생스럽게 공부했다. 이렇게 5년을 보낸 후, 현지의 수장(守將) 장유(張柔)와 가보(賈輔)가 이 소문을 듣고 그를 청하여 상빈(上賓)으로 받들었다. 장 씨와 가 씨 두 가문에는 만 권의 장서가 있었기에 학경은 다행히 박람할 수 있었고,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의 조부의 제자인 원유(元裕)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네 조부와 매우 닮아 재기와 기량이 비범하니 갑절로 노력하거라”고 했다.

쿠빌라이가 금련천에 왕부를 세운 후, 학경을 불러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리를 자문했다. ‘사문(斯文)을 부흥시키고 도리로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겠다’고 결심한 학경은 고금을 널리 인용하여 당시의 폐단을 구제할 수십 조항의 좋은 정책을 헌상했고,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왕부에 머물게 했다.

《画山水.册.卧居山林》

학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땔나무를 하고 밤에는 고독했다. 그림은 무명씨의 《화산수 책·와거산림(臥居山林)》.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 종려 집단

주요 인물은 승려 해운, 태일도교(太一道教)의 대사 소공필(蕭公弼), 그리고 토번 사캬파(薩加派) 승려 파스파(八思巴)다. 이들은 쿠빌라이의 개인적 신앙과 훗날 원나라의 종교 정책 및 토번 통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258년에 주재한 불·도 논쟁에서 쿠빌라이는 비록 불교도 편에 섰으나, 기독교도(네스토리우스파)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깊이 받아 도교 우두머리들에게 과격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불교와 도교 신도들 사이의 충돌을 평정하여, 몽골 귀족과 한족 유생들 양측 모두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 왕부 숙위 집단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모두 왕부의 케식 군 호위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몽골, 색목(色目), 한인 등 서로 다른 민족 출신이었으나 모두 쿠빌라이에게 충성스러웠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염희헌(廉希憲), 코코(闊闊), 하인(賀仁), 동문용(董文用), 동문충(董文忠) 등이 있다.

염희헌은 부루하야(布魯海牙)의 아들로, 자라면서 체구가 풍대하고 거동이 일반 아동과 달랐다. 열아홉 세 때 왕부에 들어와 쿠빌라이를 섬겼고, 쿠빌라이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 그는 특별히 경사를 읽기 좋아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는 마침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쿠빌라이가 갑자기 불러 소견하자, 그는 황급히 책을 품속에 쑤셔 넣었다. 쿠빌라이가 《맹자》 책 속에 무슨 일이 말해져 있는지 묻자, 염희헌은 성선(性善), 의리(義利), 인폭(仁暴) 등을 말하고 있다고 답했다. 쿠빌라이는 그에게 학문이 있다며 그를 ‘염맹자(廉孟子)’라 불렀고, 이로써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염희헌은 활도 잘 쏘아 사람들이 ‘문무전재(文武全才)’라 찬사했다.

1254년, 쿠빌라이가 경조(京兆, 지금의 서안)을 그의 봉지로 얻게 되자 염희헌을 경조선무사(京兆宣撫使)로 임명했다. 경조는 감숙과 사천을 제어하고 여러 왕족의 봉지가 좌우에 분포해 있었으며 경내에 강융(羌戎)이 섞여 살아 다스리기 어려운 땅이라 일컬어졌다. 염희헌은 취임한 후 민간의 질고를 깊이 체찰했고, 허형, 요추 등의 명유들에게 치세의 도리를 청했다. 그는 또 쿠빌라이에게 청하여 허형을 임명해 경조의 학교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근본 대계로 삼았고, 유학자들을 별도의 호적인 유호(儒戶)로 세웠다.

1259년, 쿠빌라이가 악주(鄂州)를 공격하려 할 때, 염희헌은 유생 백여 명을 이끌고 군문(軍門) 밖에 엎드려 절하며 쿠빌라이에게 청하기를, 왕사(王師 왕자의 군대)가 장강을 건넌 후에는 “군중에서 포로가 된 선비들은 관부에서 돈을 내어 속신(贖身)시키고 원적지로 돌려보냄으로써 전하께서 은혜를 널리 베푸심을 보이소서”라고 했다. 쿠빌라이가 이 건의를 채택하였기에 풀려난 유생이 500여 명에 달했다.

쿠빌라이의 ‘금련천 막부’ 구성원 중에는 몽골인, 색목인, 한인 등이 있었으나 모사는 주로 한인 막료가 중심이었으니,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주동적으로 유학을 받아들이고 추상하며 한인의 제도를 흡수한 시작이었다. 이는 또한 원 제국의 건립을 위해 필요한 정책 방략과 관원의 준비를 제공했다. 원(元) 제국 건립 초기에 막부 구성원들은 조정의 주요 역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려낸 정치 청사진을 추진하는 데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정치 청사진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한인의 법(漢法)으로 한인 지역을 다스리되, 기존의 몽골 제도는 한인 지역 등의 선진적인 방식을 참고하여 변통함으로써 남북을 군림하는 형세의 필요에 적응한다는 것이었다.

사서에서는 쿠빌라이가 유학을 숭상하고 한인을 임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도량이 크고 넓어 사람을 알아보고 지혜롭게 임용했으며, 유술(儒術)을 신용해 하(夏, 한 문화)로써 이(夷, 몽골)를 변화시켰고, 기강과 법도를 세워 일대(一代)의 제도로 삼았으니 그 규모가 크고 원대했다.”

반면 군사 방면에서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의 지지와 몽골 통수들의 건의 및 보좌에 더 의존했으니, 특히 좌로제왕(左路諸王)과 ‘오투하(五投下)’ 구성원들이 그러했다.

蒙古士兵雕像

군사 방면에서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의 지지와 몽골 통수들의 건의 및 보좌에 더 의존했다. 그림은 몽골 병사 조각상. (Shutterstock)

대리를 정복하면서 도성 학살을 금지

쿠빌라이가 초기부터 서하를 멸하고 금(金)을 멸하며 남송(南宋)을 치는 전쟁에 참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어릴 때부터 말등 위에서 자라난 쿠빌라이에게 군사적 재능과 군사 지휘 재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252년 6월, 뭉케 칸은 쿠빌라이를 운남 정벌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니, 이는 쿠빌라이가 막남(漠南)을 총괄한 후의 첫 번째 중대한 군사 행동이자 사서에 기록된 그의 첫 번째 독립적인 대규모 군사 행동이었다. 이 해에 쿠빌라이의 나이는 37세였다. 운남을 원정하는 목적은 서남쪽에서 우회하여 남송이 통제하는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을 협공하는 동시에, 남송의 전마(戰馬) 공급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남송의 전마는 장기간 서남쪽 소수민족의 공급에 의존해 왔으며 대리(大理)가 주요 공급 지였다. 이때 서남쪽에 웅거하고 있던 것은 소수민족 중심의 남조국(南詔國), 즉 대리국(大理國)이었으며 당시 중국 영토에 속하지 않았다. 그 국왕 단흥지(段興)]가 나약해 대신(大臣)인 고(高) 씨 형제가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쿠빌라이의 출정을 수종한 금련천 막부 성원 중에는 석자총(釋子聰), 요추(姚樞), 장문겸(張文謙), 염희헌(廉希憲), 하인(賀仁), 동문용(董文用), 동문충(董文忠) 등이 있었다. 출정 전날 밤, 요추는 잔치에서 쿠빌라이에게 남송 대장 조빈(曹彬)이 남당(南唐)을 취할 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튿날, 쿠빌라이는 말안장 위에서 요추를 향해 크게 외쳤다. “그대가 어젯밤에 말한 조빈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할 수 있소, 나는 할 수 있소!” 그러자 요추가 즉시 대답했다. “성인(聖人)의 마음이 이처럼 어질고 현명하시니, 백성들의 행운이자 나라의 복입니다.“

출정한 대군은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듬해 4월 대군은 육반산(六盤山)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여름을 나며 원정을 준비했다. 가을에 대군은 임조(臨洮)를 거쳐 티베트 지역에 들어가 특랄(忒剌, 지금의 사천 송반松潘) 지방에 도착했다. 쿠빌라이는 군대를 세 길로 나누도록 명령했는데, 대장 우량카다이(兀良合台)가 이끄는 몽골 천호군(千戶軍)이 서로군(西路軍)이 되어 색달(色達), 감자(甘孜), 신룡(新龍) 등을 경유하는 동안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운남(雲南) 경내로 진입하니, 많은 현지 부족들이 소문을 듣고 항복해 왔고, 그 선봉은 대리국 북쪽 경계의 중진인 여강(麗江)을 겨냥해 용수관(龍首關)에 도착했다. 우량카다이는 칭기스칸 시기의 유명한 장수인 수부타이의 아들로, 역시 매우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

제왕(諸王) 차호(抄合)와 야지열(也只烈)의 동로군(東路軍)은 천서(川西)의 옛 고갯길을 경유하여 송주(松州)·무주(茂州) 두 주로 진입한 후, 남송의 아주(雅州)·여주(黎州) 외곽을 거쳐 남하했다. 반면 쿠빌라이가 이끄는 중로군(中路軍)은 토번(吐蕃) 동부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지역을 경유하여 진군 속도가 매우 신속했다. 설산(雪山)을 지날 때는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해서 쿠빌라이마저도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 후 대군은 대도하(大渡河)와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잇달아 많은 채책(砦柵, 군사 장애물)을 격파했으며, 대리국에서 400여 리 떨어진 마사(摩娑) 두 부족의 추장이 항복했다. 얼마 후 백만(白蠻) 추장 아타랄(阿塔剌)도 항복했다.

12월, 쿠빌라이 대군은 대리성을 포위했다. 대리성은 점창산(點蒼山)에 기대고 이하(洱海)를 끼고 있어, 만약 견고한 성에 의지해 단단히 지킨다면 공격이 쉽지 않았다. 이미 한 달 전, 쿠빌라이는 옥률술(玉律術), 왕군후(王君侯), 왕감(王鑒) 등을 사신으로 파견해 대리국에 항복을 권유했으나, 권신 고상(高祥)에게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고상에 의해 세 명의 사신이 살해당했다.

막을 수 없는 기세의 몽골 군대에 직면하자, 고상과 그의 동생 고화(高和)는 단흥지(段興智)를 데리고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 몽골 대군은 야음을 틈타 성을 공격해 대리를 함락시켰으며, 쿠빌라이는 동시에 대장 야고발도아(也古拔都兒)에게 군대를 이끌고 고상 등을 추격하도록 파견하여 요주(姚州, 지금의 운남 요안)에서 고상 형제를 베어 죽였고, 단흥지는 선천(善闡, 지금의 곤명)으로 도망치니 대리국은 이렇게 멸망했다. 쿠빌라이는 고상이 ‘충신’이었다는 이유로 명령을 내려 예로서 장사 지내게 했다.

출정한 대군은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듬해 4월 대군은 육반산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여름을 나며 원정을 준비했다. (에포크타임스 제공)

쿠빌라이가 대리성에 진입한 후, 여러 장수들은 대리국이 세 명의 사신을 죽였다는 이유로 성안의 사람들을 몰살하고자 했다. 수종했던 장문겸이 쿠빌라이에게 “이것은 고상 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지 백성들의 죄가 아니니, 청컨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석자총 역시 “천지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왕자(王者)의 신무(神武)는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면서 단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권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옳다고 여겨, 요추에게 비단으로 만든 깃발에 살인 금지[禁殺] 명령을 쓰도록 하고, 전 군대에 통고했을 뿐만 아니라 큰 거리와 작은 골목에 널리 알렸다. 대리성의 백성들은 이로써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도 출발할 때 요추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석자총은 일찍이 대리 전투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천왕(天王)의 호령 번개처럼 신속하니
백 리 장성에 사방이 포위되었네.
용미관 앞에서는 아이들 장난 같고, 호
분의 진영에 코끼리가 위엄에 놀라네.
강토를 넓히는 화살에 대적할 자 없고,
빈 성벽의 오랑캐 우두머리는 어디로 가는가?
남조(南詔)의 강산이 모두 내 소유가 되니,
신민(新民)들의 일월이 다시 빛나는구나.”

天王號令迅如雷,百裏長城四合圍。
龍尾關前兒作戲,虎賁陣上象驚威。
開疆弧矢無人敵,空壁蠻首何處歸?
南詔江山皆我有,新民日月再光輝

1254년 1월 대리국을 정복한 후, 쿠빌라이는 우량카다이에게 군대를 통솔해 수비하며 단흥지 및 아직 항복하지 않은 지역을 추격하도록 남겨두고, 유시중(劉時中)을 선무사(宣撫使)로 삼아 운남을 다스리게 한 뒤 자신은 군대를 돌려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이후에 운남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쿠빌라이의 신임과 내려놓음, 그리고 적절한 조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

이로써 몽골 대제국은 서남방에 영토를 소유하게 되어 “황조(皇朝)를 옷 입히고 화하(華夏 중원)와 같아지게” 되었으니, 그 중요한 의의는 중앙 정권이 운남에 대한 관할권을 회복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남송에 대해 전략적인 우회 포위망을 형성해 훗날 남송을 멸망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쿠빌라이가 정전(征戰) 중에 보여준 군사적 재능은 몽골 군대 내에서 그의 위망(威望)을 높여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여러 제왕과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된 하나의 원인이기도 했다.

훗날 우량카다이가 단흥지를 사로잡았을 때, 몽케 칸은 그를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256년 카라코룸(和林) 황궁에서 그를 접견하고 금부(金符)를 하사했으며, 그를 대리총관(大理總管)으로 임명해 자손 대대로 세습하도록 하고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대왕’을 뜻하는 ‘마하라자(摩訶羅嵯)’라는 이름을 하사해 운남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회유하고 다스리는 것을 돕게 했다. 이 조치는 서남방을 안정시키는 데 유리했다. 이로부터 1382년 운남을 수비하던 원조의 양왕(梁王) 바자라와르미(把匝剌瓦爾密)가 싸움에 패해 자살하고 대리총관 단세(段世)가 패하여 명군(明軍)에 귀순할 때까지, 몽골인이 세운 정권은 운남 지역을 128년 동안 통치했다.

1257년 말, 우량카다이는 군대를 이끌고 운남에서 안남국(安南國, 지금의 베트남)을 공격했으며, 이듬해 안남 국왕은 몽골 대군의 압박으로 인해 몽골의 종주권 지위를 승인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대리 남정은 매우 큰 대가도 치러야 했다. “가는 길에 식량이 없어 행군이 극도로 곤란”했기 때문에 “손실된 말이 무려 40만 필”에 달했으며, 인원의 손실 역시 막대했다.

1304년, 원 정부는 반세기 전 쿠빌라이가 대리를 원정했던 공업을 기념하기 위해, 쿠빌라이가 일찍이 올라가 대리성의 격전을 굽어보았던 점창산 절벽 벽면에 ‘평운남비(平雲南碑 운남을 평정한 비)’를 새겼다.

참고자료:
《新元史》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秘史》
《忽必烈的挑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5/29/n1298494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