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과학기술편
*수학
양진 때 수학가 유휘(劉徽)는 《구장산술주(九章算術注)》와 《해도산경(海島算經)》을 저술했다. 그는 추상적인 수학 개념에 대하여 모두 정확한 주해를 가해 놓았고 설명이 아주 투철했다. 그는 《구장산술주》에서 구(球)의 체적은 구 지름 입방의 16분의 9라고 산출해 냈으며, 동한 장형(張衡)이 구의 체적을 구 지름 입방의 8분의 5라고 계산한 것은 오류가 매우 명백하다고 지적했다.
유휘는 예전 원주율이 너무 조잡하고 오차가 크다고 여겨 “이를 쪼개기를 더욱 미세하게 할수록 잃어버리는 바가 더욱 적어지니, 쪼개고 또 쪼개어 더는 쪼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원주와 일체가 되어 잃어버리는 바가 없게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에 내접하는 정6각형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배수로 변의 수를 증가시켜 내접 정96각형까지 계산해 들어갔다. 면적의 증대로 인해 변의 수가 클수록 내접 정6각형의 면적은 원 면적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는 원주율의 근사치로 3.1416을 얻어내었으나 계속 계산해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유휘는 중국 수학사에서 거의 최초로 ‘극한’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구장산술주》 중에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많은 새로운 연산 방법을 창립했는데, 예전의 연산 방법에 비하여 훨씬 간결하고 신속했다.
조충지(祖沖之, 429년~500년)는 수학, 천문역법, 기계 제조 방면에 모두 큰 공헌을 한 뛰어난 수학가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세계 최초로 원주율의 수치를 소수점 이하 일곱째 자리 숫자까지, 즉 3.1415926과 3.1415927의 사이로 계산해 낸 것이다. 이 성과를 뛰어넘는 성과는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랍의 수학가 알 카시에 의해 이뤄졌다. 알 카시는 조충지보다 거의 천 년이나 늦었다. 유럽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독일인 오토와 네덜란드인 안토니즈가 이 수치를 다시 산출해 내었으니, 그들은 조충지보다 1,100여 년이나 늦었다.
조충지는 또 두 개의 분수를 사용해 원주율을 표시했는데, 하나는 밀률(密率)이라 부르고 하나는 약률(約率)이라 불렀다. 그의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밀률을 ‘조률(祖率)’이라 부릅니다.
[역주: 약률(約率)이란 대략적인 비율이란 뜻으로 22/7은 대략 3.142857이고 밀률(密率)은 정밀한 비율이란 뜻으로 355/113은 대략 3.14159292에 해당한다. 조충지가 원주율을 얼마나 정밀하게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천문학
양진남북조 시기 천문역법 방면에서 가장 큰 성취는 동진의 우희(虞喜)가 ‘세차(歲差)’를 발견한 것이다.
과거 천문학자들은 ‘천주(天周, 태양이 별자리를 한 바퀴 도는 주기)’와 ‘세주(歲周, 태양이 같은 절기로 돌아오는 주기)’를 구분할 줄 몰라 태양이 한 바퀴 운행하는 것(천주)이 바로 ‘세주’라고 생각했다. 우희는 태양이 당해년 동지점으로부터 이듬해 동지점까지 운행할 때 원래의 동지점으로 돌아오지 않고, 매 50년(현대 측정은 71년 8개월)마다 서쪽으로 1도씩 이동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러한 ‘천주’와 ‘세주’의 차이를 바로 ‘세차’라 한다.
조충지는 자신이 직접 관찰해 세차의 존재를 실증했고, 이를 자신이 제정한 《대명력(大明曆)》 에 응용했다. 계산에 따르면 《대명력》은 1년을 365.24281481일로 규정하여 근대 과학이 측량한 일수와 차이가 50초도 되지 않는다.
《대명력》 중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개혁은 윤달을 두는 방법(閏法)에 대해 새로운 조정을 가한 것으로, 이전에 19년마다 7차례 윤달을 두던 것을 391년마다 144차례 윤달을 두는 것으로 고친 것이다. 《대명력》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역법이었으며 당시 통행하던 ‘원가력(元嘉曆)’의 오차를 바로잡았다.
*지리학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는 중국 고대 지리학의 명저로 총 40권이다.
이 책은 한나라 상흠(桑欽)이 지은 지리 명저 《수경(水經)》이라는 책에 주석을 단 것이다. 《수경》이라는 책은 중국의 하류(河流) 수도(水道)를 기술하는데 총 137조가 있었다. 그러나 《수경주》 중에서는 수도가 1,250조로 증가했고 주가 원서의 20배에 달하며 인용한 서적이 많기로는 400여 종에 이르러, 《수경》의 내용을 크게 풍부하게 만들었다. 주석은 수도(水道)를 강령으로 삼아 묘사한 범위가 지리적 정황으로부터 역사적 사적(事跡), 민간 전설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풍부하고 문장이 생동하며 다채롭다.
*농학(農學)
가사협(賈思勰)은 북위의 탁월한 농학가다. 그가 쓴 《제민요술(齊民要術)》이란 책은 당시 중국 농업 과학에 대한 총결로, 이 책을 통해 당시 농업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기재된 내용 중에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으며 어떤 것은 참고로 삼을 수 있다. 《제민요술》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한 부의 농서(農書)다. 전체 92편으로 10권으로 나뉘고 약 11만 자이며, 농예(農藝), 원예(園藝 채소와 과수의 재배), 임목(林木), 목축, 양어(養魚)와 농산물 제조(예컨대 양조, 식품 가공) 및 기타 농업, 수공업 등을 포함하는데 그중 농예와 원예가 중요한 편폭을 차지한다.
이 책은 서주(西周) 이래로 중국이 농업과 수공업 방면에서 이미 획득한 지식과 기술을 총결했다. 농작물의 재배와 식재 방면에서 《제민요술》은 “천시를 따르고 지리를 헤아리면 힘을 적게 쓰고도 성공하는 바가 많다(順天時, 量地利, 則用力少而成功多)는 점을 강조했다.
책 중에는 주요 농작물인 조(粟), 기장(黍), 수수(稷)의 파종 시기를 기재했고, 어떻게 종자를 고르고, 종자를 담그며, 벼(水稻)의 싹을 틔우는지에 대한 기술 및 윤작(돌려짓기)과 혼작(사이짓기)의 경험을 소개해 놓았다. 해당 서적은 땅에 맞추고 때에 맞추는(因地, 因時制宜)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토지의 개량과 경작 기술(밭갈이, 김매기 등) 또한 매우 중시하여, 토양 중에 함유된 적당한 수분을 항상 유지하고 토양의 비옥도를 증강해야 하며 농작물이 양분을 흡수하는 서로 다름을 이용해 작물의 윤작(輪作), 간작(間作), 혼작(混作)과 투작(套作 시간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2가지 이상의 종목을 경작하는 것)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해당 서적에서 제기한 녹비(綠肥) 윤작의 방법은 유럽에서는 19세기 3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실행하기 시작했다. 채소 재배 방면에서는 토지를 고도로 이용해야 하며 생산상 거름을 크게 주고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과수 식재 방면에서는 접붙이기 방법(嫁接法)을 상세히 소개해 놓았다. 가축 사육 방면에서는 먹이를 먹이고 물을 주는 것에 주의했다. 해당 서적 중에는 아직 20여 가지의 술 제조 방법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관련 저작 156종을 인용하여 중국 농학사와 세계 농학사상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계
조충지는 삼국 시대 마균(馬鈞)이 제조한 지남차(指南車)의 모양에 근거하여 다시 지남차를 새로 제조하니 “바퀴가 굴러 돌아가도 변함이 없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한결같았다”라고 했다.
서진 때 어떤 사람이 계리고차(計裏鼓車)를 발명했다. 한 대의 쌍륜(雙輪) 수레 위에 두 명의 나무 인형이 마주 앉아 양손에 북채를 쥐고 가운데에 북 하나를 두었는데, 수레가 1리를 가며 북을 한 번 쳐서 수레가 간 리 수를 지시했다.
서진의 유경의(劉景宜)는 또 우전연마(牛轉連磨, 소가 돌리는 연속 맷돌)를 발명했고, 두예(杜預)는 연기대(連機碓, 연속 디딜방아)와 수전연대마(水轉連碓磨, 물로 돌리는 연동 방아 맷돌)를 발명했다. 조충지는 이 기초 위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수전연대마를 창조했으니, 물방아(水碓)와 물맷돌(水磨)을 결합하여 효율을 더욱 제고시켰다.
*의학
양진남북조 시기의 명의로는 진대(晉代)의 왕숙화(王叔和), 황보밀(皇甫謐), 갈홍(葛洪)과 양나라 때의 도홍경(陶弘景)이 있다.
왕숙화는 서진(西晉)의 태의령(太醫令)으로 그는 맥의 이치에 정통하여 《맥경(脈經)》 10권을 저술했으며, 맥상(脈象)을 24종으로 귀납해 맥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황보밀은 침구(針灸)에 장기가 있어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 12권을 저술했으니 중국 최초의 침구학 전문 저서이다.
갈홍은 《주후졸구방(肘後卒救方)》 3권을 저술하여 당시에 유효했던 많은 처방을 기록해 놓았다.
소량(蕭梁 소씨의 양나라) 때의 도홍경은 갈홍의 《주후졸구방》을 증보하여 《주후백일방(肘後百一方)》을 저술했다. 그는 한대(漢代)부터 전해 내려온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대해 증보를 가해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로 정리해 냈다. 그는 약물의 자연적 속성과 의료적 속성에 따른 분류법을 최초로 창시하여 700여 종의 약물을 크게 7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이러한 분류법은 나중에 중국 고대 약물의 표준 분류법이 되어 계속 연용되고 끊임없이 충실해졌다.
낙양 용문석굴에는 약방동(藥方洞)이 하나 있어 남북조 시기 대량의 약 처방을 보존하고 있다.
약방동은 전체 동굴 깊이가 4.3미터, 너비가 3미터이며 주상(主像)은 일불(一佛), 두 제자(二弟子), 두 보살, 두 역사(力士), 두 사자(獅子)로 북제(北齊) 때 조성되었다.
동굴 입구와 통로 양측에는 140개의 약 처방이 새겨져 있다. 이 약 처방들 중에서 뜸법(炙法)에 속하는 것이 23방, 약물 치료에 속하는 것이 117방이다. 이 석각 약 처방들은 우리나라 고대 의약의 성취를 기록해 놓았다. 의학사 연구에 대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약 처방 중에 언급된 병명으로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이 46종이 있으니, 예컨대 학질(瘧), 반위(反胃), 칠창(漆瘡, 옻독), 심통(心疼), 소갈(消渴, 당뇨), 편신생포(遍身生皰, 전신에 물집이 나는 질환), 오치(五痔 치질), 정창(丁瘡), 실음불어(失音不語, 목이 쉬어 말을 못하는 증상), 온역(溫疫 돌림병), 전광(癲狂 정신질환), 적백리(赤白痢 이질), 소변불통(小便不通) 등이다.
약 처방 중에 ‘주병(疰病)’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바로 결핵을 가리킨다. 고서 중에서 ‘주(疰)’에 대한 해석은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이 다시 이 병을 얻어 기가 서로 주입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기가 서로 주입된다’는 것은 사실 병균의 전염을 가리킨다. 약 처방 중에는 또 ‘멸반방(滅瘢方)’이 있는데 반(瘢)은 북제 시대에 천연두를 일컫는 것이다. 이 언급된 병명들은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및 오관과(五管科 안이비인후과)와 관련이 있다.
약방을 사용하는 방면에서 140개 약 처방 중 훼손이 너무 심한 것을 제외하고 현재 볼 수 있는 바로는 한 가지 약물을 사용한 것이 43방, 두 가지 약물을 사용한 것이 29방, 세 가지 약물을 사용한 것이 10방, 네 가지 약물을 사용한 것이 5방이다. 한두 가지 약물을 사용한 것이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며, 게다가 사용된 약물들은 모두 농촌 생활 속에서 지극히 찾기 쉬운 것들이었다. 이 약 처방들의 제조 방법에는 알약(丸), 가루약(散), 고약(膏), 탕약(湯) 등이 있으며, 투약 방식에는 내복, 겉에 바름, 씻기(洗), 훈증(熏) 등이 있고 또한 침뜸와 훈, 씻기를 병용하는 것도 있다. 돌에 적힌 이 약 처방들은 당시 민간 의약이 이미 풍부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며, 당시 중국의 의약 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음을 설명해 준다.
* 사찰 건축
이 시기에는 불교의 유행에 따라 남북을 무론하고 불교 사찰이 대량으로 건축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중국 건축사상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산서(山西)의 현공사(懸空寺)다.
‘현공사’는 ‘인천북주(人天北柱)’, ‘절새명산(絕塞名山)’으로 찬양받는 북악 항산(恒山) 발치의 금룡(金龍)협곡 양측 취병봉(翠屏峰)의 현애절벽(懸崖峭壁)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하여 양변이 백 미터로 곧추서서 마치 도끼로 쪼개고 칼로 벤 것 같은 절벽인데, 단지 중간에 약간 오목하게 굽은 곳이 있어 현공사는 이 겨우 남아 있는 발 디딜 곳을 파악해 절벽 가운데에, 또한 절벽 위에 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속담에 “평지에서 높은 빌딩이 일어난다”라고 하지만, 현공사는 도리어 그와 반대로 공중에 매달아 사찰을 지었으니(懸空而建) 여기에는 필시 커다란 비밀이 있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현공사는 북위 때 요연(了然)이라는 한 승려가 지은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이미 1,400여 년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비록 수리를 거치고 또 여러 차례 지진을 겪었음에도 전체 구조는 여전히 아무 문제가 없다.
현공사는 “항산을 마주하고 취병봉에 등을 기대었으며, 위로는 위태로운 바위를 머리에 이고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있다. 돌을 뚫어 기초를 삼고 바위에 의지해 집을 일으키니 구조가 위태롭고 험하며 조형이 아주 기이하다”라고 하여 항산 1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현공사의 구조는 정교하고 전체 사찰이 세로 기둥과 가로 보로 지탱되고 있다. 이 중 횡목으로 들보를 삼은 것을 ‘철편담(鐵扁擔)’이라 부르는데, 현지 특산인 철삼나무를 가공하여 사각형의 나무 들보로 만들어 바위 속에 깊숙이 박아 넣은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나무 들보가 오동나무 기름(桐油)에 담가졌기 때문에 부패를 방지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동시에 매 하나의 세로 기둥의 공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기둥들의 위치는 모두 정밀한 계산을 거쳐 전체 현공사를 지탱할 수 있게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어떤 기둥은 하중을 감당 하는 작용을 하고, 어떤 것은 평형을 유지해 누각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데 쓰이며, 어떤 것은 반드시 일정한 중량이 그 위에 가해져야만 비로소 그 지탱 작용을 발휘할 수 있고 만약 텅 비어 아무것도 없으면 그것은 힘을 빌릴 곳이 없게 된다고 한다. 이 기묘한 원리는 현대 과학 이론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먼 곳에서 바라볼 때 사람들은 현공사를 일컬어 “세 가닥 말꼬리 털로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三根馬尾空中吊)”라고 말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