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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존께서는 《전법륜》〈제4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나이에 속인이라면 다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살갗하나 안 다쳤다.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오는데, 만약 그녀가 거기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하자. “아이고, 난 안되겠다. 여기도 다쳤고, 저기도 다쳤다.” 그러면 아마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한 단락의 법(法)을 놓고도 사람마다, 입장이 마다 문제를 바라보는 결과에는 아주 큰 차이가 난다. 똑같은 문제인데 어째서 서로 다른 답안이 도출되는 것일까?

오늘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탁자 위에 병에 든 요구르트가 있었다. 그래서 한 병을 따서 어머니께 마시라고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밥을 배불리 먹어 마실 수 없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어머니께 말했다. “요구르트는 상하기 쉬우니 땄다가 안 마시면 안 좋아요. 안 마시겠다면 제가 가져갈게요.” 어머니도 동의했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 마시고 싶다고 하셨기에 나는 바로 어머니께 건네어 마시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이 문제를 깨달았다.

내가 처음에 요구르트를 가져가려고 생각했던 것은 상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고, 어머니께서 마시면 속이 불편하실까 봐서였다. 나중에 어머니께 드린 것은 어머니께서 마시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선념(善念)에서 비롯된 것이지 나의 탐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악념(惡念)의 각도에서 문제를 본다면, 아마 전혀 다른 대답을 도출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에 요구르트를 땄을 때, 상대방은 내가 고의였다고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따기 전에 어머니께 마시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어머니께 건네어 마시게 한 것도, 어머니께서 마시고 싶어 하기에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건네준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똑같은 문제인데, 기점이 다르면 견해가 완전히 상반된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사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평소에 다른 사람을 볼 때도 혹시 이와 같지 않은가? 혹시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아닌가?

나는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에 또 이런 한 층의 법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자신의 행위는 모두 ‘이유가 있는 것(情有可原)’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모두 ‘용서할 수 없는 것(不可饒恕)’으로 보는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가 우리에게 잘해주지 않을 때, 그것은 아마도 상사의 마음에 불쾌한 일이 있었거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동료, 친구, 부모도 모두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모두 그럴 만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선념(善念)으로 보면 그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악념(惡念)의 기준에서 문제를 본다면, 그들이 비록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화를 우리에게 풀어서는 안 된다고 여길 것이며, 이런 사람은 사귈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여길 것이다.

물론 결과 역시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선념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너무 중하게 보지 않는다면, 결국 상사도 자신의 과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비록 입으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대인 관계 역시 좋아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악념으로 문제를 보고 상사에게 감정이 상해 있다면, 결국 아마 둘 다 상처를 입는 양패구상(兩敗俱傷)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며, 심할 경우에는 강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선악(善惡)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결정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의 정법(正法) 역시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해치는 것을 볼 때, 때로는 상대방이 죄악이 극심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법에 서서 문제를 볼 때, 그것은 아마도 또 다른 견해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존께서는 경문 《각지 설법 12》〈세계 파룬따파의 날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늘 말하는데, 당신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위하고, 위사(爲私)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당신이 한 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 해 보겠는가?”

우리는 진심으로 중생을 대하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진정으로 구제불능인 사람이 아니라면, 선념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많은 중생이 결국 구도(救度)될 것이다. 그들이 구도되는지 여부는 우리의 일념(一念)에 달려 있다.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은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서로 다른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 있지만, 대법제자의 중생 구도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 구도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일념이다.

문득 한 층의 법리를 깨닫고 느낌이 아주 좋아 이를 적어 동수들과 공유하며,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동수들이 바로잡아 주어 공동으로 제고하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