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법을 공부하면서 《전법륜》 제7강을 읽다가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목욕통을 청소하라고 시킨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단번에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새로운 인식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인체가 곧 하나의 “욕(慾)통”이고, 온갖 욕망과 사람 마음은 그 속의 서로 다른 벌레들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예를 하나 들겠다. 석가모니에게는 일찍이 이런 고사(故事)가 있다. 어느 날 석가모니가 목욕을 하려고 삼림 속에서 그의 제자를 불러 목욕통을 청소하라고 했다. 그의 제자가 거기에 가서 보니 목욕통 안에는 벌레가 가득 기어 다니고 있어서 목욕통을 청소하려면 벌레를 죽여야 했다. 제자는 돌아와서 석가모니에게 알렸다. “목욕통 안이 온통 벌레입니다.” 석가모니는 그를 보지도 않고 한마디 했다. “자네는 가서 목욕통을 깨끗이 청소하게.” 이 제자가 목욕통 거기 가서 보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벌레는 죽기 때문에 그는 한 바퀴 돌고는 또다시 돌아와서 석가모니에게 물었다. “사존(師尊)님, 목욕통 안이 온통 벌레여서 만약 손을 대기만 하면 벌레들을 죽이게 됩니다.” 석가모니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청소하라는 것은 목욕통이네.””
예전에 이 부분을 학습할 때 나는 주로 수련 중에서 일을 할 때 인식을 바로잡아야 하며, 자신의 수련 중 득실(得失)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나치게 살생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수련에 손상을 입힐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결국 그것은 개인의 얻고 잃음을 따지는 것이요 여전히 사심(私心)이며, 다만 수련 중의 득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을 때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른 두 글자가 떠올랐다. 바로 “욕(慾)”통이었다.
[역주: 중국어로 목욕의 ‘욕(浴)’과 욕망의 ‘욕(欲 또는 慾, 간자로는 서로 통용됨)’은 발음과 성조가 같아서 서로 의미가 통한다.]
그 순간 내 마음은 거세게 흔들렸다. 한자는 애초에 신이 전한 문자이고, 동음이의어는 의미가 서로 통하는 법이며, 수련 이야기에는 반드시 아주 깊은 수련의 내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내게 목욕통은 어찌 ‘욕(慾)’통이 아니냐고 점화해주신 것이다. 우리 이 인체가 어찌 각종 욕망을 담고 있는 하나의 ‘통’이 아니겠는가?
육신이 있기에 음식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육신이 있기에 남녀 간의 정이 생겼으며, 육신이 있기에 편안함과 안일함을 추구하게 되었고, 육신이 있기에 명(名)·리(利)·정(情) 및 각종 감각의 향수가 생겼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거의 매 순간 온갖 욕망 속에 푹 잠겨 산다. 소위 홍진욕해(紅塵慾海)인바, 바깥 세상, 혹은 수련계에서 말하는 삼계(三界)는 거대한 정의 바다요 욕망의 바다이며 거대한 ‘욕망의 통’이다. 우리를 이곳에 묻는데, 인체(人體)는 고인(古人)이 말한 오행으로 구성된 이 소우주 역시 소형 욕망의 바다이자 소형 “욕(慾)”통이다. 큰 “욕(慾)” 통이 작은 “욕(慾)”통과 서로 통하고 있으니, 그 속에 깊이 빠져 있다면 누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를 일깨워줄 수 있겠는가? 나는 마치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인체가 곧 ‘욕’통이라는 이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련이란 안으로 찾음을 말하고, 심성을 닦을 것을 말하며, 집착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수련이란 사실 매 순간 이 하나의 “욕(慾)통”을 청소하는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청소해야 할 것은 바깥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이며, 자신의 욕망 “벌레”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목욕통 안에 벌레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과거에 줄곧 그것을 단지 하나의 이야기로만 여겼다. 이번에 나는 벌레 그것들이 다른 공간에서 실제로 존재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도교에서 말하는 “삼시(三尸)”란 설명이 떠올랐다.
전통문화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이며, 수련인은 서로 다른 공간에 생명이 존재함을 믿는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은 그들이 도달한 경지 속에서 실제로 보고 실제로 기록한 다른 공간의 광경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하신 이 이야기를 다시 돌아볼 때 내 마음의 충격은 더욱 커진다.
인체는 곧 “욕”통이다. 각종 욕망은 바로 “욕통” 속의 벌레들이다.
《태상삼시중경(太上三尸中經)》 등 도교 전적의 기록에 따르면, 인체 내에는 ‘삼시(三尸)’가 있으며, 또 ‘삼시신(三尸神)’, ‘삼시충(三尸蟲)’이라고도 부른다.
그중, 상시(上尸)의 이름은 팽거(彭倨)이며 머리에 거주하고, 중시(中尸)는 이름이 팽질(彭質)이며 흉복에 거주하며, 하시(下尸)는 이름이 팽교(彭矯)이며 하복에 거주한다.
전적에서는 상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예를 탐하고, 교만하며, 망상을 품게 하고; 중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물을 탐하고, 음식을 탐하며, 성내고 탐욕스러운 정욕을 품게 하고; 하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색을 탐하고, 방종하며, 게으르고 각종 감각적 향락에 빠져들게 한다고 말한다.
나를 더욱 충격받게 한 것은, 《태상삼시중경》에서는 또 삼시충이 사람의 수명이 단축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죽은 후에야 그것들이 비로소 인체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끊임없이 사람이 주색재기(酒色財氣)에 빠져들도록 유도하고,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게 하며, 사람이 업을 짓도록 촉진한다. 경신일(庚申日)을 맞이할 때마다 그것들은 또 하늘로 올라가 사명신(司命神)에게 사람의 과실을 진술하여 사람의 복과 수명을 줄어들게 하므로, 고대 도가에 ‘수경신(守庚申 역주: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고 삼시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지키는 방법)’이란 수련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나는 이것들을 단지 고대 수련 문화 속의 기록으로만 여겼고, 심지어 이것들이 형상적인 비유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법(法)을 공부할 때, 내가 사부님께서 목욕통 속의 벌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다시 보았을 때, 내 마음속에서 문득 강렬한 인식이 하나 생겨났다. 이것, 혹시 바로 다른 공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어떤 광경이 아닐까?
전통문화는 신이 전한 문화이며, 수련인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존재를 믿는다. 그렇다면 고인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은, 그들이 도달한 경지에서 진정으로 보고 기록한 다른 공간의 진실한 광경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를 다시 돌아볼 때 내 마음의 충격은 더욱 커진다.
인체는 바로 ‘욕’통이다. 각종 욕망은 바로 ‘욕탕’ 속의 벌레들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사람이 명예를 쫓게 하고, 이익을 쫓게 하며, 정(情)에 빠져들게 하고, 욕망을 방종하게 하여, 사람이 진정한 자신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끊임없이 업력 속에서 윤회하며, 끊임없이 업을 짓고,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게 만든다.
반면 수련이란 바로 매일 이 욕(慾)통을 청소하는 것이다.
더욱 나를 경각시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이것은 내 생각이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로 진정한 자신인가 하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나올 때 우리는 “나는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이익이 다가올 때 우리는 “나는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을 내려놓지 못할 때 우리는 “나는 정말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욕(慾)통’를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수련이란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임을 느꼈다. 이러한 욕망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은 생명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선량하며, ‘진·선·인(眞·善·忍)’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반면에 온갖 명(名)·리(利)·정(情), 온갖 질투, 원한, 투쟁, 안일, 색욕, 탐욕은 모두 수련 중에서 끊임없이 식별하고, 끊임없이 청소하며, 끊임없이 내려놓아야 할 대상이다. 만약 이러한 집착들을 모두 자신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벌레를 자신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어찌 진정으로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겠는가?
여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속인들에게 문득 깊은 동정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 거대한 욕망의 바다[慾海]에 빠진다. 눈으로 보는 것은 이익이고, 귀로 듣는 것은 칭찬과 비방이며, 신체로 느끼는 것은 편안함과 고통이고, 감정이 겪는 것은 사랑과 미움, 이별이다…… 육신이 처한 환경은 시시때때로 사람의 온갖 욕망을 자극한다.
사람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어려서부터 현대 관념을 받아들여 명리정을 인생의 추구로 삼고, 욕망을 진정한 자신으로 여기니, 자신이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들은 일부러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미혹(迷) 속에 있으면서, 본래 생명의 진정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을 자신으로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세인들이 사소한 이익을 위해 얼굴을 붉히며 다투고, ‘정(情)’이라는 한 글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며, 일시적인 득실로 인해 근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마음속에서 문득 원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연민이 솟아났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단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할 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수련이란 대법(大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씻어내고, 수시로 안으로 찾으며, 수시로 이 ‘욕(慾)통’을 청소하여 진정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생명 본연의 순정(純淨)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내가 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조그마한 개인적 체득일 뿐이다.
어쩌면 끊임없이 법을 공부하고 끊임없이 수련함에 따라,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한마디 한마디의 법과 매 하나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더욱 높은 층차에서 더욱 심원한 내함(內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욕통(浴缸 목욕통)’과 ‘욕통(欲缸 욕망통)’에 대한 깨달음은 또한 나를 더욱 경각시켜 주었다. 수련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단속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자신의 이 ‘욕(慾)통’을 청소하여 어떠한 명·리·정 및 욕망도 진정한 자신으로 여기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