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앞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현종(玄宗) 후기에 이르러 변진(邊鎭)의 군사력이 끊임없이 확대되면서 당의 군사 형세는 원래의 ‘내중외경(內重外輕)’에서 점차 ‘외중외경(外重內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현종이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하고 영토 확장을 좋아한 데서 비롯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병제(府兵制)의 와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병제는 당나라 초기에 시행되기 시작한 병역 제도이다. 부병(府兵)은 갑옷과 무기, 식량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군 복무는 아주 무거운 부담이었다. 균전제(均田制)가 비교적 잘 시행되던 시기에는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 수량의 토지가 있었기에 이러한 병제가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균전제가 점차 해체되면서 농민들은 무거운 병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부병제가 와해된 주된 원인이었다. 게다가 복무하는 군인의 연한이 길고 온갖 학대를 받다 보니, 사람들은 병역을 두려운 길로 여겼다. 부병의 병력 자원이 점차 말라갔던 것이다. 749년(천보 8년)에 이르러 당 정부는 마침내 부병 징발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실질적으로 부병 제도의 폐지를 선언한 것이었다.
부병제를 대체한 것은 모병제(募兵制)였다. 모집한 군인들의 무기와 의복, 식량은 모두 정부에서 지급했으며, 이들은 장기간 복무하는 고용 성격의 직업군인이었다. 이로 인해 당 정부의 군사비 지출이 날로 불어났다.
한편 당 현종이 영토 확장을 추구함에 따라 변진 절도사(節度使)의 군비를 끊임없이 늘려주었고, 절도사의 권력도 계속해서 커졌다. 개원 연간에 변경의 10대 절도사는 ‘그 토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인민도 가졌으며’, 나아가 ‘그 갑병도 가졌고 그 재부(財賦)도 가져’ 정권, 군권, 재권이 한몸에 모여 반할거(半割據) 세력을 형성하였다. 현종 기간에 변경의 주둔군은 전국 총병력의 85% 이상을 차지했다.
당 조정의 부패와 함께 서역에서 당조의 위신도 일락천장(一落千丈)하였고, 국경의 위기는 날로 가중되었다. 국경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조정은 절도사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절도사들로 하여금 교만하고 방자하게 만들었으며, 당연히 중앙정부에 대한 원심력을 날로 키워 마침내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755년, 절도사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은 당 왕조가 쇠락으로 향하는 서막을 열었다.
안사의 난
안사의 난의 원흉은 안록산과 사사명이다. 안록산은 영주(營州)의 잡호(雜胡) 출신이다. 그는 해(奚)족과 거란(契丹)인을 잔혹하게 진압한 덕분에 당 현종의 상을 받아 차례로 평로(平盧), 범양(範陽), 하동(河東) 삼진절도사(三鎭節度使)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이임보(李林甫)와 양귀비(楊貴妃)에게 아첨하는 데 능숙했고, 자신보다 거의 20살이나 어린 양귀비를 ‘양어머니’로 모셨으며, 현종에게 온갖 기이한 보물을 바치며 깊은 총애를 받았다. 당 현종의 눈에 비친 안록산의 지위는 재상과 다름없을 정도여서, 특별히 궁궐을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첨하던 안록산은 야심이 극도로 큰 사람이어서, 현재의 모든 것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장안에 들어가 궁궐을 드나들었던 기회를 이용하여 당 정부의 부패와 허약한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병력을 일으켜 당(唐)을 멸망시키고 일어설 마음을 품게 되었다.
당시 삼진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안록산의 병력은 이미 20만을 넘었는데, 당시 10진의 총병력도 49만을 넘지 않았으며, 중앙 직할 부대 역시 10만에 불과했다. 사서에는 “안록산이 이를 믿고 날로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화근을 품고 장차 반역을 꾀하려 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무기와 군량, 말 등을 비축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그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8천 명의 호인(胡人) 장사들로 이루어진 사병 부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맹장 사사명과 채희덕(蔡希德)을 거느렸다. 술과 여색에 빠져 있던 현종은 안록산의 역심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고, 큰 재앙 코앞에 닥친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이른바 ‘즐거운 천자’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사사명 역시 잡호 출신이다. 그는 장안에 와서 일을 아뢰었다가 현종의 마음에 들어 사명(思明)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사사명은 평로병마사(平盧兵馬使)에 이르렀다.
비록 역사상 어리석은 이는 적지 않았으나, 큰 지혜를 가진 이 또한 드물지 않았다. 태종 시대에 살며 일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로 유명했던 이순풍(李淳風)은 《추배도(推背圖)》에서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일찍이 예언했다.
《추배도》 속 안사의 난에 대한 예언과 역사적 진실
《추배도》 제5상의 그림에는 한 부인이 땅에 무릎을 꿇고 있고, 그 곁에 안장 한 벌과 사서(史書) 한 부가 놓여 있어 ‘안사의 난’을 암시하고 있다.
참(讖)에 가로되:
버들꽃 날리고 촉도는 험하구나
대나무 퉁소(蕭)를 끊어야 비로소 해를 보리니
더는 평안을 의지할 신하가 하나도 없구나
楊花飛 蜀道難
截斷竹蕭方見日
更無一吏賴平安
송(頌)에 가로되:
어양의 북치는 소리 동관을 지나니
이날 군왕이 검산(劍山)으로 행차하시네
목이(木易)가 만약 산 아래 귀신을 만나면
반드시 이곳에서 금환(金環)을 장사 지내리라
漁陽擊鼓過潼關
此日君王幸劍山
木易若逢山下鬼
定於此處葬金環
그럼 지금부터 역사적 사실과 결합해 상세히 해석해 보자.
오랜 기간 준비를 거친 끝에 안록산은 755년(천보 14년) 겨울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양국충(楊國忠)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범양(範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평로·범양·하동 삼진의 군사 15만 명을 이끌고 남하해 당을 공격했다. 당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군사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원 각지도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탓에 많은 군현에 쓸 만한 병사가 없었고 위기 대처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성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문을 열고 맞이했다.
별다른 저지를 받지 않은 안록산은 순식간에 황하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고, 황하를 건넌 후 당군을 연파하며 차례로 진류(陳留), 형양(滎陽), 낙양을 함락시키고 동관(潼關)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거침없이 진격해 장안을 압박해 “어양의 북치는 소리 동관을 지나니(漁陽擊鼓過潼關)”라는 구절에 부합한다.
756년, 안록산은 낙양에서 대연(大燕) 황제라 칭했다. 동관을 지키던 장수 가서한(哥舒翰)은 비록 20만에 가까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임시로 모아 급조한 병력이라 전투력이 부족했다. 현종과 양국충은 가서한을 미덥지 않게 여겨 거듭 환관을 보내 출병을 재촉했다. 그 결과 가서한은 영보(靈寶)에서 안록산과 사사명의 군대에 패하여 전멸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해 6월, 반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당의 수도 장안을 함락시켰다. 장안에 진입한 반군은 무자비하게 약탈을 자행하여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동관이 함락된 후 당 현종 군신 일행은 황급히 도망쳐 촉도(蜀道)로 향했는데, 촉도에는 예로부터 검각(劍閣)이 있어 험준한 산들에 웅장하게 솟아 있으니 이 역시 “이날 군왕이 검산에 행차하시네(此日君王幸劍山)”라는 구절에 들어맞았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현종이 마외파(馬嵬坡, 산서 흥평 서쪽)에 이르렀을 때, 수행하던 장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살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목매어 죽일 것을 강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호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양귀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겨우 38세였고, 이는 “목이(木易)가 만약 산 아래 귀신을 만나면 반드시 이곳에서 금환(金環)을 장사 지내리라(木易若逢山下鬼, 定於此處喪金環)”라는 두 구절에 들어맞는다. ‘목(木)’과 ‘이(易)’를 합치면 ‘양(楊)’ 자가 되고, ‘산(山)’ 자 아래에 ‘귀(鬼)’ 자를 더하면 ‘외(嵬)’ 자가 되니, 즉 양귀비가 마외파에서 죽는다는 뜻이며, 여기서 금환은 양귀비의 태명이다.
한편 참문의 “버들꽃(楊花)”는 귀비 양옥환을 가리키고, 앞의 두 구절은 양귀비가 자결하고 당현종이 촉도에 유배되듯 떠돌았음을 의미한다. “대나무 퉁소(蕭)를 끊어야 비로소 해를 보리니
더는 평안을 의지할 신하가 하나도 없구나(截斷竹簫方見日, 更無一吏賴平安)” 중 “대나무 퉁소를 끊는다(截斷竹簫)”는 것은 당숙종(唐肅宗)을 은근히 가리키는 것으로, 숙종이 나와서 황제가 된 후에야 안사의 난이 평정될 실마리가 생겼으나 관리 중 누구도 당을 평안하게 만들 진정한 버팀목이 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역사적 진실 역시 이와 같았다. 현종이 양귀비를 목매어 죽인 후, 일부 대신과 백성들이 반란군에 맞서 싸워주기를 바랐던 바람을 저버린 채 계속 남쪽으로 도망쳐 마침내 성도(成都)까지 이르렀다. 한편 태자 이형(李亨)은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는 현종과 길을 달리하여 삭방(朔方)으로 달아났고, 영무(靈武, 영하 영무 서남쪽)에서 제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당숙종이며, 연호를 지덕(至德)으로 고치고 현종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렸다.
대당 강산이 위태로워 무너질 지경이었고 멸망할 가능성이 컸다. 바로 이 시기에 충직한 장수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당조 천하를 힘껏 지켜냈다. 예를 들어 대장 과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은 안사의 난 이후 5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하북(河北)에서 영무로 달려와 반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평원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顏真卿)은 1만의 고립된 군사를 이끌고 안록산의 세력권 중심에서 당당하게 ‘대당(大唐)’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비장하게 부하들에게 충심을 밝히며 역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장병들도 깊이 감동했다. 당 현종조차 감탄하며 “하북에는 여전히 조정에 충성하는 이가 있구나”라고 말했다.
반면 안록산과 사사명은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가는 곳마다 방화하고 약탈을 자행한 탓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내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낙양에 주둔하던 안록산은 함부로 포악하게 굴다 신망을 잃었고, 757년 초 아들 안경서(安慶緒)가 매수한 환관에게 살해당했다. 안록산은 거병한 지 14개월 만에 이러한 말로를 맞이했으니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었다. 안경서가 제위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향락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이는 당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추배도》가 이후의 형세를 어떻게 예측했는지 다시 살펴보자. 《추배도》 제6상의 그림에는 성문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수도 장안을 상징한다. 앞의 두 사람은 의장기를 들고 황제를 길 인도하고 있으며, 뒤편의 수레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고 한 사람이 수레를 밀고 있으니, 당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가리킨다.
참(讖)에 가로되:
도읍이 아니면서 도읍이고
황제가 아니면서 황제로다
음매(陰霾)가 이미 물러가니
일월이 다시 빛나네
非都是都
非皇是皇
陰霾既去
日月復光
“비도시도(非都是都)”는 도읍은 황제가 거처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황제가 사천으로 도망쳤으니 사천은 도읍이 아니건만 황제가 그곳에 있음을 이른 것이다. “비황시황(非皇是皇)”은 당현종이 이미 황위를 태자 이형에게 물려주어 이형이 곧 황제이건만 당현종이 여전히 태상황으로 불리고 있음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당숙종이 곽자의, 이광필 등을 기용하여 안록산과 사사명을 거듭 패배시키고 당왕조로 하여금 “일월이 다시 빛나게(日月復光)” 한 것을 가리킨다.
송(頌)에 가로되:
큰 깃발 위풍당당하게 두 수도(兩京)에 세워지고
천자의 수레 오늘 다시 동쪽으로 가네
천지가 다시 만들어지니 인민이 즐거워하고
일이 년 사이에 태평함을 보리라
大幟巍巍樹兩京
輦輿今日又東行
乾坤再造人民樂
一二年來見太平
두 수도란 낙양과 장안을 가리키고, 연여는 황제의 수레이다. 대략적인 의미는 당이 안사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큰 깃발을 다시 양경에 세웠으며, 당 현종이 다시 수레를 타고 사천에서 돌아오게 되었음을 이르는 것이다. 당이 다시 안정되는 것 역시 인민의 행복이건만, 온전한 태평을 보려면 일 년 혹은 이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역사적 진실은 757년 봄, 당나라가 농우(隴右), 하서(河西), 안서(安西), 서역 등지에서 10여 만 명의 군사를 잇달아 차출하고 위구르(回紇)에서 병력 4천 명을 빌려, 숙종이 그 아들 이예(李豫)를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곽자의를 부원수로 삼아 거느리게 한 것이다. 곽자의의 대군이 북풍수(北灃水)의 동쪽에서 반군과 격전하여 당군이 용맹을 떨쳐 적수가 없으니 반군을 격파하고 장안을 수복했다. 곽자의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단숨에 동관, 화음(華陰), 홍농(弘農)을 함락시키고 안경서의 부대를 물리쳐 낙양을 수복했으며, 순식간에 강적을 멸하여 대당의 기치가 다시 장안과 낙양의 성곽에 옛모습처럼 휘날리게 했다.
당 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와 감회가 무량하여 곽자의를 경으로 맞아들이고는, 그를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비록 내 국가이지만, 실로 경이 다시 만든 것이오.”
이 전후로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지방관과 군대도 길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전투들은 반군의 후방을 타격하고 강회(江淮)의 물자 공급로 안전을 보장하여 안사의 난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로 이때 범양에 주둔하며 막강한 병력을 거두고 있던 안록산의 옛 장수 사사명(史思明)이 안경서의 지시에 따르지 않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자신이 관할하는 8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당에 항복했고, 당조(唐朝)는 그를 귀의왕(歸義王)으로 봉하고 범양절도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후, 즉 758년, 사사명이 다시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안경서가 그와 호응하면서 전쟁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10월, 당군(唐軍)은 안경서가 있는 업성(鄴城)을 포위했다. 안경서는 제위를 양보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759년, 사사명이 업성의 포위를 푼 후 안경서를 살해하고 범양에서 대연(大燕) 황제라 칭했다. 반년의 준비를 거쳐 사사명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점령했으며, 형세는 다시 험준해졌다. 761년, 사사명은 이광필이 이끄는 당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몰아 장안으로 진격하던 도중 후계구도에 불만을 품은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했다. 사조의가 낙양에서 제위에 올랐으나 반군 내부가 더욱 분열되면서 이후 당조를 향해 더 이상 공세를 펼칠 힘을 잃었다.
762년, 당나라 궁정에서 정란이 일어나 환관 이보국(李輔國)이 장황후(張皇后)를 죽이자 숙종이 놀라 충격을 받아 죽었다. 이보국은 태자 이예(李豫)를 추대해 즉위하게 했으니 이가 곧 대종(代宗)이다.
대종은 반군의 내란을 틈타 각지의 병마를 모으고 위구르로부터도 병력 일부를 빌려, 아들 이적(李適)을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복고회은(僕固懷恩)을 부원수로 삼아 낙양, 하양(河陽), 정주(鄭州), 변주(汴州) 등 잃었던 땅을 수복하게 했다. 사조의는 하북으로 도망쳤으나 하북의 반란군 장수들은 그가 대세가 기울었음을 보고 잇달아 당에 항복했다. 763년 초, 사조의는 당군의 타격 아래 마침내 압력을 받고 자살했다. 이로써 무려 7년 3개월에 걸친 안사의 난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한편 지덕 2년(757년) 성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숙종이 총애하던 환관 이보국의 이간질을 받아 압력에 의해 태극궁 감로전(甘露殿)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현종은 말년에 우울하고 적막하게 지내다 세상을 떠난 후 태릉(泰陵)에 장사 지냈다.
안사의 난의 영향 —— 쇠약으로 나아가는 당조
안사의 난은 비록 끝났으나 엄청난 파괴를 남겼다. 반란 집단이 할거하던 지역인 황하 유역은 사회 경제가 극심한 파괴를 입었고, 특히 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하남 일대는 “사람의 자취가 끊겨 천리가 쓸쓸했다.” 게다가 빈부격차가 더욱 극심해져서 “부유한 자는 토지가 수만 경에 달하고 가난한 자는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안사의 난 시기에 당조의 군사들이 대부분 내지(內地)로 차출되는 바람에 변경 방어가 허술해졌고, 이 때문에 당조는 대외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공격에서 수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서역과 하롱(河隴) 지역이 잇달아 토번(吐蕃)에게 점령당했고 남방에서도 남조(南詔)의 괴롭힘을 자주 받았다. 안사의 난은 당조의 통일 국면을 깨뜨렸으며, 이후 번진할거(藩鎮割據) 세력은 갈수록 강해지고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당조 중앙의 힘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추배도》 제7상에도 이에 대해 일찍이 예언이 있었다. 제7상의 그림 속 인물은 호복(胡服)을 입고 입에 새의 깃털을 물고 있다. 이는 소수민족인 토번을 은유한다.
참문에서는 말한다. “정절만아목, 산천벌아족. 파객자래, 두령중원곡.”
참(讖)에 가로되:
정절(旌節)이 내 눈에 가득하고
산천이 내 발을 가두었네
관을 부수는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갑자기 중원이 울게 하네
旌節滿我目
山川局我足
破關客乍來
陡令中原哭
“정절(旌節)이 내 눈에 가득하고 산천이 내 발을 가두었네”는 당조가 안사의 난 이후 전국의 번진할거가 너무 많아서 눈을 돌리면 온통 그것뿐임을 뜻하며, 번진이 많아지다 보니 너는 너의 관문이 있고 나는 나의 나루터가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이 구속받게 됨을 이른다. ‘관을 부수는 손님(破關客)’은 토번을 가리키고, 뒤의 두 구절은 토번이 중원 백성들을 한바탕 울부짖게 만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송(頌)에 가로되:
개미 구멍이 예부터 제방을 무너뜨리니
육궁은 깊이 잠기고 꿈은 전혀 다르구나
거듭된 문에 금고(金鼓) 소리 병기(兵氣)를 품었으니
작은 풀이 자라나 입으로 슬피 우네
螻蟻從來足潰堤
六宮深鎖夢全非
重門金鼓含兵氣
小草滋生口吐啼
첫 구절은 개미가 둑을 무너뜨리는 것에 비유하여 번진할거가 이미 당왕조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함을 비유했고,
둘째 구절은 비록 후궁이 깊게 잠겨 있으나 후궁들이 꾼 꿈은 이미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고 하여 후궁들조차 형세가 심각함을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셋째 구절은 황궁 밖에는 북소리가 진동하여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넷째 구절에는 토번이라는 글자가 은연중에 담겨 있으니, “작은 풀이 자라나 입으로 슬피 우네(小草滋生口吐啼)”에서 입(口)에 흙(土)을 더하면 ‘토(吐)’ 자가 되고, 작은 풀이 자란다는 것은 작은 풀이 번성한다는 뜻이니 ‘번(蕃)’ 자가 된다.
말하자면, 안사의 난을 겪은 이후 통일되고 번영하며 강성했던 당조는 이미 쇠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종 이융기(李隆基)야말로 사실상 안사의 난의 원흉이었다. 현종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여덟 글자로 요약할 수 있으니, 바로 “공과 과가 서로 상쇄되고, 흥성과 쇠약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功過相抵,興衰由他)”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