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허(橫河)
【정견뉴스】

2024년 11월 15일, 마스크를 착용한 행인들이 심각한 스모그에 휩싸인 베이징 CCTV 빌딩 앞을 지나고 있다. (Kevin Frayer/Getty Images)
CCTV 다큐멘터리 《장쩌민(江澤民)》은 1999년 7월 20일 전후에 일어난 일들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이 아니라 일련의 음모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무의식적으로 폭로했다.
장쩌민의 개인적 결정: 먼저 죄를 씌운 뒤 증거를 나열
중공 CCTV는 최근 12부작 문헌 다큐멘터리 《장쩌민》을 방영했다. 그중 제7집 ‘풍운본색(風雲本色)’(이하 《장》 편)은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수련생들의 상방(上訪 청원)과 그에 따른 진압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내막을 엿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수만 명의 ‘조직성이 매우 강한 신원 미상의 인원들’이 중난하이(中南海)를 에워쌌으며 관련 부처가 제때 경보를 울리지 않자 장쩌민이 직접 밖으로 나가 살펴봤다고 언급했다. 영화에서는 중앙 610 판공실 주임 왕마오린(王茂林)을 인터뷰했는데, 장쩌민이 그날 밤을 새워 고민하며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보낼 서한을 초안했고, 일부 지역 및 부처의 사상정치와 대중사업이 나약하고 무력하다고 질타하며 각급 특히 고위 영도 간부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큐멘터리는 장쩌민이 이 문제를 “당과 국가의 전도와 운명”에 관련된 것으로 묘사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타격 행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10월 30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결정을 통과시켜 “전면적인 사교(邪教) 단속을 법치 궤도에 진입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물론 이 대목은 1999년 7월 20일부터 시작된 파룬궁에 대한 전방위적 박해가 법치가 아니었으며, 애초부터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결정조차 아니었고 장쩌민 개인의 결정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에 나타난, 장쩌민이 정치국 위원들에게 보낸 서한은 그가 어떠한 조사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결론을 내려버린 것으로, 먼저 죄를 씌운 뒤 증거를 나열하는 전형적인 행태였다.
‘조직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범죄를 구성하는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한 이른바 ‘조직성이 매우 강한 신원 미상의 인원’은 죄를 씌우기 위해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첫째로 ‘조직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둘째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중공이 제정한 법률을 위반한 적이 없다.
법치 사회에서는 오직 범죄 사실만을 보지, ‘조직성이 매우 강하다’와 같은 정치적 주심(誅心, 사심을 억측하여 죄를 씌움)의 말을 따지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법치 사회가 아니다.
만약 조직성이 매우 강하다는 이유로 죄가 성립된다면, 중공 및 그 8대 들러리 정당은 가장 거대한 범죄 조직이 될 것이다. 특히 중공은 조직성이 극도로 강할 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다. 반면 파룬궁은 심지어 회원 명단조차 없으며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로운데, 어찌 조직성이 극도로 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4·25’ 당일 밤의 서한조차도 이러한 비난과 서로 모순된다. 서한 전체가 파룬궁을 지명하고 있다는 것은 애초에 신원 미상의 인물이 전혀 아니었음을 반증하며, “인터넷을 통해 파룬궁의 각 지역 연락망을 신속하게 찾을 수 있다”고 인정한 것 역시 파룬궁이 그 어떤 비밀 결사가 아니라 언제나 공개적이고 투명했음을 보여준다.

1999년 4월 25일, 수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난하이 부근에서 평화적으로 상방했다. (명혜망)
법치가 아닌 정치적 박해 운동
장쩌민은 서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으로 파룬궁을 싸워 이기겠다고 맹세에 가까운 말을 했는데, 이는 애초부터 장쩌민의 눈에 파룬궁이 무슨 위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신(神)에 대한 신앙이 중공 무신론의 이데올로기를 도전한 것으로 비쳤음을 설명해 준다.
《장》 편에서 인터뷰한 왕마오린 역시 이를 증명하는 인물이다. ‘4·25’ 당일 밤의 그 서한 외에도, 장쩌민은 6월 7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그 자리에서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영도소조’의 성립을 선포했다. 왕마오린은 바로 이 소조 산하 판공실의 주임이었고, 이 판공실은 성립된 날짜 때문에 줄여서 ‘610 판공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공 통치하에서는 오직 정치 운동을 발동할 때만 영도소조를 성립할 필요가 있다. 영도소조는 정부 기구가 아니라 당 중앙이다. 마치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하려 할 때 ‘중앙문혁영도소조’를 성립한 것과 같고, 시진핑이 집권한 후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 일련의 중앙 영도소조를 성립한 것과 그 맥락이 같다. 그 본질은 모두 당 또는 당두목(黨魁)이 특정 정치 운동을 위해 구축한 전용 지휘 체계이다.
다큐멘터리가 왕마오린의 직함에 국무원의 명칭을 덧붙인 것은 이것이 당의 정치 운동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박해 과정에서 속임수를 쓰기 위해 중공이 동원한 기만책이다.
중공의 허위 정보 유포: 진압설을 부인하다
중공의 다른 정치 운동과 마찬가지로, 중공은 거의 3개월 동안 은밀히 준비를 진행하는 동시에 허위 정보를 유포했다.
1999년 6월 14일, 즉 중앙 ‘610판공실’이 성립된 지 나흘째 되는 날, 중앙급 나팔수(관영 매체)들은 ‘양판(兩辦, 중공 중앙판공실과 국무원판공실) 신방국’ 책임자의 담화 요점을 보도했다. 이는 진압에 관한 소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어떤 공법을 믿고 수련할 자유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이는 ‘4·25’ 당일 당시 총리 주룽지(朱鎔基)가 파룬궁 수련생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약속 중 하나였다.
양판의 담화와 장쩌민의 내부 연설이 톤이 맞지 않았던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양판이 당과 정부의 권위 있는 기구라는 신분을 내세워 진행 중이던 박해 준비 작업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뿐이다.
짜깁기된 ‘단속’과 엉성한 ‘입법’
《장》 편의 묘사는 파룬궁을 ‘단속’한 것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다루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는 7월 20일 새벽에 시작되었으며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었다. 이틀 뒤인 7월 22일 공표된 민정부와 공안부의 두 부처 통지 역시 법적 근거로 삼을 수 없으며, 기껏해야 부처의 결정에 불과했다. 이 통지는 문맥과 내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이틀 전의 체포를 합법화시켜 줄 수도 없었다.
그중 민정부가 발표한 고시는 이미 그 전 3년 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던 ‘파룬따파 연구회’를 취소한 것이며, 취소한 이유는 민정부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등록하지 않은 것이 불법이라면, 중공이 가장 먼저 취소되어야 할 조직일 것이다. 공안부는 민정부의 고시에 근거하여 ‘6금지(六禁止)’를 발표했고, 특정 조직인 ‘연구회’에 대한 금지령을 모든 파룬궁 수련생과 파룬궁 관련 활동으로 확대하여 파룬궁 수련생을 대규모로 박해하는 ‘근거’로 삼았다.
오랫동안 외부에는 장쩌민이 3개월 만에 파룬궁을 ‘소멸’시키겠다고 독한 말을 남겼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CCTV의 《초점방담(焦點訪談)》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99년 7월 20일부터 2005년까지 파룬궁을 모독하는 프로그램이 총 102편 방영되었다.
1999년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39편이 방영되었고, 그중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43일 동안 무려 30편이 방영되었다. 반면 2000년에는 일 년 통틀어 단 5편으로 급감했으며, 그 후 2001년에 천안문 광장 분신자살 조작 사건을 기획하면서 두 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이것은 중공이 당시 최대 석 달치 선전 자료만을 준비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장쩌민은 명백히 오산했다. 파룬궁의 굴하지 않는 저항은 중공에게 박해받은 역사상 그 어떤 집단보다도 뛰어넘었다. 장쩌민은 이것이 자칫 끝없는 장기 투쟁으로 번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속전속결을 목표로 한 정치 박해였으며,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끊임없이 탄원하러 갔으나 중공 경찰로부터 현장 폭력과 불법 체포를 당했다.(명혜망)
10월 장쩌민 발언 후 인민대가 급히 ‘결정’을 보완했으나 파룬궁은 언급 못해
장기전을 치르려면 법률 조문을 급히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장》 편에서 가볍게 넘어가려 시도한 한 문장, 즉 “같은 해 10월 30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결정을 통과시켜 사교 단속을 전면적인 법치 궤도에 진입시켰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적어도 그 이전의 3개월 넘는 기간 동안에는 법적 근거가 전혀 없었음을 자인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그야말로 제 역할을 다하는 고무도장(지시받는 대로 도장만 찍는 기관) 노릇을 했다.
장쩌민은 전체 박해 과정에서 ‘사교’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10월 25일 프랑스 《피가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사용한 것이었고, 26일 중공의 각 나팔수들은 일제히 1면 톱기사로 장쩌민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그리고 30일, 인대 상무위원회는 급거 소집되어 이른바 《사교를 단속, 방범, 징치(懲治)하는 것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비록 이행조차 불가능한 선전 구호식 결정이었고 파룬궁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지만, 인민대 상무위원회가 중공 법률 체계 내에서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마침내 어떻게든 임시변통이라도 할 수 있는 ‘법’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인민대 역시 가장 짧은 ‘입법’ 기록을 세우게 되었는데, 장쩌민의 발언부터 이른바 ‘반사교법(反邪敎法)’까지 단 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론상으로 인민대 상무위원회가 통과시킨 것은 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이 아니라 ‘결정’이라는 이름을 달았고 파룬궁을 명확히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 점은 서구 언론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되었다. 인대 상무위원회가 ‘입법’을 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인 11월 2일, 《워싱턴 포스트》는 이 이른바 법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론했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평화롭게 명상하는 단체를 강력하게 진압하는 데 필요한 법률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이 정당은 몇 가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라고 명령했다.”
요약: 파룬궁 박해는 완전한 음모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파룬궁은 중국에서 단 한 번도 그 어떤 법률에 의해 ‘단속’된 적이 없다. 사람들의 오해는 전면을 뒤덮은 낙인찍기식 선전과 헷갈리기 쉬운 법률 용어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다.
‘7·22’의 결정은 중공의 두 부처가 발표한 것이라 법이 아니며, 인대의 ‘10·30’ ‘결정’ 역시 파룬궁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 나온 최고인민법원·최고인민검찰원의 사법 해석에서 파룬궁을 언급하긴 했으나 이는 해석이지 법이 아니다. 따라서 법률적인 측면에서 파룬궁은 중국에서 단 한 번도 ‘단속’된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파룬궁 박해가 법치가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로부터 볼 때 파룬궁 박해는 완전히 하나의 음모이며, 법치가 아니라 정치 박해 운동이다. 전국적인 자원을 장악하고 1999년 시점에 이미 집권 50년이 된 정당이 여전히 지하당·혁명당의 사고방식과 행태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27년이 지난 오늘날, 오히려 이러한 음모를 뻔뻔하게 드러내놓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또한 진정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