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에 법을 공부하고 발정념을 하는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시공, 물질, 그리고 의념에 대해 말씀하신 법리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거칠긴 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 이를 글로 써서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부족한 점은 동수들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이 기간에 나는 줄곧 한 가지 문제를 생각했다. 우리가 관(關)을 넘을 때, 혹은 눈앞의 온갖 마난(魔難)이나 심지어 동수 간의 모순에 직면했을 때, 만약 우리가 즉시 완전히 법에 설 수 있고 ‘진념(真念)’이 저절로 나타날 때면, 우리에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바로 이런 속인의 경험, 인정(人情), 인념(人念)이 전혀 없고 아울러 일의 ‘과거 원인’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미시적으로 어떤 우주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
사실 속인 중의 최첨단인 양자역학은 이미 이 시공 신비의 변두리에 닿아 있다. 유명한 물리학의 이중 슬릿 지연 선택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과학계를 놀라게 한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하나의 광자가 발사되어 이중 슬릿을 통과한 후, 과학자들이 ‘바로’ 이 순간 내린 관측 선택이 도리어 이 광자가 ‘과거’에 출발했을 때의 운동 궤적을 반대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관측이 과거의 역사를 역으로 결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속인 과학은 이에 대해 아무리 궁리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련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시공과 물질의 진정한 체현이 아닌가? 과거의 역사는 결코 꽉 막혀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진념(真念)’을 드러내고, 완전히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며, 눈앞의 속인 공간의 가상에 전혀 미혹되지 않을 때, 우리는 사실상 그 저층 시간장(時間場)을 초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이때 우리를 제약하는 것은 과거의 인과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품은 순정한 정념(正念)의 선택이며, 시공을 초월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상(相) 역시 마음에서 생겨나며, 나아가 과거의 인과 궤적이 미시적으러 천지개벽과 같은 재배열이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션윈예술단(神韻藝術團)의 공연을 볼 때 나를 매우 충격받게 했던 한 프로그램, 즉 《양산백과 축영대》를 떠올리게 했다. 속인들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가져온 인식과 역사 기록 속에서, 이것은 본래 뿌리 깊은 비극이었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나비로 화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역사에 이미 정해진 ‘과거의 인과’인 듯하다. 그러나 션윈이 연출한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양산백은 나중에 축영대를 찾아갔고, 그들은 용기와 정의로 그 세속의 혼약을 벗어던져 마침내 행복하고 원만한 삶을 살아가는데 완전히 새로운 결말을 맞이했다.
션윈 무대가 그 가장 순정하고 가장 아름다운 ‘바로잡힌 역사’를 펼쳐 보일 때, 그 자비와 정념의 장(場)은 저층 구세력이 안배한 역사적 인과를 직접 부정했다. 우리가 무대에서 펼쳐진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믿을 때, 이는 마치 양자 실험에서의 관측과 같이 역사의 궤적은 이미 미시적으로 새롭게 배열된 것이다. 과거의 그 후회로 가득 찼던 버전은 부정되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신우주 표준에 부합하는 완전히 새로운 과거와 결말이었다.
그러나 실제 수련 속에서 우리는 종종 많은 동수들이, 나 자신을 포함하여,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속인의 그러한 선형적 인과 사유라는 방식에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이렇기 때문에 저렇다.”
“그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찌어찌할 것이다.”
혹은 관을 넘을 때 속인의 심리학으로 수련을 가늠하며 “과거의 가정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 성격이 어떠어떠하다.”
“과거의 박해나 갈등 속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 후유증이 남았다”…… 등등.
동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구세력의 안배를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 마음을 사용해 ‘과거의 가상’에 에너지를 충실케 하며 도리어 그 마난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속인의 양자 실험조차도 ‘지금의 관측이 과거의 궤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면, 하물며 우리 대법제자로서 어째서 여전히 사람 마음으로 자신의 ‘현재’를 ‘과거의 그림자’와 불확실성 속에 단단히 묶어두려 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에서 명확하게 개시(開示)하셨다.
“물론 구세력이 배치한 이 일체를 우리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나, 이 사부가 승인하지 않으므로 대법제자도 당연히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러나 그것들은 필경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였는데, 대법제자는 더욱 마땅히 더 잘해야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수련 중에서 마난(魔難)에 부딪힐 때 자신을 닦아야 하고 자신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구세력이 배치한 마난과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할 것인지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구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 그것들이 최후로 발악하는 표현을 나와 대법제자들은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사부님의 이 설법을 다시 음미하면서, 나는 구세력이 연화(演化)해 낸 온갖 소위 ‘과거의 원인’, ‘역사의 인과’, 그리고 우리의 사람의 관념, 상처 받은 기억들이 본질적으로 모두 승인받지 못할 가상임을 더욱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늘 “과거가 어떠했기 때문에 현재에 비로소 이런 마난을 만났다”고 늘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구세력이 안배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할 것인가’라는 틀 속에 떨어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시공의 구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고층차의 신이 우리 이 공간을 볼 때는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는 늘 속인의 선형적 사유로 시간을 이해하여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수련인의 ‘이 순간’의 일념(一念)이 충분히 순정하고, 하늘을 딛고 홀로 우뚝 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할 때면, 우주 중에서 우리와 대응하는 방대한 천체와 역사 과정이 바로 이 순정한 일념에 부합하기 위해 재조합된다는 것을 체득했다.
우리가 과거 상처받은 경험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원생(原生 원초적) 가정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으며, 아주 순수하게 법에 동화되고, 지금 이 순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해 주신 것이 모두 가장 좋은 것임을 온전히 믿는다면, 과거의 모든 부정확한 상태는 미시적으로 우리가 지닌 이 견정한 일념에 따라 재조합을 일으켜 법에 의해 동화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련인이 ‘이 순간’ 구세력 자체의 출현조차 승인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그것들을 부정하며,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바른길을 잘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상처, 과거의 은원(恩怨), 심지어 생생세세 쌓아온 업력조차도 우리의 이 누락 없는 ‘이 순간 정념’ 앞에서 모두 끌어당기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온전히 법 위에 설 때, 과거의 역사는 정법 속에서 이미 새롭게 깨끗이 씻겨지고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유 방식을 가질 수 있고 속인의 인과 틀을 뛰어넘는다면,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고 박해를 반대하는 중에서 아주 순수하게 대법제자의 자비와 위엄으로 눈앞의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며, 환경과 역사 역시 우리의 염두에 따라 근본적인 전변(轉變)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동수 여러분, 우리의 정념이 갈수록 순수해지고, 생명이 갈수록 법에 동화됨에 따라 우리는 구우주의 인과 틀을 뛰어넘게 된다. 나는 종종 한 가지 깊은 체득을 하는데, 우리가 최후 원만에 이르렀을 때, 아마 과거를 돌아보면 깜짝 놀라는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알고 보니 구세력은 애초 나타난 적조차 없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것들의 존재조차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우주의 순진(純真)한 본질 속에는 애초부터 변이와 패괴(敗壞)가 없었으며, 모든 것이 대법 법광이 널리 비치는 아래 최초이자 또한 가장 영원한 원만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상은 개인의 수련 속에서의 작은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동수들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