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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의 실체》 1: 위조된 장쩌민

제1장 “부도덕한 인생 내력” 제1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장쩌민(江澤民)은 남성으로, 현재(역주: 2012년 기준) 80대이며 중국 장쑤성(江蘇省_ 양저우시(揚州市) 출신이다. 1989년 6월 4일 중국공산당이 베이징에서 총기를 동원해 학생 운동을 진압한 후, 장쩌민은 중공 중앙총서기로 임명되며 6.4 학살 사건의 최대 정치적 수혜자가 되었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2005년 이후 퇴진 압력을 받고 막후로 물러났다.

장쩌민과 접촉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다시피, 지극히 저속한 몇 가지 특징들이 서로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하듯 그의 몸에 뚜렷이 나타난다.

1. 탐욕. 욕심이 너무 커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돈과 권력에 있어서 “소리 없이 큰돈을 번다(悶聲發大財)”는 것이 그의 유명한 구호다.

2. 무능.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바른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지방 단위의 말단 과장만도 못하다.

3. 질투. 속이 너무 좁아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질투로 인해 아무것도 용인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며 미치광이 같은 짓을 벌인다. 소인이 사람을 다스리고, 아첨하며, 시류에 편승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데는 모두 능숙하다.

4. 광기. 정치적 쇼를 벌일 때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아끼지 않고, 이성을 잃었을 때는 마귀와 다름없다.

5. 쥐 꼬리만한 담력. 겁이 너무 많아 피비린내 나는 죗값을 치를까 두려워하며, 억지로 높은 자리에 오랫동안 버티며 감히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놓지 못하고 있다.

제1절 위조된 장쩌민

장쩌민이 집권한 15년 동안 중국 내 가짜와 불량 품목의 범람은 역사상 유례 없는 경지에 달했으며, 온갖 가짜가 전국을 가득 채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가 장쩌민 치세의 커다란 특징이 되었다. 이 가짜 시대를 이끈 것은 바로 정교하게 위조된 장쩌민 자신이었다.

위조된 가족 배경

중공은 출신 성분을 매우 따지지만, 장쩌민은 자신의 부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집권 후 아예 중공 당원인 장상칭(江上青)을 부친으로 위조했다. 장쩌민의 친부인 장스쥔(江世俊)은 1895년에 태어나 1917년에 창립된 난통퉁밍(南通通明) 전기회사에서 근무했다. 1938년 장스쥔은 장쑤의 한간(漢奸 매국노) 조직인 ‘평화구국회’에 가담했고, 난징 함락 후에는 ‘난징임시유지회’에 복무하며 일본군을 위해 일했다.

1940년 3월, 일본의 하수인인 왕징웨이(汪精衛) 괴뢰 정부가 난징에 수립되자 선전을 아주 중시한 그들은 행정원 산하에 선전부를 설치하고 린바이성(林柏生)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1940년 11월, 장스쥔은 선전부 부부장(副部長 차관) 겸 논설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왕징웨이 괴뢰 정부 직속 간행물인 《중화일보(中華日報)》의 주필이자 당시 가장 저명한 한간 작가 중 한 명이었던 후란청(胡蘭成) 휘하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후란청은 국민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아 일본으로 도피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역사의 소용돌이》라는 소설을 집필하며 함께 일했던 장스쥔을 특별히 언급했다. 1942년 후란청은 장스쥔 등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건너가 괴뢰 자치정부 문화부와 ‘평화구국문화공진대계’를 논의했다.

괴뢰정부 선전부의 업무 중점은 자국민에 대한 노예화 교육을 강화하고, 일본군의 침략 및 난징 대학살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난징 시민들이 ‘적성 방송’을 청취하는 것을 엄금했으며, 일본 괴뢰 정부 관할 지역의 신문과 잡지에 대해 엄격한 관리와 감시를 시행했다. 그 소속 간행물들은 선전 방침에서 일본군과 보조를 맞추었다. 1941년 일본군은 자신들이 통제하던 난징 방송국을 괴뢰정부에 이양하고 이름을 중앙(中央)방송국으로 개칭했다. 장스쥔은 선전부에서의 뛰어난 업무 성과로 일본 육군 대본영(大本營)으로부터 거듭 상을 받았다.

장쩌민은 자신이 중공 당원인 장상칭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칭하며, 자신의 한간 부친의 진정한 가족 배경을 애써 은폐했다.

출생 연도 문제

중공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식 발표된 장쩌민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1926년 8월 17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세 차례 수정 및 증보된 《난징 중앙대학(1940~1945) 동문 주소록》에 기록에 따르면, 장쩌민은 1942년에 친일 괴뢰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했다.

민국 17년(1928년) 국민정부가 공포한 ‘무진학제(戊辰學制)’에 따르면 소학교는 초등 4년, 고등 2년으로 초등학교 입학 연령은 만 6세였으며, 중학교는 전기 3년, 후기 3년이었다. 만약 장쩌민이 1926년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4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셈이 되며, 이는 당시 규정된 6세 입학 연령과 2년의 차이가 난다.

장쩌민은 자신의 인생 중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많은 손을 댔는데,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그가 1942년에 일본군을 위해 특공대를 양성하던 청년간부훈련반에 참가했던 역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애국 학생으로 위조

1939년 9월, 일본군은 난징에 ‘일본 황군(皇軍) 지나(支那) 파견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0년부터 그들은 난징, 베이징,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우한, 광저우 등 7개 대도시에서 일본군에게 충성하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난징으로 보냈고, 괴뢰 중앙대학을 설립해 학생들에게 수업료, 잡비, 기숙사비를 전액 면제해 주었다. 심지어 적지 않은 학생들은 밥값조차 내지 않았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장학금, 보조금, 근로장학 제도 등 학업 지원 조치가 있었다. 괴뢰 중앙대학은 고급 한간을 양성하고 일본 황국신민화 교육을 시행하는 최고의 중앙 학부가 되었다.

장쩌민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양저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장두(江都)현립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그는 부친의 인맥을 이용해 양저우 중학교로 편입했다. 1942년 장쩌민은 괴뢰 중앙대학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들어갔다. 1989년 7월 여러 차례 대조를 거친 뒤 복사된 《난징 중앙대학(1940~1945) 동문 주소록》 제42페이지에는 장쩌민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가 “42년 휴학”했다고 적혀 있다. 즉 1942년 장쩌민은 해당 대학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학생이었다. 세 차례나 수정된 주소록인 만큼 오류가 있을 리 없으며, 특히 장쩌민 같은 특급 인물에게는 더욱 그렇다. 상기 주소록의 속표지 및 그 다음 페이지에는 오선보로 된 교가가 인쇄되어 있는데, 가사 중에는 “무기를 영원히 거두어들이고, 글 읽고 시 읊는 소리를 숭상한다.(干戈永戢,弦诵是崇)” 등의 문구가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장쩌민이 대학 시절 불렀던, “영원히 무기를 내려놓고 황도(皇道)의 낙원을 함께 찬양한다”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교가였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육군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휘하에는 유능한 조수이자 일본군 간첩 두목인 딩모춘(丁默邨)이 있었다. 딩모춘은 일찍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1932년 국민당으로 적을 옮겼고, 1938년 상하이에 잠입해 상하이 기스필드 로 76호에 ‘특공총부(特工總部)’를 설립했다. 딩모춘과 리스췬(李士群)이 각각 정·부주임을 맡았다. 리스췬은 1924년 중공에 가입했고, 1927년 4월 중공의 지령을 받아 소련으로 건너가 ‘특수공작’ 훈련을 받았으며, 1928년 말 상하이로 돌아와 중공 ‘특과(特科)’에서 일했다. 1938년 리스췬은 침략 일본군에 투항했다.

딩모춘은 새로운 학교 부지를 물색해 괴뢰 중앙대학을 재건하기 전에, 일본군이 세운 대학이 항일 인사를 배출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특무(特務)인 ‘직업 학생’을 그 속에 섞어 넣어 항일 사상과 행동을 감시하고, 조금의 단서라도 일찍 발견해 체포·소멸하고자 했다. 이에 딩모춘은 괴뢰 중앙대학 청년간부훈련반을 창설하고 침략 일본군의 경험을 흡수하여 괴뢰정부 고급 관료의 자제들 중에서 새싹을 골라 어릴 때부터 양성했다.

딩모춘은 총 4기의 청년간부훈련을 운영했으며, 기수별로 인원은 달랐다. 아들이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 장스쥔은 오직 특수공작 인원의 신분만이 침략 일본군의 신임과 중용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아들이 특별한 재주가 있고 자신을 은폐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장쩌민은 제4기 훈련에 참가했다. 간부훈련반은 중앙대학의 명의로 운영되었으며 관련 전공 교수 및 특무를 겸임 교수로 초빙했고, 기수가 끝날 때마다 곧바로 중앙대학에 편입시켰다. 이 청년간부훈련반의 구성원들은 침략 일본군이 패망한 후 사방으로 도망쳐 흩어졌다. 중공의 수중에 떨어진 자들은 모두 보안부문의 비정규 교원이 되어 주기적으로 보안 간부들에게 강의를 했다.

2003년 10월,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제보자들에게 한 장의 사진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사진의 제목은 《리스췬과 장쩌민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1942년 6월에 촬영된 것이었다. 이 사진의 목격자는 리스췬이 괴뢰 중앙대학 청년비밀간부훈련반 제4기 멤버를 접견했을 당시 총 23명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지적했다. 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바로 장쩌민이었다. 리스췬과 청년간부훈련반에서 함께 찍은 사진은 장쩌민이 한간 특무 출신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물증이자, 떨쳐버릴 수 없는 악몽이 되었다. 장쩌민이 받은 일본 괴뢰의 특수공작 훈련과 자신을 감추는 데 극도로 능숙한 특수 재능은 훗날 그가 국민정부의 처벌과 중공 역대 정치운동의 사정을 피해 가도록 도와주었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 이후 대중에 대한 마약화 정책을 시행해 1938년 4월 화중홍제선당(華中宏濟善堂)을 설립하고 왕징웨이 괴뢰 관할 구역 내의 아편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그것의 수입 상황에 대해서는 난징 정부조차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격전을 치르는 동안 일본군은 연이은 좌절을 맛보았다. 1943년 4월 18일 일본 해군 통수권자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가 공중전에서 격살되었다. 1943년 말, 기세가 한풀 꺾인 일본 정부는 이른바 ‘대중(對中) 외교 신정책’을 발표하며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겠다고 표명했고, 왕징웨이 괴뢰정부를 붙잡아두고자 했다. 당시 왕징웨이 선전부 부장 린바이성은 이 기회를 이용해 대중의 마약에 대한 적개 심리를 활용하여 아편 공매권(公賣權)을 되찾고자 했다.

1943년 겨울, 린바이성은 부하를 통해 괴뢰 중앙대학에서 리언위(厲恩虞), 왕자모(王嘉謨) 등 학생 간부를 찾아내어 아편 소탕 운동을 일으키도록 사주했다. 리언위와 왕자모는 모두 중공의 비밀 단체 ‘청년구국사(青年救國社)’ 멤버였으며, 두 사람은 즉시 당시 중공 난징 공작위위원회 서기인 수청(舒誠)에게 보고했다. 수청은 아편 소탕 운동은 린바이성을 엄폐물로 이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린바이성에 의해 이용당해서는 안 되며, 은폐에 주의하여 노출을 피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1943년 12월 17일 저녁, 리언위와 왕자모는 200여 명의 학생을 동원해 부자묘(夫子廟)의 아편굴을 소탕했다. 아편굴을 습격할 때 왕자모는 일본 헌병 의해 머리를 칼로 베였으며, 나중에 학생들이 린바이성의 간판을 들고 나와서야 더 큰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이튿날 리언위와 왕자모 두 사람은 더욱 큰 규모의 아편굴 소탕 활동을 발동했다. 장쩌민의 부친은 왕징웨이 괴뢰정부의 고위 관료로서 린바이성의 행동에 협조하여 자기 아들이 침략 일본군과 아편 공매권을 다투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그래서 장쩌민은 이번 아편굴 소탕 활동에서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장쩌민은 집권 후 괴뢰정부를 위해 복무했던 이 역사를 중공 지하당이 지도한 ‘애국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위조했다. 중공 신화망의 장쩌민에 대한 이력에서는 “1943년부터 지하당이 지도한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고 되어 있다. 쿤의 《장쩌민 전》은 무려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해 ‘나는 애국자다’라는 제목으로 장쩌민이 아편굴로 돌진하는 온갖 세부 사항을 묘사했다.

당시 일본군의 피비린내 나는 통치 하에서 점령지에서는 어떠한 공개적인 반일 학생 운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공개적인 반일 활동은 일제 괴뢰 당국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쩌민의 부친이 괴뢰정부의 고위 관료였으며, 괴뢰정부는 철저히 반공적이었기에 그의 부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가 공산당이 지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용인할 리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장쩌민의 ‘영광스러운’ 역사였다면, 한간 가정에 반역한 장쩌민이 과시하기 좋아하는 광대 본성으로 도처에서 이미 엄청나게 떠벌렸을 것이다.

큰의 《장쩌민 전》에서는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공부하는 동안 각종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고 언급했다. 상하이의 한 퇴직 군 간부이자 당시 중공 상하이 지하당원이었던 후쑤오밍(胡鎖明)의 증언에 따르면, 상하이교통대 중공 지하당 조직 활동을 할 때 장쩌민이 참여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45년 9월 3일 일본이 전쟁에 패배해 항복하면서 왕징웨이 괴뢰정부가 붕괴했다. 1946년 3월 13일 국민정부는 수정 공포된 《한간처벌조례》를 당일 시행했고, 한간 장스쥔은 국민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국민정부는 1945년 9월 난징을 수복한 후 그달 26일 《중등 이상 학교 학생의 신원 확인 및 선별에 관한 회복 방법(收復中等以上學校學生甄別辦法)》을 공포하여, 일본의 중국 침략 기간 중 일본 점령지 내에서 일제 괴뢰가 장악한 공립 대학 전문학부 이상의 재학생인 괴뢰 학생들에 대해 심사를 거쳤다. 어떤 학생이 일단 한간 조직에 가입했거나 한간 죄행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곧바로 적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한간 죄로 체포하여 법에 회부했다.

그해 10월 국민정부 교육부는 상하이교통대학, 충칭교통대학, 난징중앙대학 세 학교를 하나로 합병하여 교지를 상하이 쉬자후이에 있는 상하이교통대로 정하고, 난징중앙대학, 상하이교대 등 6개 대학을 한간 괴뢰 학교로 지정해 재학생들에 대해 신원 판별 처리를 진행했다.

장쩌민은 왕징웨이 괴뢰정부의 고관 자제인 데다 한간 대학에서 수학했고 한간 혐의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민정부의 추적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이리저리 숨어 다니던 장쩌민은 나중에는 장시성 융신현의 어느 외딴 시골 마을인 몐화핑(棉花坪)으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그의 거짓말을 믿은 어느 마음씨 좋은 농부의 보살핌을 받아 그 집에서 반년 동안 숨어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국민정부는 장쩌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중공 상하이 지하당 학생위원회는 광범위한 학생들이 국민정부의 괴뢰 학생 신원 판별에 대해 품은 불만족 감정을 보고 시내 6개 대학의 학생들을 발동해 상하이학생연합회를 결성했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3월까지 7차례의 학생 거리 시위 행진, 8차례의 청원, 여러 차례의 중국 및 외신 기자회견을 조직했다. 난징, 베이징 등지에서 괴뢰 학교로 지목된 학생들도 현지 중공 지하당의 지도와 선동 아래 잇달아 시위를 일으키며 국민정부에 한간 괴뢰 학생에 대한 심사 판별을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국민정부는 전후 정국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일본 패전 후의 수복 업무로 바빴기 때문에, 압력에 밀려 결국 한간 괴뢰 학생 심사를 취소하는 데 동의했다.

장시성에서 피난 중이던 장쩌민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알고 장시성 융신현 몐화핑을 떠나 상하이교통대학로 향했다. 떠날 때 장쩌민은 자신을 거두어준 농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그 농부의 낡은 의학 서점에 훗날 출세하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서명까지 하며 절대로 식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장쩌민이 상하이로 돌아온 후 상하이교통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황급히 도피하고 나중에 정교하게 은폐하며 평생 거짓말을 품고 살았던 장쩌민은 이런 모든 점들 때문에 이 시기 피난했던 과거사를 잊기 어려웠다. 수십 년 후 그는 징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장시성 융신현에 하루 동안 머물렀고, 특별히 몐화핑이란 작은 시골 마을을 찾아가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왜 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외딴 산골 마을을 찾아와 둘러보는지, 그가 이 작은 마을과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때의 장쩌민은 더 이상 옛날 도피하던 한간 괴뢰 학생이 아니라 중공 총서기였으며, 감히 그에게 이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과거사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장쩌민은 역사의 비밀이 폭로될까 두려워 훗날 출세하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했던 그 선량한 농부를 찾아가지 않은 채, 깊은 아쉬움과 함께 극도의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1997년, 그 농부의 후손이 장쩌민이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적혀 있는 그 낡은 의서(醫書)를 발견하고 방법을 찾아 당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였던 웨이젠싱(尉健行) 아내의 ᄒᆞᆫ 친척을 통해 웨이젠싱과 연락이 닿아 장쩌민에게 보답 약속을 실천해 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 그러나 웨이젠싱 아내의 그 친척은 장쩌민이 국민당의 지명수배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 온 내막을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장쩌민의 한간으로 있었던 비밀이 들통나 재앙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워 그 후손을 설득해 단념시켰다

1992년 장쩌민은 장쑤성을 시찰할 때 특별히 난징대학을 방문했다. 난징대학교 측은 그의 일정을 잡으면서 장쩌민이 과거에 살았던 기숙사 건물을 그의 방문 경로에 의도적으로 포함시켰다. 장쩌민이 이곳까지 걸어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당시 기숙사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당시 모든 수행원들이 멈춰 섰고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난징대 지도부에서는 차마 “이곳이 당신이 당년에 여기서 수학했던 거처이며 지금까지도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장쩌민 역시 평소 쇼를 좋아하던 버릇을 고치고 그저 의아할 정도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위조된 대학 학력

장쩌민은 괴뢰 중앙대학에서 공부했던 역사에 대해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력서를 작성할 때면 늘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상하이교통대학에서 수학했다고만 적었다. 세 차례 수정 및 증보된 《난징 중앙대학(1940~1945) 동문 주소록》 기록에 따르면, 장쩌민은 1942년에 괴뢰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했다. 중공 신화망의 장쩌민 이력에 관한 내용은 오직 “1947년 상하이교통대학 전기과 졸업”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중공 지도자들의 학력에 대해서는 후진타오의 “1959~1964년 칭화대학 수리공학계 학습”처럼 매우 구체적인 연대를 제공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사실 장쩌민은 상하이교통대학에서 단 1년밖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중공의 선전은 당시의 난징 괴뢰 중앙대학을 중화민국 시기의 최고 학부로 포장했다. 항일전쟁 발발 후 1937년 11월 국민정부는 난징에 있던 국립 중앙대학을 충칭 사핑바(沙坪壩)로 이전시켜 충칭 중앙대학이라 불렀고, 항전 승리 후에야 난징으로 다시 이전했다. 1940년 4월 난징의 왕징웨이 정부는 중앙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난징에 중앙대학을 설립해 난징(괴뢰) 중앙대학이라 칭했으며, 1945년 항전 승리 후 해산되었다.

2002년은 난징대학교 개교 100주년이었다. 대학 측은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장쩌민이 당년에 괴뢰 중앙대학에서 받았던 성적표와 사진이 붙어 있는 도서 대출증을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곧바로 중앙조직부에 보고하여 장쩌민이 모교 개교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주기를 희망했다. 뜻밖에도 그들의 친척 찾기 초청은 중앙조직부 지도부의 즉각적인 제지를 받았고,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며 장쩌민을 난징대 개교기념식에 초청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난징대학교 측은 이 지시를 받고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중에야 장쩌민이 당년에 수학한 곳이 국민당으로부터 한간 괴뢰 대학으로 규정된 괴뢰 난징 중앙대학이었으며,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운영한 진링(金陵)대학교나 난징대학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난징대학교 측은 상급 기관의 지령 아래 장쩌민이 일제 괴뢰 한간이라는 악영향이 확산되는 것을 감히 감수하지 못했다. 비록 장쩌민을 난징대로 초청하지는 못했으나, 개교기념일 후 발간된 기념 문집에 특별히 장쩌민이 자술(自述)한 글을 게재해 그가 괴뢰 중앙대학 시절 어떻게 난징 거리에 뛰어 나가 시위 행진에 참가하고, 아편굴과 도박장에 돌진해 아편과 도박을 금지했는지를 마음껏 과장하고 선전하게 했다.

위조된 열사 자녀 신분

장쩌민의 친부는 본래 일제 괴뢰의 대한간(大漢奸)였고 장쩌민 본인도 한간 괴뢰 학생이라는 이유로 국민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그러나 1982년 이후 장쩌민은 느닷없이 중공의 열사 자녀로 탈바꿈했다. 장쩌민은 중공 건립 이전에 자신의 숙부인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장상칭은 1929년 중공에 가입했고 1939년 8월 항일전쟁 발발 초기 일본 괴뢰 정부의 지방 무장 조직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장상칭은 중공의 장아이핑(張愛萍) 상장(上將)과 교류가 있었다.

1982년 한 전국 규모 회의에서 회의에 참석했던 장쩌민은 회의가 끝날 때 회의실 문 앞에서 일부러 장아이핑을 기다렸다가 그가 나오자 앞으로 다가와 장상칭을 아는지 물었다. 장아이핑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장상칭을 알 뿐만 아니라 장상칭이 자신의 좋은 전우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장쩌민에게 장상칭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고, 장쩌민은 즉시 자신이 장상칭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가 곧바로 장상칭이 자신의 양부이며 장상칭이 사망한 후 친부모에 의해 장상칭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장아이핑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감격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장아이핑이 직접 공개 승인한 발언을 금과옥조로 삼아 도처에서 장상칭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자신이 중공 열사의 자녀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로부터 장쩌민이 장상칭의 양자라는 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82년 장상칭의 묘가 매장지인 안후이 동북부의 사현 관진에서 인접한 장쑤성 서북부의 쓰현(泗縣)으로 이전되었다.

1985년 장아이핑은 직접 장상칭의 묘비를 써주었고, 장쩌민은 즉시 그해 4월 아내 왕예핑(王冶坪)을 이끌고 장상칭의 두 딸인 장쩌후이(江澤慧), 장쩌링(江澤玲) 부부 및 장씨 가문의 일부 친척들과 함께 처음으로 쓰현을 찾아가 성묘했다. 이렇게 하여 장쩌민은 한간 고관의 자제이자 자신도 한간이었던 신분에서 정정당당하게 180도 돌변하여 정식으로 중공의 열사 자녀가 되었다.

장상칭의 직위는 중공 안후이성 성위원회 공위(工委) 선전부의 요원이자 국민당 성쯔진(盛子瑾) 부대 제5전구 보안부사령 겸 제5유격구 사령부 정치부 주임이었다. 반면 그의 형인 장스쥔은 매국노인 일본 괴뢰 정부의 고위 관료였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적대 진영에 속해 있었다. 만약 장스쥔이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면 일제 괴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을 것이므로, 장스쥔은 반드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장상칭과 선을 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일제 괴뢰가 그토록 뼈저리게 미워하는 장상칭에게 양자로 보낼 수 있었겠는가?

1939년은 마침 장쑤·안후이·허난 접경인 화중(華中) 지역에서 량훙즈(梁鴻志)를 우두머리로 하는 난징 괴뢰정부가 일본의 중국 침략과 반공을 돕던 것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일본 괴뢰는 해당 지역에서 다섯 차례의 대소탕을 감행했다. 일본 괴뢰 정부는 당연히 장상칭이 장스쥔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장상칭이 매복에 걸려 총에 맞아 사망한 지 반년 뒤인 1940년 11월, 장스쥔은 일본 괴뢰에 세운 큰 공로로 선전부 부부장이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장스쥔이 일제 괴뢰에 의해 사살된 공산당원 동생 장상칭에게 자신의 아들 장쩌민을 양자로 보냈다면, 이는 일제 괴뢰에게 자신이 공산당 동생에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모종의 소통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꼴이며, 스스로 일본에 반대해 공산당과 연계했다는 ‘붉은 모자’를 공개적으로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괴뢰 상사의 의심을 받을 터이니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2003년 무렵, 장쩌민이 과연 정말로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당시 중국 임업과학원 당위원회 서기였던 장쩌후이에게 직접 물어보았는데,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며 장쩌민이 자신의 아버지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양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다른 숙부와 백부 집안 역시 장쩌민이 중공 건립 이전에 큰아버지 장스쥔에 의해 여섯째 숙부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양자 입양 건은 장쩌민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장쩌민에게는 많은 친척이 있지만 그는 원래 그들과 왕래가 없었다. 오직 장상칭만이 자신의 친아버지보다 더 친한 친척이 되었고, 장쩌민은 장상칭의 가족들에게도 지극정성으로 관심을 쏟았다.

수년 후 장아이핑 장군은 장쩌민의 정교한 사기극의 전말을 알게 된 후 장쩌민의 기만과 우롱에 극도로 분노했고, 자신이 속아 넘어가 장쩌민의 가짜 위장에 부주의하게 일조했던 것에 대해 깊이 후회했다. 그러나 당시의 장쩌민은 이미 삼권(당·정·군)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터라 장아이핑이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에는 이미 무능력했고 너무 늦어버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아이핑 장군은 TV 화면에 장쩌민의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아주 역겹다고 생각해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TV를 꺼버렸고, 장쩌민을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기꾼이자 비열한 소인배라고 욕했다고 한다.

장쩌민은 중공 열사 자녀라는 신분을 지어낸 후, 자신의 위조된 열사 자녀 스토리에 살을 붙이고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2002년 10월 장쩌민의 지시에 따라 그의 측근이자 당시 광둥성 서기였던 리창춘(李長春)이 성위원회 조직부가 관할하는 간행물 《광둥지부생활(廣東支部生活)》에 장쩌민의 ‘양자 입양’ 문제를 길게 다룬 문장을 게재했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그 글의 제3부인 “열사의 부인 고아를 키우기로 맹세하다”라는 대목이다. 장쩌민을 너무나도 가련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당시 장쩌민은 괴뢰정부 선전부 부부장의 아들이었는데 어떻게 ‘부모 잃은 고아’가 될 수 있겠는가? 장쩌민이 대낮에 사기 쇼를 벌이자 부하들 역시 숨기지 않고 마음껏 기량을 뽐냈음을 알 수 있다. 이 잡지를 우습게 보지 마라. 발행량이 무려 거의 200만 부에 달해 당시 발행량이 가장 많았던 《난징도시보》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 달 뒤인 2002년 11월 중공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의 신분 세탁에 공을 세운 리창춘은 곧바로 정치국 상무위원회로 발탁되었다. 장쩌민은 국내에서 가짜 열사 자녀 쇼를 거하게 벌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초청해 자신의 전기를 집필하게 하고 자신이 열사 자녀임을 증명하게 했다.

미국인 쿤이 쓴 《장쩌민 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스쥔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 우웨칭(吳月卿)은 그들의 아들 장쩌민을 장상칭의 미망인 왕저란(王者蘭)에게 양자로 보냈다. ‘이 아이가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기를 바란다,’ 장스쥔은 양자 입양 의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악(萬惡)의 적에게 복수하라.’” 책에서 가리키는 ‘적’은 일본 괴뢰를 의미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상칭이 일제 괴뢰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장쩌민의 부친은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괴뢰를 위해 전력을 다해 복무하고 있었다.

2009년 9월 22일 장상칭의 친딸 장쩌후이는 《인민일보》 주요 기사면에 <장상칭 열사 70주년을 기념하며>라는 글을 발표해 또다시 양자 입양 문제를 언급했다. 장쩌후이는 이 글에서 “큰아버지 장스쥔과 큰어머니 우웨칭은 우애가 깊어 둘째 아들 장쩌민을 상칭을 계승하는 양자로 삼았고, 전통 풍습에 따라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으며, 큰어머니 우웨칭은 어머니 왕저란과 함께 집배원 어우양푸(歐陽甫)의 안내를 받아 장지인 추이지(崔集)로 성묘를 갔다”고 묘사했다. 즉 장스쥔 본인은 현장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쿤 버전의 ‘양자 입양’ 설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장스쥔을 거의 공산당원으로 만들 뻔했기 때문일 것이다.

뤼자핑(呂加平)은 이 글을 분석하며 장쩌후이가 글 속에서 양자로 입양된 시간을 고의로 모호하게 만들고, 양자 입양의 예의 규범을 혼동했으며, 장씨 형제 중 하나는 한간 매국노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 전사 사이의 날카롭고 적대적인 모순이란 배경을 특별히 도려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장스쥔의 한간 신분과 국민정부로부터 처벌받은 정황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소위 장씨 집안의 상처와 장스쥔·장상칭 형제의 ‘깊은 우애’라는 애틋함을 대대적으로 부각했다고 꼬집었다.

이것은 분명 애틋한 양자 입양 쇼를 벌여 사람들로 하여금 장쩌민이 장상칭이 희생된 직후 혹은 해방 이전 친부모에 의해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가짜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연한 거짓말로 사람들이 장쩌민이 장상칭의 양자라는 열사 자녀 신분을 믿도록 속이고, 자신이 한간이자 가짜 열사 자녀라는 진실을 계속 은폐하며, 계속 정치적 자본을 얻어, 광범위한 간부들 및 당내의 신임을 편취하려는 의도였다.

장쩌후이의 글에서는 전통 풍습에 따라 장쩌민이 상복을 입고 장상칭의 무덤에 가서 성묘하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장쩌민이 정식으로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입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양자 입양 규칙의 기본적인 상식을 결여한 것이다. 양자 입양 예의를 거행할 때는 피입양자의 남자 어른이나 해당 문중의 어른이 반드시 현장에서 의식을 주재해야 하며, 반드시 문중 사람들 앞에서 입양 계약서 서명을 포함한 양자 입양 수속을 이행하고 그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양자를 입양하는 목적은 원래 가족이나 일족 중 자손이 없는 형제로 하여금 양자를 얻어 친자식을 대신해 대를 잇게 하고, 양자로 간 집안의 혈맥과 가업·재산이 계승되고 연장되도록 하는 데 있다. 당시 왕저란의 집안은 근본적으로 장쩌민의 생활비와 학업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장스쥔은 이미 형편이 어려운 과부 제수 왕저란에게 장쩌민을 또다시 양자로 보내 그녀 집안의 부담을 가중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장스쥔이 정말로 도우려 했다면 일정한 경제적 원조를 해주면 그만이었다. 장쩌후이가 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장쩌후이의 집안은 “끝없는 빈곤과 배고픔”이었다고 하니, 장스쥔이 이런 지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스쥔은 형제 중 첫째였고, 본래 이름이 장스후(江世候)였던 장상칭은 여섯째였다. 중국 역대로 장자를 우대하고 차자를 가볍게 여기는 전통적인 계승 풍속에 따르면, 장자의 아들을 동생에게 양자로 보낼 수는 없다. 장상칭 역시 이러한 일을 하라는 어떠한 유언도 남긴 적이 없다.

뤼자핑은 심지어 장스쥔이 장상칭을 살해하는 이 음모 활동에서 일제 괴뢰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공산당원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 괴뢰가 자신을 공산당과 내통한다고 의심하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괴뢰 주인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며 동생의 소식을 염탐하고 제공해 적과 괴뢰들이 그를 암살하는 데 이용되도록 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상칭이 피습당해 사망한 지 불과 반년 뒤인 1940년 3월 왕징웨이 괴뢰 중앙정부가 난징에 수립되었을 때, 장스쥔은 일제 괴뢰에 세운 큰공으로 선전부 부부장이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어떤 큰공이었을까?

중공 중앙은 일찍이 장쩌민을 위해 전기를 저술할 전문 집필진을 구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필진은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장쩌민의 내세울 만한 치적을 별로 찾지 못했고, 오히려 장쩌민의 부끄러운 많은 일면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그가 출신 역사를 뜯어고치고 위조한 진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쩌민은 이 집필진에 매우 불만을 품고 그들을 해산시켰다.

위조된 중공 가입 역사

장쩌민이 중공에 가입한 시점은 줄곧 불확실했다. 한 가지 설은 1944년에 중공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1943년 장쩌민이 난징 괴뢰 중앙대학에 다닐 때 중공 지하당이 지도한 학생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나중에 같은 학교의 고학년 동급생 왕자유(王嘉猷)의 소개로 1944년 중공 지하당에 가입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설은 1946년이라는 주장으로, 2002년 11월 중순 중공 제16차 전국대표대회 종료 후 발표된 대회 공식 공보에서 비롯되었다. 공보는 장쩌민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그가 1946년에 입당했다고 했다. 2003년 3월 제10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종료 후 대회 공보는 더욱 구체적으로 장쩌민이 1946년 4월에 입당했다고 공표했다. 1946년 3월 국민당이 괴뢰 학생 심사 판별에 대한 철회 명령을 거두어들이고 ‘일면 접수, 일면 수업’ 정책으로 변경하자, 장쩌민 역시 피난처였던 장시에서 상하이로 막 돌아왔다. 그의 부친은 한간 수배범이었고 그 자신 역시 한간 문제가 있었으므로 상하이시의 중공 지하당 조직이 그러한 한간 배경을 가진 사람을 검증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그들의 조직으로 흡수했을 리 만무했다.

세 번째 설은 1956년 8000명의 소련 유학 인원이 귀국한 후 집단으로 입당 수속을 밟을 때 비로소 중공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당시 장쩌민은 안산(鞍山)의 모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한 퇴직 군간부 후쒀밍(胡鎖明)은 중공이 주장하는 장쩌민이 1946년 4월 중공 지하당에 가입했다는 설이 허구임을 확실히 증명했다. 후쒀밍은 1925년에 태어나 1942년 상하이 지하당에 가입했고 그해 상하이교통대학 기계과에 입학해 1946년에 졸업했다.

후쒀밍의 증언에 따르면, 장쩌민은 1946년 난징 괴뢰 중앙대학이 상하이교통대학으로 합병될 때 상하이로 편입해 온 인물로, 상하이교통대학 전기기계과에서 공부했다. 후쒀밍은 기계과였으며 장쩌민보다 한 기수 아래였다. 상하이교통대학 중공 지하당 조직 활동을 할 때 후쒀밍은 장쩌민이 참여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장쩌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거나 장쩌민 역시 중공 지하당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장쩌민이 중공 건립 이전에 중공 지하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

장쩌민은 자신이 진정한 중공 지하당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도처에서 자신이 1946년 난징에서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전학한 후 교통대학에서 입당했으며, 입당을 소개한 사람은 역시 난징 괴뢰 중앙대학에 다니던 중공 지하당원 왕자유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후쒀밍은 사실 왕자유는 난징 괴뢰 중앙대학 시절 입당 수속이 제대로 완료되지 않아 정식 중공 지하당원으로 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왕자유는 장쩌민에게 입당 소개인을 서 줄 자격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었다고 폭로했다.

후쒀밍에 따르면 항전 승리로 난징이 수복된 후 국민당의 압박 속에서 중공 난징 지하당의 일부 일본 괴뢰 부서 및 학교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던 당원들은 처지가 곤란해졌다. 게다가 난징 괴뢰 중앙대학이 상하이로 이전해 상하이교통대학과 합병하게 되었기 때문에 잇달아 상하이로 이전해 피난을 가거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에 당시 중공 난징 지하당 시위원회 서기 천슈량(陳修良)과 시위원회 지도부는 상하이 지하당 시위원회와 연락하고 협상한 끝에 이들 중공 당원들의 당조직 관계를 정식으로 상하이 지하당 시위원회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원래 난징 괴뢰 중앙대학의 업무 및 학업 종사자 중 상하이로 온 중공 지하당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난징 지하당원들의 난징에서 상하이로의 이관 작업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제때 처리되지 못해 1947년이 되어서야 천슈량이 그들의 당원 조직 관계를 중공 상하이시위원회의 수중에 넘겨주었다. 상하이시위원회에서 이를 접수 책임진 사람이 바로 후쒀밍의 입당을 소개한 허충인(賀崇寅)이었다.

이들 상하이 지하당으로 이관된 인원들 중에서 천슈량은 장쩌민이 중공 난징 지하당원인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허충인은 자신이 1947년 난징에서 넘어온 이들 중공 당원들을 인수받았을 때 그 명단에 장쩌민이라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가 장쩌민을 난징 지하당원으로 상하이교통대학 지하당 책임자 우쩡량(吳增亮)에게 넘겨주었을 리 만무하다고 회고했다. 우쩡량 역시 자신의 상하이교통대학 지하당 조직에는 장쩌민이라는 당원이 없었으며 장쩌민은 자신에게 입당 의사를 표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장쩌민이 과연 중공 지하당원이었는가 하는 이 문제는 그들 모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또 중대사였기 때문에, 나중에 우쩡량, 허충인, 천슈량 세 사람은 이 문제를 위해 특별히 모임을 갖고 대조해 보았다. 그들이 도출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장쩌민은 1946년 난징 괴뢰 중앙대학에서나 상하이교통대학에서나 모두 중공 지하당원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중공이 상하이를 점령할 때까지 그는 중공 지하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쩌민은 총서기에 오른 후 자신이 진정 1946년에 중공 지하당에 가입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에 아직 중공 정식 당원이 아니었던 왕자유를 끌어내어 상하이교통대학의 입당 소개인이라 우겼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허충인마저 상하이교통대학에서 자신의 입당 소개인으로 날조했다. 허충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장쩌민의 이 같은 파렴치한 행태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하며 이를 반박했다. 그러나 이때 장쩌민은 이미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에 장쩌민이 자신의 가짜 지하당원이란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이러한 내부 사정을 아는 인물들을 살인멸구(殺人滅口)할까 두려워 감히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다만 글을 작성하여 자신이 장쩌민의 입당을 소개한 적이 없음을 완곡하게 표명할 뿐이었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진

2012년 5월 최초 발표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941